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는 수 많은 종류의 술이 존재하며, 고유의 토속적 방법과 전통적 방법으로 제조한 각 나라를 대표하는 술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 와인·꼬냑, 영국의 스카치위스키 ·아이리쉬위스키, 미국의 버번, 포루투칼의 포토와인, 멕시코의 테킬라 등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 토속주에는 무엇일까? 한국을 대표하는 3대 전통술로는 탁주, 약주, 소주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오랜 기간동안 마셔온 술은 탁주로 오늘날에도 널리 애음되고 있으며, 고래부터 토속주로서 도시의 서민층과 농민에게 이르기까지 폭 넓은 기호층을 가지고 있는 술이다. 탁주는 옛부터 자가제조로 애용되었기 때문에 각 가정마다 독특한 방법으로 만들어져 그 맛도 다양한 것이 특징이고, 대중주로서의 위치도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다. 탁주는 지방방언으로 대포, 모주, 왕대포, 젓내기술(논산), 탁배기(제주), 탁주배기(부산), 탁쭈(경북)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탁주와 약주는 곡류와 국과 물을 원료로 한다. 여기에서 발효시킨 술덧을 여과·제성했는가의 여부에 따라 탁주와 약주로 구분된다. 탁주에서 술지게미를 제거하고 맑게 걸른 것인 약주이다. 약주는 탁주의 숙성이 거의 끝날 때쯤, 술독 위에 맑게 뜨는 액체 속에 싸리나 대오리로 둥글고 깊게 통 같이 만든 ‘용수’를 박아 맑은 액체만 떠낸 것이다. 약주에 속하는 술로는 백하주, 향은주, 하향주, 소국주, 부의주, 청명주, 감향주, 절주, 방문주, 석탄주, 법주 등이 있다. 이 밖에 보다 섬세한 방법으로 여러 번 덧술한 약주에 호산춘, 약산춘 등이 있는데, ‘춘(春)’자를 붙인 것은 중국 당나라 때의 예를 본뜬 것이다. 그리고 비록 ‘춘’자는 붙지 않았어도 같은 종류의 술로 삼해주, 백일주, 사마주 등이 있다.
<약 주 말 살 정 책>
약주는 우리 민족이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마셔온 대표적인 술이다. 세계 각 나라들은 그들의 대표 술에 역사와 전통을 담아 알리는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고유의 전통술을 우리가 먹지 못하던 우서운 시절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술을 빚는 것이 자유로와 일반 가정에서도 으레 빚어 마시는 음식이었다. 그러던 것이 우리의 국토가 일본에 강점 당하고, 국권을 상실하자 일제는 식민지 수탈정책의 일환으로 주세법을 공포되었다.
주류제조 면허제를 실시하고 가정에서 술을 담그는데도 자가제조 면허가 있어야 가능하였다. 그리고, 주류에 세금을 부과하였는데 거두어 들인 전체 세금 중 주세가 30%를 차지 하였다 하니 수탈이 얼마나 심하였겠는가? 이때부터 집에서 면허 없이 빚는 술을 모두 밀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일반 가정에서는 주세를 내기 힘들었고, 술을 빚는 것은 당연히 힘들어졌는데 1920년대 자가면허자가 13만여가구가 넘였던 것이 1934년에는 단 1가구가 되어 버린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나마 일제때에는 영업용 양조업자나 가양주는 밀주로 나마 조선약주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누룩을 빚는 틀과 누룩
제3공화국에 들어서서는 정부의 잘못된 시책으로 약주는 괴멸되는 사퇴가 벌여진다. 식량부족을 해결하는 한 방안으로 우리 술의 주원료인 쌀을 이용하여 술을 빚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나라 전통술은 혼란에 빠졌고, 1989년 이 조치가 해제되기까지 24년동안 전통술의 기반은 송두리깨 무너지고 말았다.
