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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의연꽃님 블로그...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무원해탈(無願解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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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의 거울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무원해탈(無願解脫)
담마다사 이병욱 ・ 2025. 1. 28. 15:39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무원해탈(無願解脫)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란다. 지금 괴로운 자는 이 괴로움이 하루 빨리 사라져서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무원해탈에서는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행복의 반대말은 괴로움이다. 괴로움은 멀리 떠나고 늘 행복한 상태가 지속되기만을 바라는 것은 갈애이다. 그래서 무원은 행복한 것들, 좋은 것들을 바라지 않는다. 결국 갈애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불교는 참으로 역설적인 가르침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세상 사람들의 흐름과는 반대로 간다. 세상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할 때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삶을 산다. 그렇다고 불행을 바라지도 않는다.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삶이다. 심지어 공덕도 짓지 않는다.
법구경에 “공덕과 악행을 버리고 여기서 청정한 삶을 살면서 신중히 세상을 거닌다면, 그가 바로 수행승이라 불린다.”(Dhp.267)라는 게송이 있다. 여기서 공덕(puñña)과 악행(papa)을 버린다는 것은 어떤 업도 짓지 않음을 말한다.
여기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있다. 하나는 윤회하는 삶이고 또 하나는 윤회를 끊는 삶의 방식이다. 전자는 행복을 추구한다. 공덕을 지어서 보다 높은 세계에 태어나길 바란다. 후자는 행복마저 거부한다. 윤회의 원인이 되는 공덕마저 짓지 않는 삶이다.
수행자는 공덕도 악행도 버린다. 그렇다고 선도 버리고 악도 버리는 것은 아니다. 단지 윤회의 원인이 되는 행위(業)를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작용하는 마음(作用心, kiriyacatta)’만 있게 된다.
작용심은 부처의 마음 또는 아라한의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어떤 경우에서도 업이 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악업은 있을 수 없다. 당연히 공덕도 짓지 않는다. 단지 그런 줄 아는 것이다. “그렇네”, “그렇군”, “그렇구나”라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어떤 스님이 댓글을 달았다. 위빳사나수행방법론을 읽고 느낌을 쓴 글에 대하여 자신은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햇다고 써 놓았다. 이런 글을 접하면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만 “그렇군요.”라고 써 놓았을 뿐이다.
사람은 위기에 닥쳐 보아야 알 수 있다. 성인군자 같은 사람도 특별한 환경에 놓이게 되면 바닥이 드러난다. 화를 내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라한이라면 “그렇네”, “그렇군”, “그렇구나”라며 단지 작용하는 마음, 기계적인 마음만 있게 될 것이다.
무원해탈(無願解脫)이 있다면 무상해탈(無相解脫)도 있고 공해탈(空解脫)도 있다. 이를 삼해탈이라고 한다. 열반에 들기 직전에 있는 단계이다. 무상, 고, 무아와는 다르다.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다. 깨달은 단계적으로 성취된다. 삼해탈은 최종단계에 있다. 열반으로 들어가기 직전을 말한다.
위빳사나수행방법론에 따르면 수행자가 해야 할 것은 무상, 고, 무아를 체득하는 것이다. 이후 단계는 지혜의 힘에 의해서 성취된다고 말한다. 책에서는 “저절로”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마치 감이 익어서 떨어지는 것과 같다.
수행에는 어느 정도 애씀의 단계를 필요로 한다.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는 것도 애쓰는 것이다. 좌선 할 때 자세를 바꾸지 않는 것은 법의 성품을 보기 위한 것이다. 어떤 성품인가?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말한다.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 무더기, 덩어리, 다발의 상태에서는 법의 성품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위빠사나 1단계 지혜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것은 정신 따로 물질 따로 새김을 말한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긴다.
배가 부푸는 것은 물질적 현상이고 이를 아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이 두 가지를 새겨야 한다. 사띠(sati)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도로 집중해야 한다. 마치 현미경으로 미물을 들여다 보듯이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 마치 오실로스코프로 시간을 분할하여 보듯이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 그러면 보인다.
정신과 물질의 현상을 보려면 고도로 집중이 되어야 한다. 집중이 되면 새김(sati)도 분명해진다. 이에 따라 지혜도 생겨난다. 위빠사나 지혜를 말한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1단계),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지혜(2단계)가 생겨난다. 이것이 가장 기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오온에 대하여 내것이라고 생각한다. 몸도 내것이고, 느낌도 내것이고, 지각도 내것이고, 형성도 내것이고, 의식도 내것으로 본다. 그러다 보니 눈으로 대상을 보아도 ‘내가 본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보면 내가 보는 것이 아니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자아라는 개념을 부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몸, 느낌, 지각 등에 대하여 내것이라고 믿고 있는 관념을 부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구분해서 관찰해야 한다.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는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구분해서 관찰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는 “삼세에 대해 원인으로서의 물질-정신만 존재하고, 결과로서 물질-정신만 존재한다고 결정할 수 있다.”(위빳사나수행방법론 2권, 671쪽)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나라는 개념은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정신과 물질만 있을 뿐이다.
좌선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몸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된다. 단지 호흡과 이를 아는 마음만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럴 때 정신과 물질만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를 여실지견(如實知見: yathābhūtañāṇadassana), 즉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이라고 말한다.
여실지견은 위빠사나 2단계 지혜에 해당된다. 조건파악의 지혜를 말한다. 어느 것이든지 조건 지어져 발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이 조건이 되어 또 다른 정신과 물질이 생겨난다. 이렇게 끊임 없이 조건에 따라 발생한다.
