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기행紀行, 송하의 노래.
송하도 창 아래쪽 법당 마루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러자 옆에 앉은 일행 한 분이 빨간 방석을 밀어주었다. 일행에게 눈인사를 하고나서 방석을 깔고 앉으니 더 편안했다. 허리를 주욱 펴고 앉아서 맞은편에 있는 부처님과 그 옆의 빈 벽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머릿속에는 가을햇살이 꽉 차있어서 파란 풍선처럼 자꾸자꾸 머리통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머리통과 더불어 눈과 귀도 부풀어 오르는지 막혔던 곳이 시원하게 탁 트여오는 기분이 들었다. 뒤쪽에서 두 사람이 목소리를 낮추어 살금살금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였다. 빨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열린 창을 통해 들어와서 멈칫거리더니 법당 한가운데로 날아갔다. 고추잠자리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파다파다” 하는 소리가 조용한 허공중에 가벼운 파문을 남겼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고추잠자리에게로 쏠렸다. 고추잠자리는 허공을 맴맴 돌다가 법당 천정 주변에서 몸을 부딪칠 듯이 조금은 불안하게 돌아다니더니 아래로 내려와 벽 한쪽에 앉아 있는 일행 중 한 사람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것을 쳐다보고 있던 사람들이 와아! 하고 웃으면서 박수를 쳤고, 예상치 않게 고추잠자리에게 어깨를 빌려주었던 초록색 패딩점퍼를 입고 있던 여자회원은 당황한 몸짓으로 얼굴을 붉혔다. 눈에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 아마 신입회원인 듯했다. 옆에 앉아 있던 여자 분이 고추잠자리를 잡으려고 손가락을 살며시 뻗자 고추잠자리는 어깨를 훌쩍 떠나 다시 허공중을 맴돌았다. 법당 안을 순례하며 우리 일행들에게 가을의 진한 맛을 선사하던 고추잠자리는 다시 열린 창을 통해 밖으로 날아 가버렸다. 한 마리의 고추잠자리가 가을을 통째로 등에 지고 날아다니던, 고추잠자리에게는 다소 무거웠겠지만 한 장의 낙엽처럼 가뿐한 10월 첫째 날 오전10시의 풍경이었다.
삼층 법당에서 밖으로 나간 사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보탑사 경내를 돌아다녔다. 송하는 다른 일행들이 법당을 다 빠져나간 뒤에도 삼층 법당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창을 통해 밀려들어온 햇살 알갱이들이 먼지처럼 허공에서 부유하는 모습도 좋았고, 비스듬한 각도로 쏟아지는 햇살을 반사시키고 있는 법당마루 바닥의 따스한 온기도 좋았다. 언제 피웠는지 가끔 향냄새가 코끝을 설핏 지나다녔다. 창에 기대어 잠시 서 있다가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이층으로 내려가는 나무 계단을 딛으려고 하는데 비밀 층 벽에 전시되어 있는 목탑 사진을 누군가 혼자 구경을 하고 있었다. 송하는 몸을 돌리고 까치걸음으로 몇 발자국을 걸어서 그쪽을 쳐다보았다. 옆모습은 낯설었지만 초록색 패딩점퍼가 눈에 띄었다. 그러자 빨간 고추잠자리가 초록색 패딩점퍼 어깨에 앉았던 생각이 났다. ‘혼자서 답사에 온 모양이군.’ 송하는 조용히 뒷걸음질 쳐서 나무 계단을 내려갔다. 목조 3층탑을 나서자 밖은 햇살과 들꽃과 삽상한 가을 기운들 투성이였다. 하얀 구절초와 붉은 코스모스가 파란 하늘과 썩 잘 어울렸다. 보탑사는 목조 3층탑을 한 가운데 두고 주위를 빙 둘러가며 다른 건물들이 서 있었다. 건물 하나하나 마다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한 군데 한 군데를 꼼꼼히 둘러보았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목조 3층탑의 외관을 찬찬히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십여 년 전에 당대의 명장들이 심혈을 기울여 지었다는 목탑답게 위용이 웅장하고 선이 유려하였다. 그렇게 목탑을 두세 바퀴를 돌아보다가 극락보전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법당 앞마당에 코끼리만한 바위가 솟아 있는 것을 보았다. 바위 틈새기에는 허리 긴 풀과 보라색 들꽃이 뿌리를 내리고 가을바람에 여윈 몸을 흔들고 있었다.
