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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풍경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윤명선
1979년 3월 15일에 대도레코드에서 출범한 앨범
조동진 1집 A면의 다섯번째 트랙에 수록된 곡입니다
배가 있었네
작은 배가 있었네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떠날 수 없네
멀리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라라 라라라 라라라 라라라라라
라라 라라라 라라라 라라라라라
라라라 라라라 라라라라 라라라라
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네
멀리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네
멀리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66년 음악 활동을 시작한 그는 주류 무대에서는 쉽게 만나볼 수 없어 '기인'으로 비쳐졌다. 가수보다는 기타리스트, 작곡가로 12년의 야인생활을 보낸 그의 음악 뿌리는 록이다.
66년 미8군 록밴드로 음악을 시작해 록그룹 '쉐그린'과 '동방의 빛' 리드 기타리스트와 작곡가로 활동한 것을 빼고는 가수로서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본격적인 대중 활동보다는 자신만의 음악세계 구축과 내공 연마로 지난한 세월을 보냈기 때문.
그의 대기만성은 과묵하고 나서지 않는 성격 때문이기 하지만 주류 음악과 어울리지 않는 독특한 음악세계가 빚어낸 예정된 결과였다. 단순해 보이지만 그의 노래는 사실 부르기 쉽지 않다. 송창식, 양희은, 서유석, 김세환 등 동시대 최고의 가수들조차 그의 노래에 온전한 소화력을 발휘하질 못했다. 결국 스스로 해결사로 나서야 했다.
음악을 시작한 지 12년 만인 78년. '동방의 빛' 멤버들과 함께 데뷔 음반 녹음에 들어갔다.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그마저도 음악적인 야망보다는 경제적 궁핍이 더 큰 이유였다. 출중한 음악 공력으로 다져진 강호의 숨은 고수가 발표한 79년 첫 음반의 완성도는 이미 신인가수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총 10곡의 수록곡 중 김세환의 활동 금지로 묵혀진 타이틀 곡 '행복한 사람'에 대한 반응은 대단했다. 또한 하나같이 주옥 같은 노래로 아롱진 앨범은 81년까지 연속적인 재반 제작으로 이어지며 30만장 판매의 '대박'은 물론 가수 조동진의 화려한 탄생에 윤활유 역할을 했다.
1집을 기폭제로 오랜 야인시절에서 벗어난 조동진은 신중현 이후
처음으로 '음악사단'의 사령관으로 군림하며 8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의 거목으로 나아가는 첫발을 뗐다.
사실 조동진 음악의 지독한 단순 미학은 '졸립다'는 혹평과 '복잡하고 심오한 명상적 세계와 맞닿아 있다'는 찬사를 동반한다.
단순하고 느리게 진행되는 지루한 분위기에 흥을 느끼지 못하는 대중과 단순해 보이지만 실은 미묘한 감정의 실오라기 느낌까지 정교하게 풀어내는 그 무엇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공감하는 대중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누가 그랬던가.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보편적이고 심오한 것이라고. - 전재명 -
서정적 노랫말의 음유시인
작곡가로 세상에 먼저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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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대부였던 음유 시인 조동진. 과묵한 성격의 그는 저항적 이미지보단 세상을 관조하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세상과 교감하는 포크 가수이다. 그의 노래는 마치 계절의 낭만과 자연의 향내가 그윽한 풍경화 같았다. 60년대 중반, 미8군 록 밴드의 일원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그는 주류 무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어 '가요계의 기인'으로 비쳐졌다. 비록 김민기, 한대수 등에 비해 적절한 평가를 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처럼 일관된 음악적 삶을 지켜온 아티스트는 드물다. ' 언더그라운드 가수'의 시대를 연 그의 히트곡 ' 행복한 사람', ' 나뭇잎 사이로', ' 겨울비, ' 작은배' 등은 언제 들어도 주옥 같은 곡들이다.
