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구절에 대해서는 본문 비평적인 문제가 대두되어 왔다. 즉, 여러 학자들은 이 구절의 진정성을 부인해 왔다. 첫째, 본문의 전후 내용과 조화가 되지 않는다. 둘째, 대속물(뤼트론, λύτρον)이라는 말은 이곳 외에는 신약에서 전연 나타나지 않는다. 셋째, 인자의 ‘온 것’(엘텐, ἦλθεν)이란 그리스도의 생애가 끝난 후를 암시한다.1) 넷째, 마가가 바울의 사상을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집어넣은 것이다.2) 이러한 견해들을 근거 삼아 이 구절을 후대의 신학적 첨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원형은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로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중요한 교리적 발언은 언제나 어떤 기회를 따라 지나가는 말씀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에 비추어, 본문의 위치를 의심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더구나 본절과 마태의 병행구(마 20:8)는 문자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점에 유의할 것이다”(이상근). 이 점과 관련하여 리차드슨(A. Richardson)도 “그 모든 논쟁은 신약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해설자의 신학적 입장을 반영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뤼트론(λύτρον)이라는 단어가 바울 서신에서는 결코 사용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해 볼 때, 이 말을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으로 돌리기 위해 마가가 그처럼 훌륭하게 한마디로 요약했다는 점은 정말로 대단한 일인 것이다.”3)라고 하여, 그 진정성을 부인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일축하였다.
“인자”(ὁ υίὸς τού ἀνθρώπου)라는 용어는 본서에 14회(2:10, 28, 8:31, 38, 9:9, 12, 31, 10:33, 45, 13:26, 14:21, 14:41<2회>, 14:61) 사용되었고, 그 밖에 마태복음에 30회, 누가복음에 25회, 요한복음에 12회 사용되었다.
“인자”라는 말은 장차 심판자로 오실 메시아(구세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다니엘(7:13-28, 에녹서 46) 등이 사용하였다. 예수님이 여기서 이 용어를 사용하신 것은 겸손이 아니라, 신적 권위를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인자의 온 것”, 즉 예수님의 강림의 목적은 사람들의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한 것이었다. 벵겔(J. A. Bengel)은 “과연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철저하게 섬기는 생애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생명까지 바쳐 인류를 섬기시고 구속하신 것이다. 그것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최고의 모본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140)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Cranfield, p. 343 및 Taylor, pp. 444-446 참조”(in 이상근). 2) A. Richardson, An Introduction to the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London: SCM, 1958], p. 220(in W. W. Wessel). 3) 상동.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구원론적 측면과 윤리적 권고의 측면이 결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적인 죽음이 봉사하는 생활의 결과이며, 그것의 연장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론적 진술은 통일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논한 중요한 구절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근거로 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가장 중요한 구절로도 취급된다. 더구나 본절이 복음서의 일부로,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이라는 데 그 의의는 큰 것이다” (이상근).
“많은 사람의”(ἀντὶ πολλών)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후자가 더욱 적합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전형적인 유대적 표현이다.1)
“대속물”은 뤼트론(λύτρον)이며, 신약에서는 이곳에만(병행구 마 20:28) 나오고, 바울 서신에는 합성형(ἀντίλύτρον)이 한 번(딤전 2:6) 나온다. 동사형 뤼트로오마이(λυτρόομαι: ‘대속하다’)는 세 번(눅 24:21,딛 2:14, 벧전 1:18) 나타나고, 대속물을 주고 성취된 사실인 ‘대속’(뤼트로시스, λύτρωσις)이 세 번(눅 1:68, 2:38, 히 9:12) 나타난다.
이 “대속물”(뤼트론, λύτρον)의 배경은 구약성경의 제사법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유대 남자들이 바쳤던 반 세겔의 생명의 속전(출 30:12), 둘째는 소가 사람을 받아 죽였을 때에 지불한 은 30세겔의 속전(출 21:30), 셋째는 첫아들을 대신해서 바친 대속전(민 18:15), 넷째는 팔린 친족을 속량하기 위해 지불한 속전(레 25:47-53), 다섯째는 팔린 토지를 무르기 위해 친족이 대신 지불한 대가(레 25:25-27) 등이 있다.
