조선시대 최고 문학작품인 수필의 진수를 맛보다
-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 <일야구도하기>를 읽고
이현원
이달 ‘수필DJ’코너에는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골랐다. 박지원은 1737년 서울 서소문 부근에서 태어났다. 호는 연암(燕巖)이다.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청소년 시절부터 학문을 익혔으나 과거시험으로 입신양명을 위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친구들과 교분을 맺고 유명한 산을 돌아다니며 토론을 즐겼다. 당시 대세였던 북벌론과 중화 사대사상을 배격하고 실사구시와 북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뒤늦게 오십이 되어 지방관직을 맡아 백성을 돌보는 삶 속에 묻혀 살았다. 그는 65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서울로 돌아온 후 69세에 사망하였다.
연암이 43세 때 청나라 건륭황제의 칠순을 축하하는 조선 사절단 일원으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그의 팔촌 형인 정사(正使) 박명원이 데려간 수행원 자격이었다. 1780년(정조4년) 5월 25일 한양을 떠나 10월 27일 돌아왔으니 5개월 동안의 오랜 여정이었다. 열하일기는 압록강을 건널 때부터 요동과 연경(북경)을 거쳐 열하(승덕)1)까지, 다시 연경으로 돌아오는 2개월 가까이 날짜별로 기록했다. 단순한 여행기라기보다는 저자의 박식과 철학이 담긴 다방면의 체험을 기록한 생동감 있는 견문록이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뛰어난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작품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이 당시 조선과 사대부를 비판함으로써 기존 질서와 성리학이란 울에 갇힌 식자들의 미움을 사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대상이 되었다. 그동안 출판이 금지되고 필사본으로 내려오다 1900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책이 간행되고 빛을 보기 시작했다. 숨은 보석이 광채를 발하는 계기였다. 한문으로 쓰인 열하일기는 필사본, 활자본, 영인본 등으로 나누어 여러 종류가 전해지고 있다. 편, 역자에 따라 수록된 글도 제각각이다. 이 글은 1968년 민족문화추진회 발행본을 원전(原典)으로 삼았다.
매일의 여정에서 떼어내 별도로 쓴 수필이 있다. 그것은 <야출고북구기>2), <일야구도하기>3), <상기>4), <환희기>5) 등으로서 연암 사상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명문장의 산문이라 하겠다. 그의 호방한 기질과는 대조적으로 주도면밀하고 화려한 필치를 접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일야구도하기> 글을 중심으로 엮고자 한다.
하수(河水)는 두 산 틈에서 나와 돌과 부딪쳐 싸우며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머리와 우는 여울과 노한 물결과 슬픈 곡조와 원망하는 소리가 굽이쳐돌면서, 우는 듯, 소리치는 듯, 바쁘게 호령하는 듯, 항상 장성을 깨트릴 형세가 있어, 전차(戰車) 만승(萬乘)과 전기(戰騎) 만대(萬隊)나 전포(戰砲) 만가(萬架)와 전고(戰鼓) 만좌(萬座)로서는 그 무너뜨리고 내뿜는 소리를 족히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수필의 시작부터 문장이 뛰어나 독자를 사로잡는다. 강물이 산에서 돌과 부딪치며 폭포같이 쏟아지는 광경을 표현했다. 놀란 파도, 성난 물줄기, 우는 여울, 노한 물결, 슬픈 곡조, 원망하는 소리의 다채로운 수식 어휘가 장관이다. 울부짖는 듯, 고함을 지르는 듯, 포효하는 듯, 만리장성이라도 깨뜨릴 형세 같은 비유도 놀랍다. 1만 대의 전투차량, 1만 명의 기병, 1만 문의 대포, 1만 개의 전투 쇠북이라는 표현은 다소 과장 같기도 하나 강조가 돋보이는 묘사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사절단의 여행은 많은 인원이 강행군함으로써 여간 고생스러운 게 아니었다. 북경에서 열하까지 가는 일정이 다급했다. 나흘 동안 눈 한 번 붙이지 못했고 하인들은 모두 선 채로 잠을 잤다고 했다. 연암은 ‘나도 졸음을 견디다 못해 눈꺼풀은 구름 드리우듯 무겁고 하품은 바닷물 밀려오듯 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나는 이제야 도(道)를 알았도다. 마음이 어두운 자는 이목이 누(累)가 되지 않고, 이목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혀져서 병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내 마부가 발을 말굽에 밟혀서 뒷 차에 실리었으므로, 나는 드디어 혼자 고삐를 늦추어 강에 띄우고 무릎을 구부려 발을 모으고 안장 위에 앉았으니, 한 번 떨어지면 강이나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으며, 물로 몸을 삼고, 물로 성정을 삼으니, 이제야 내 마음은 한 번 떨어질 것을 판단한 터이므로 내 귀 속에 강물소리가 없어지고 무릇 아홉 번 건너는 데도 걱정이 없어 의자 위에서 좌와(坐臥)하고 기거(起居)하는 것 같았다.