김지미, 정승호가 주연한 ' 육체의 길'을 만든 영화 감독 조긍하씨를 부친으로 둔 조동진은 1947년 9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영화 제작에까지 손을 댄 부친의 사업 실패로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못했다. 진공관 앰프를 자작했을 만큼 오디오광이었던 큰 형 조동완은 음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기타리스트 이병우와 함께 남성 듀오 ' 어떤 날'의 리더로 활약했던 조동익은 그의 동생이다. 어린 시절 그는 그림을 좋아해 화가의 꿈을 키웠다. 한국 전쟁 때 대구로 피난을 떠났다가 서울로 돌아와 방산초등학교에 다녔다. 이정선은 초등학교 후배. 이후 윤형주와 함께 대광중학을 다녔다. 대광고에 진학했을 때 아버지의 사업 부진으로 화가의 꿈을 접고 아르바이트로 음악을 시작했다. 대광고는 많은 가수들이 다녔던 학교. ' 따로 또 같이'의 이주원은 고등학교 1년 후배이고 최헌, 장계현도 동문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록 밴드를 결성, 음악회 행사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비틀즈 음악에 매료되었던 당시 쉽고 편안한 성가 같은 팝송을 주 레퍼토리로 삼았다. 하지만 밥 딜런, 피터 폴 & 매리, 레너드 코헨, 비지스 등의 포크 음악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음악에 빠지기 시작한 당시 종로나 명동의 음악감상실에서 음악 친구들을 사귀었다. 당시 그의 집에는 LP음반이 많아 당시의 다양한 팝송을 접했다. 1966년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2년 만에 중퇴를 하고 친구들과 동두천등 미8군 무대에 섰다. 하지만 친구들은 대부분 중간에 그만 두었다. 미 8군 무대 생활을 거친 후 명동 ' 미도파 살롱', ' OB'S 캐빈' 등 생음악 무대에서 록 그룹 쉐그린의 창단 멤버로 베이스기타를 연주했다. 노래 창작을 하기 위해 그룹 활동도 그만 두었다. 하지만 남 앞에 나서길 싫어했던 그는 음악 자체에만 집착할 뿐, 음반 발표나 방송 활동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68년 처음으로 ' 마지막 노래’(나중에 심의에 걸려 '다시 부르는 노래'로 개명)를 작곡했다. 이 노래는 양희은, 현경과 영애, 서유석, 이장희등 많은 가수들에 의해 불리어진 포크의 명곡이다.
연대 앞 비잔티움 다방에서 이장희를 알게 되고 그를 통해 중학교 동창 윤형주도 만났고 투 코리안스의 김도향도 알게 되었다. 다른 가수들은 세시봉, 디쉐네, 내쉬빌 같은 곳에 모여 있었지만 조동진은 지정된 곳에서 노래를 하지는 않았고 연대 앞 부근의 다방이나 카페에서 주로 노래를 했다. 당시 자작 곡을 몇 곡 만들기는 했지만 주 레퍼토리는 '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같은 팝 계열이었다. " 고등학교 때부터 습작으로 곡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비잔티움에서 노래할 때부터 뭔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969년 친구 집에서 경영하던 정릉의 청수장에서 시인 고은을 만났다. 공전의 히트곡인 두 번 째 곡 ' 작은 배'를 이 때 작곡했다. 그 인연으로 고은이 고정 출연했던 CBS의 PD 김진성을 알게 되었다. 이 시기에 조동진은 김민기를 비롯해 다른 음악 친구들과도 교류를 가졌다. 71년 포크 가수로 전향한 조동진은 기타 하나로 록 그룹들의 레퍼토리를 소화해 내면서 ' 1인의 그룹 사운드'로 불렸다.