또한, 고전 그리스어에서도 포로나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속전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신을 대속물로 주신다는 것은, 죄와 죽음의 노예 상태에 있고, 장차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인류를 위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참조: E. Schweizer, W. Hendriksen, J. Gnilka, 하권, p. 141, 山口 昇, 이상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리고 인류를 대신해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바침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의 속량이 언제 이뤄지는지, 종말론적 심판의 때에 이뤄지는지 또는 이미 현재에 이뤄지는지는 불확실하다. 양쪽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J. Gnilka, 하권, p. 141).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1) 마귀에게 죄의 값을 지불하셨다(대상설: Origen 등).1) 오리겐(Origen)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서의 예수는 누구에게 그 생명을 바쳤을까? 하나님께 바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악마에게 바쳤을 것이다. 왜냐하면, 악마는 속죄물이 주어지기까지 우리들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의 생명까지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속아서 예수의 생명을 보유하는 일의 어려움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2)라고 하였다.
이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 이상근 님은 “하나님은 인류의 범죄와 구원에 관해 마귀를 징벌하실 일이지, 그에게 값을 치르셔야 할 의무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닛사(Nyssa)의 그레고리(Gregory, 331-396: 신학자, 정통적 삼위일체론자)는 이 견해의 결함, 즉 마귀를 하나님과 동등한 입장에 세워 놓고 거래를 한 것으로 만든 점을 지적하였다.3)
(2) 닛사(Nyssa)의 그레고리(Gregory, 331-396: 신학자, 정통적 삼위일체론자)는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계략을 쓰셨다는 생각을 하였다. 즉, 마귀는 성육하신 예수님의 외면상의 무력과 허약 때문에 계략에 걸렸다는 것이다. 마귀는 예수님을 단순한 인간으로 이해하여 자신의 권위를 예수님 위에 행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같이 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잃고 말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귀가 권위를 잃도록 계략을 쓰셨기 때문이었다.4)
그러나 바클레이(W. Barclay)는 “하나님께서 마귀를 정복하는 데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in 이상근. 2) in W. Barclay. 3) 상동. 4) 상동.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술책과 계략을 사용했다는 생각 역시 묘한 것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아닌게아니라, 사랑과 의와 진리와 선 등의 속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계략을 사용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3) 200년이 지난 후에 대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540-604: 라틴 교회의 최후의 학자)가 (2)설을 받아들였다. 성육은 큰 바다 짐승을 잡아 올리려는 신성한 책략이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낚시였고, 예수님의 몸은 미끼였다. 그 미끼가 큰 바다 짐승, 즉 마귀 옆에 매달려 있을 때에 그는 그것을 삼켜 버렸다. 그리고 낚시도 함께 삼켜 버렸다. 그리하여 영원히 정복되어 버렸다.1)
그러나 이 이론도 (2)설에 대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4) 롬바드의 베드로(Peter, the Lombard: 중세의 신학자)는 “십자가를 마귀를 잡는 쥐덫이며, 그리스도의 피가 먹이가 되었다.”라고 하였다.2) 이 견해 역시 (2)설에 대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이 견해는 가장 불쾌하고 괴상한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5)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공의에 만족을 주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만족설: Anselm 등).3) 즉, 그리스도께서 죄의 값을 지불하신 대상은, 범죄한 인간은 죽으리라(창 2:17)고 하신 하나님을 만족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도를 위해 독생자의 죽음을 만족하게 받으실 목적으로 그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밖에는 안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6) 단지 인간에게 도덕적 감화를 준 것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감화설: Wendt 등).4) 이 견해는 대속과는 방향이 다르다.
위의 견해들 중에서는 그나마 (5)설이 좀 나은 것 같다. 실상, 예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상동. 2) 상동. 3) in 이상근. 4) R. Bultmann, op. cit., p. 266.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님의 말씀은, “사람들을 죄 가운데서 이끌어 내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인도해 들이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생명의 값이 필요하다는 소박한 묘사인 것이다”(W. Barclay). 예수께서는 후대의 학자들이 논의한 바와 같은 속죄론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은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대속물)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만 확실히 알면 되는 것이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