여기에서 ‘마음이 어두운 자는 이목이 누가 되지 않고’라는 한문체 문장이 나온다. 명심(冥心) 즉 마음이 깊고 지극한 사람이야말로 귀와 눈이 마음의 폐해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귀나 눈에 의지하는 사람은 오히려 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사람이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잠언으로도 해석된다. 이렇게 연암의 글에는 경구가 많이 나온다.
그의 마부가 말발굽에 발을 밟혀 뒤 수레에 실렸기 때문에 마부 없는 말 안장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서 강을 건너게 됐다. 만일 말에서 떨어진다면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면서 떨어질 각오까지 했다. 그러니 그의 귀에 강물 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지만 아무 근심도 없었다. 말의 안장 위에서 앉았다 누웠다 하며 자유자재로 몸과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도를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외물에 현혹되지 않는 관조의 경지랄까 사즉생(死卽生)이라고 할까. 저자의 내공을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열하일기에 나오는 기지와 유머가 일품이다. 연암은 끝없이 펼쳐진 요동 벌판을 보고 ‘좋은 울음터이다. 크게 한번 울어볼만 하다’라고 답답함을 풀기에 제격이라고 해학의 불을 지핀다. 조선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답답함을 토로하는 그의 호연지기가 대단하다. 정밀하고 화려한 청 문물을 접하고는 ‘청나라의 장관은 기와조각과 똥 부스러기에 있다’라며 하찮은 물건을 지혜롭게 운용하고 있음을 익살스럽게 꼬집고 있다. 그의 유머는 단순한 웃음이라기보다 낡은 습관과 형식에 매여 있는 조선의 현실을 비트는 기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글에서 이용후생(利用厚生)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백성들에게 편익을 도모하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청나라 벽돌과 수레의 도입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수레에 대한 설명과 편리한 점을 여러 쪽에 걸쳐 기술하고 있다. 중국의 풍성한 재물이 이곳저곳 쉽게 옮겨지는 것은 수레 덕분이다. 우리 수레에 우리 물건을 싣고 우리가 바로 연경까지 간다면 참으로 편리할 것이라고 했다. 산이 많고 길이 좁아서 조선에는 수레가 맞지 않다는 현실론에 대해 이를 도입하면 되레 길이 넓어진다고 받아치고 있다. 조선은 청나라의 우수한 문물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며 오랑캐 나라에서도 좋은 점이 있으면 배워야 한다고 북학론자의 뚜렷한 소신을 보여주고 있다.
연암은 자신을 삼류 선비라고 일컬었다. 그러면서 찰나에 불과한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고 공을 세우겠다고 욕심부리는 사람이 있음을 서글프다고 질타했다. 몸가짐이 약삭빠르고 스스로 총명하다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며 글을 끝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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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열하(승덕) : 오늘의 청더(承德)로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북부 러허강(熱河江) 서쪽 기슭에 있는 도시. 옛 러허성(熱河省)의 성도였으며 청나라 때 황제의 별장이 있었음.
2)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 ‘밤에 고북구를 떠나다’라는 뜻으로 고북구는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도중에 만리장성이 지나고 있는 지명
3)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 ‘하룻밤에 강물을 아홉 번 건너다’라는 뜻으로 연경에서 열하로 급히 가기 위해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너가야 했음.
4) 상기(象記) : ‘코끼리에 대한 기록’으로서 코끼리를 보고 느낀 특이한 점을 자세하게 쓰고 있음.
5) 환희기(幻戲記) : ‘기이한 묘기와 요술에 대한 기록‘으로서 오늘날 마술이나 서커스와 같은 요술쟁이에 대한 견문을 자세하게 표현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