대중에게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가수로서는 아니었다. 73년에 발매된 양희은의 <고운 노래모음 3집>에 수록된 ‘ 작은 배’의 작곡자로 먼저 세상에 등장했다. 쉽고 단순한 멜로디이지만 깊은 의미를 담은 노랫말의 매력으로 대학가와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애청되었다. "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라 많이 가지는 못했지만 명동 YWCA 청개구리 같은 곳에서 친구들이 제 노래를 많이 부르면서 퍼졌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가수보다는 몇몇 가수들한테 곡을 써 주면서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음반 녹음 때 세션을 맡게 되었다. 그는 나형구사장의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스튜디오 세션 밴드 '동방의 빛'에서 세컨 기타를 맡았다.
핑크 플로이드 등 실험적인 프로그레시브 록에 심취했던 당시 멤버는 강근식, 조원익, 이호준, 유영수, 이영림 등 쟁쟁한 멤버들. 데뷔 음반에 수록된 곡들 거의 대부분은 이 시절에 만들어 졌다. 당시 그가 작곡해 히트한 곡들은 김세환의 ‘ 그림자 따라’, 최헌과 투 코리언스의 ‘ 들리지 않네’, 윤형주의 ‘ 작은 불 밝히고’ 등등. 그는 연주보다는 작곡에 더욱 관심을 두게 되었다. 하지만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던 그는 1973년경에 팀에서 빠져 나와 군 입대를 했다. 이후 74년 세 살 아래 김남희씨와 결혼을 해, 그는 가정을 꾸렸다.
<행복한 사람>으로 화려한 비상
대중음악의 격 높인 음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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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대마초 파동으로 음악 친구들이 다 사라져 버리자, 제대 후 작곡에만 전념하며 칩거했다. 가정을 꾸린 그는 별다른 직업 없이 자기 탐구의 시간으로만 일관했기에 경제적으로 궁핍한 세월을 보냈다. 그래서 대한극장 앞의 강 프로덕션의 강근식을 도와 CM송 작곡에 손을 댔다. " CM송을 많이 만들었는데 슬프다는 이유로 채택된 적은 없습니다." 이때 나중에 들국화의 멤버로 명성을 날리게 되는 전인권, 최성원 등을 알게 되었다.
데뷔 음반 녹음은 경제적인 이유로 시작했다. 록 그룹 ' 동방의 빛' 멤버들과 함께 이촌동 서울 스튜디오와 역촌동 오리엔트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했다. 음악을 시작한지 12년만인 1978년의 일이다. 데뷔 앨범은 본의 아니게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쳤던지라 음악 완성도에서는 오히려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수록 곡 중 70년대 초반 김세환을 위해 만들었다가 그의 활동 금지로 묵혀진 '행복한 사람'이 의외의 반응을 몰고 왔다. 기획자의 의견으로 수록한 그 곡은 30만장 판매의 일등 공신이었고 가수 조동진의 화려한 탄생을 있게 했다. 곧 바로 2집 ' 어느 날 갑자기-한국ㆍ1980'이 발표되었다. 이번엔 ' 나뭇잎 사이로'가 히트했다. 인기 가수로 떠오른 조동진은 81년 10월, 숭의음악당에서 ‘ 동방의 빛'이 연주를 맡고 송창식, 정태춘, 이정선, 이광조 등이 게스트로 출연을 해 감격스런 첫 단독콘서트를 열었다.
좋은 반응 속에 콘서트를 치러냈건만 그는 오히려 소극적인 활동으로 일관했다. 좀처럼 움직이기 싫어하는 그의 기벽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신비적인 음악 활동덕에 ' 교주'처럼 따르는 팬들을 생겨났다. 당시 서울 서초동 은하아파트 그의 집엔 김수철, 강인원, 양희은, 해바라기, 들국화,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등 기성 가수들 뿐 만 아니라 음악 지망생, 대학생 팬들이 수 십 명 씩 몰려 들었다. 그들은 요란한 말보다는 침묵 속에서 설득력 있는 진실한 목소리가 담긴 노래로 대중과 교감 하는 조동진의 음악 태도를 흠모했다. 이 때의 음악 동지들은 훗날 그가 하나뮤직을 근거지로 탄생시킨 ' 조동진 사단'의 모태가 됐다. ' 노래하는 시인'으로 불리기 시작한 그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대부가 되었다.