조건발생은 마치 강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 한지점에서 보았을 때 어느 것도 같은 강물은 없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순간도 하나도 똑 같은 것이 없다. 이전의 정신과 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이후의 정신과 물질이 생겨난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 생에서 다음 생으로 끊임 없이 이어진다.
조건발생에 자아는 있을 수 없다. 당연히 창조주도 없다. 창조주가 제1원인이 되어 생겨났다는 것은 조건발생의 법칙(緣起法)에 어긋난다. 홀로 우연히 발생하는 것도 없다. 모든 것은 관계와 관계 속에서 조건에 따라 발생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이 말은 카잔스키 묘비명에 적혀 있는 문구이다. 여기에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라는 말이 덧붙어 있디. 이 말을 보니 무원해탈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해탈은 벗어나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카잔스키의 묘비명에 적혀 있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라고 말한 것은 무원해탈과 유사한 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카잔스키는 불교를 알았을까? 불교를 접했을지도 모른다. 불교수행까지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라는 말은 삼해탈 가운데 무원해탈을 잘 표현한 문구와도 같다는 것이다.
무원해탈 하려면 행복을 바래서는 안된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오욕락의 행복과 선정의 행복이기 쉽다. 이와 같은 행복을 향유하려 하면 대자유를 얻을 수 없다.
행복 가운데 최상의 행복은 열반의 행복이다. 그런데 열반의 행복은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가 최상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역설적이다. 세상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을 행복이라 말하지 않는다. 세상사람들이 행복이라 말하지 않는 것을 행복이라고 말한다. 오욕락의 행복과 선정의 행복은 지금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열반의 행복은 느낄 수 없다.
열반의 행복은 지각과 느낌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지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 정신과 물질(名色) 사라져 버렸을 때 아무 것도 지각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것이 된다.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지각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기 때문에 최상의 행복이 된다. 무아의 행복이다.
행복을 바라면 해탈 할 수 없다. 해탈하려거든 행복을 바라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바란다. 아무리 괴롭더라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지금 괴로운 자는 지금 겪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정도만 바라고 기대한다. 어떻게 기대하는가? 병에 걸린 자라면 “이번 한번만 낫게 해주신다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습니다.”라고 자신의 신에게 다짐할지 모른다. 가난한 자라면 재산이 많기를 바랄 것이다. 현재 생에서 바랄 것이 없다면 다음 생에 잘살기를 바랄 것이다. 이는 애착이다. 행복을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해탈할 수 없다.
해탈은 대자유와 동의어이다. 대자유를 얻으려거든 크게 버려야 한다. 행복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을 버려야 한다. 가장 사랑하는 것도 버려야 한다.
여기 나쁜 아들이 있다. 이런 아들은 버려야 한다. 그렇다고 정말 내다 버려서는 안된다. 버려야 할 것은 아들에 대한 애착이다. 그래서 “ ‘내 아들이다’라는 인식을 완전히 제거하여 버리게 되면, 그때부터 시작하여 그 나쁜 아들과 관련된 몸과 마음의 괴로움도 제거하여 버린 것이 된다.”(위빳사나수행방법론 2권, 634쪽)라고 했다.
버려야 할 것이 있고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 사람이 싫다고 하여 그 사람을 멀리 한다면 그 사람을 버리는 것이 된다.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잘못이 있다면 나에게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 만물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 의도된 탐욕이 감각적 욕망이네.”(S1.34)라고 했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하여 나쁘게 본 것은 내 마음이 더럽기 때문이다.
내가 그 사람을 나쁘게 본 것은 내 마음이 더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시각이 형상을 묶고 있는 것도 형상이 시각을 묶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생겨난 욕망과 탐욕이 있는데 그것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S35.232)라고 했다. 나의 마음이 번뇌에 묶여 있어서 그 사람을 나쁘게 본 것이다.
자녀가 말썽을 피운다고 하여 버릴 수 없다. 버려야 할 것은 자신의 더러운 마음이다. 그래서 “ ‘내 아들이다’라는 인식, 애착을 완전히 제거하여 버렸을 때 그 아들도 버렸다.”라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형성들에 대하여 ‘항상하다, 행복하다, 자아이다’라는 집착을 버려야 한다. 어떻게 버리는가? ‘무상하다, 괴로움이다, 무아이다’라며 거듭관찰하며 제거하여 버리는 것이다.
위빳사나수행방법론에서는 형성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방법에 대하여 아들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 놓았다. 나쁜 아들을 버리는 것은 아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과 같다.
수행자는 형성된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 마치 나쁜 아들을 버리듯이 버려야 한다. 나쁜 아들에 대한 애착을 버리듯이, 형성된 모든 것들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로 관찰했을 때 형성은 버려진다.
초기경전을 보면 무상, 고, 무아에 대한 가르침이 수도 없이 펼쳐져 있다. 그렇다고 말로만 ‘무상하다, 무상하다’라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여 무상, 고, 무아를 관찰해야 한다. 그런데 거듭관찰하다 보면 무상해탈, 무원해탈, 공해탈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해탈은 벗어나는 것이다. 벗어나려면 먼저 내가 갇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온이라는 감옥에 갇힌 것이다. 내가 갇힌 것을 안다면 탈출하려 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오온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무원해탈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행복이라 말하지만 괴로움이라고 받아 들여야 한다.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을 때, 갈애하지 않을 때 무원이 된다. 괴로움을 거듭관찰하다 보면 무원해탈에 이르게 된다.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2025-01-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