목탑의 일층 법당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앞에 불쑥 튀어나와 있는 코끼리 몸통만한 바위는 자연과 인위가 교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목탑 창건 당시 바위를 뽑아 내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목탑을 지은 명장의 손길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송하는 바위 있는 곳으로 걸어가 일부러 바위에 걸터앉아 보았다. 골을 따라 내려온 바람이 경내를 한 바퀴 돌아 송하의 어깨를 스치고 목탑으로 밀려갔다. 송하가 눈을 사르르 감자 목탑을 창건하던 당시의 풍경과 말소리들이 들려오는 듯했다.
“아니, 아니야. 그 바위를 뽑아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둬. 그 바위가 있으니 나무로 지은 3층 목탑이 더 생생하게 살아나는 거야. 자, 잠시 땀을 들렸다가 저 바위와 3층 목탑과의 간격을 생각해보자구.”
송하가 눈을 떴을 때는 일행들이 주차장 쪽으로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바위에서 일어나 일행들의 뒤를 따라 입구인 범종각을 향해 걸어갔다. 돌계단을 내려딛으려다 가로로 긴 화분에 풍성하게 잘 자라있는 식물을 가리키며 옆에 서 있는 닉네임이 최진사인 일행에게 물었다.
“저, 최진사 님. 이게 뭐지요?”
최진사는 화분에 있는 식물을 쓰윽 훑어보더니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아니, 산여울 님은 배추도 몰라요? 여기 화분에다 이렇게 심어서 잘 길러놓으니 불로초라도 되는 줄 아셨소?”
송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예? 이게 배추라고요? 가만있자, 그래 배추가 맞는 것 같은데, 그런데 배추를 어떻게 이리 깨끗하게 잘 길렀을까요?”
최진사는 손을 내밀어 풍성한 배춧잎을 쓰다듬어보더니 감탄사를 연발했다.
“야, 잘 가꾼 화초처럼 깨끗하게 참말 잘 길렀지요? 배추를 아무나 이렇게 기르기가 쉽지 않아요. 비구니 스님들이나 되니까 정성을 다해 이렇게 기르지 밭에서는 이렇게 기를 수가 없어요.”
송하도 감탄 섞인 눈으로 화분을 쳐다보며 말했다.
“거참, 배추가 꽃보다 더 예쁘군요.”
송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포기가 풍성하게 잘 벌어진 배추를 보면서 감탄을 했다. 하얀 구절초와 빨간 코스모스가 경내에 꽃동네처럼 어우러져 있는 보탑사 입구인 돌계단 앞에 가로로 긴 화분을 만들어 포기 좋은 배추를 화초처럼 길러낸 발상이 무척이나 돋보였다. 화려한 들꽃에 전혀 기죽지 않는 질박한 초록의 대변신이었다. 범종각과 법고각 사이로 난 돌계단을 내려가 사천왕문을 나서면 그 느티나무가 서 있는 곳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느티나무 옆으로 다가간 송하는 느티나무를 두 팔로 감싸 안아보았다. 송하 한사람의 벌린 팔로 감싸기에는 턱도 없이 굵은 몸피였다. 아마 서너 사람은 나무 둥치를 빙 둘러서야 할 듯싶었다. 느티나무를 배경으로 일행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었다. 송하는 주차장으로 내려가 주차장 옆에 널려있는 채마밭을 둘러보았다. 가을걷이를 앞둔 밭에는 한 해 동안의 결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노랗고, 붉고, 푸른색들이 일부러 색상을 맞추어놓은 것처럼 조화를 이루며 잘 어우러져있었다. 일행들이 버스에 하나둘 오르고 나자 보탑사를 뒤로 하고 아직까지는 한적한 왕복 1차선 오솔길을 버스는 휭 하니 달려갔다.
(- 진천기행紀行, 송하의 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