85년 1월, 5년간의 긴 침묵을 깨고 3집 '슬픔이 너의 가슴에'를 발표했다. 그의 녹슬지 않은 창작력을 확인시켜준 명곡은 ' 제비꽃'이었다. 이후 86년 종로3가 미리내 예술극장 개관무대의 주인공이 된 그는 87년 12월 대중 가수로는 처음으로 호암아트홀에서 단독 공연을 열었다. 하지만 다음 앨범 발표는 또 다시 5년이란 긴 세월을 요구했다. 1990년 4집 ' 음악은 흐르고'를 발표하며 그 해 말, 계몽아트홀에서 단독콘서트 ' 겨울 조동진'무대를 마련했다. 4집 이후 조동진은 자신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91년 말, 그 동안 발표한 앨범의 노랫말 35편을 묶어 시집 ' 우리같이 있을 동안에(청맥刊)'을 발표했다. 좀처럼 TV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는 92년 9월 SBS TV ' 쇼 서울 서울'프로의 ' 포크 가을 여행'이란 특집 프로에 출연을 했다. 사진 촬영의 재미에 푹 빠진 그는 음악 친구 조원익이 경영하는 논현동의 ' 하나음악'에서 음악 감독 역할을 했다. 정혜선 데뷔 음반 ‘오 왠지'와 하나 옴니버스 앨범은 그의 작품이었다. 이 당시 옴니버스 앨범에 참여한 최성원, 김광석, 장필순, 조규찬, 하덕규, 박학기, 이무하, 한동준 등 40여명의 후배 가수들과 경기도 가평에서 단합 대회를 가졌다. ' 조동진 사단'의 본격 가동이었다. 93년 3월엔 MBC TV ' 나의 노래 나의 인생'에서의 조동진 특집에 출연했다. 또 철거 위기에 놓인 야학을 돕기 위해 수원대를 시작으로 2달 동안 후배들과 함께 전국 40개 대학을 도는 순회 공연에 나섰다. 11월엔 ' 친구들에게' 등 신곡 2곡을 수록한 ' 조동진 베스트 노래 모음집'을 발표하고 12월에는 KBS 2 TV '양희은의 事?콘서트'에도 출연했다.
94년 5월, 종로5가 연강 홀 콘서트에 이어 12월에는 대중 가수에게는 좀처럼 무대를 개방하지 않았던 예술의 전당 무대에 최초로 오르는 쾌거를 이뤄냈다. 공연은 계속되었다. 95년 11월 대학로 라이브 소극장에서 일주일간, 96년 5월에는 6년 만에 발표한 5집을 발표회를 겸해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4일간 공연을 했다. 고정 팬 층이 두터워진 그의 공연들은 늘 전회 매진을 기록했다. 98년 3월 세종문화회관 공연은 음악 30년을 결산하는 무대였다. 장필순, 더 클래식, 한동준, 권혁진 등과 함께 했다. 2000년 2월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단독공연 후, 그는 '하나음악'을 운영하는 데에 재정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초동 스튜디오를 처분하고 합정동을 거쳐 일산으로 이사를 했다. 특유의 운둔적 삶으로 돌아갔다.
2004년 1월 강남 LG아트센터. 4년 만에 그는 대중 앞에 나타난 그는 휴식 없이 연주를 하는 공연 컨셉으로 건재함을 과시했다. " 노래는 아름다워야 합니다. 작게는 음악적 기법이나 유행, 크게는 사회성이라는 것도 음악의 아름다움을 희생해서는 안됩니다." 조동진은 클래식만을 선호하던 호암아트홀, 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 LG아트홀 등의 무대를 두루 섭렵한 최초의 가수일 것이다. 시각적 감성을 도입해 격조 있는 대중 음악을 구사하는 그에 대한 합당한 평가였다.
첫댓글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가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