주조원료인 쌀 대안으로 국세청양조시험소(현 국세청기술연구소)에서 밀가루를 이용한 제조법을 연구개발하여 보급하였는데 그나마 탁주는 적응하여 살아남았지만 약주와 증류식소주는 살아 남을 수 없었다. 우리 술이 말살당하고 있을 때 희석식소주와 맥주와 외국주류는 개엄군처럼 무혈입성하여 지금은 우리 국민의 알콜소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전통술을 무너뜨린 것이다.이렇게 혹독한 시련을 격고 명맥이 끓어졌던 약주는 88올림픽을 계기로 외국에 알릴 우리 전통 술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술에 쌀을 사용할 수 있도록 1990년에 법조항이 개조되었다. 그리고 십 수여년 후... 지금. 괴멸되었던 약주가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청주와 약주>
<청주 이야기>
한국의 청주는 누룩을 사용하여 제조한 유서 깊은 우리술이다. 옛시에 "청탁(淸濁)을 불문하고 즐겨 마신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청주와 탁주를 일컫는 말이다. 청주는 쌀로 만든 양조주로 술독에 용수를 박아 놓으면 맑은 술이 괴는데 이것을 청주라하고, 술덧을 대강 체로 걸러 만든 것이 막걸리다.
이런 고유의 우리 청주가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서 많이 소비되었던 정종이란 상표의 청주가 아예 청주 이름을 대신하여 써여졌던 시절도 있었고, 지금도 청주를 정종이라 잘 못 사용하는 사람이 많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두)두산백화, (주)경주법주 의 2군데 제조장에서 청주를 제조하고 있고, 생산되는 제품으로는 설화, 국향, 경주법주, 화랑 등이 있다.
청주는 현재 쌀로 만들기 때문에 쌀눈에 존재하는 성분에 의해 숙취를 많이 일으킨다. 그래서 청주를 따뜻하게 데워서 숙취성분을 날려 버리고 마셨으나, 오늘날에는 도정기술이 발달하여 쌀눈을 완전히 제거하여 제조하는 데워서 마시지 않아도 되는 냉청주가 개발되고 있다. 대표적인 냉청주는 두산주류의 설화로 이것은 원료인 쌀을 50%까지 도정하여 만든 것으로 그 품질이 매우 뛰어나고, 맑고 깨끗해서 마시면 시원하고 깔끔하며 감촉이 부드러워 기품있는 술이다.
<약주 이야기>
탁주와 약주를 거르는 체와 용수
약주가 좀 과하셨군요? 약주 한잔 하였습니까? 약주는 술이란 말보다 예의를 갖춘 높인 말이다. 약주는 청주를 말하며, 조선시대 한양을 중심으로 가장 보편적이고 공식적으로 쓰인 명칭이다. 그렇다면 약주의 어원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조선중엽 한양 서소문 밖 약현(대략 지금의 서울역 뒤쪽 한국경제신문사 터 근처로 추측됨)이란 마을에 눈먼 어머니와 아들 서성이 살았다.
그들은 원래 유복한 집안이었으나 가세가 기울어 어머니는 가정을 꾸려나가기 위해 청주를 빚고 유밀과를 만들어 장에다 내다 팔았다. 그녀의 아들 서성도 어머니의 정성에 보답하 듯 선조 19년에 29세의 나이로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서성의 동네가 약초를 많이 재배하던 약현이었고, 서성의 호가 약봉이었는데, 그가 유명해지고 또 어머니의 음식솜씨도 유명해져서 어머니가 빚었던 청주는 약주로, 찰밥은 약밥으로, 유밀과는 약과로 불리게 되었다. 약봉 서성은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정묘호란 때에 왕을 모시고 피난길에 올랐을 만큼 오랫동안 왕을 모셨다. 벼슬은 병조판서까지 올랐고, 고조부인 서거정에 버금가는 영예를 누렸고, 그의 아들이 선조의 부마가 되어 왕실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이런 후광을 업고 약주는 청주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서성의 7대손인 실학자 서유구가 "임원경제지"에서, 서유구의 형수 빙허각 이씨가 "규합총서"에서 술에 관련된 소중한 자료를 기록해둔 것도 모두 이 집안의 술 내력이 깊어서였을 것이다.
약주와 청주비교
우리나라 주법법상에는 약주와 청주의 정의를 달리하여 발효제사용비율, 알콜도수 등에 차이를 두어 그 주종을 구분하고 세율을 달리하였다. 약주의 세율은 30%, 청주의 세율은 72%였으나 2002년 1월 주세법의 개정으로 지금은 세율을 30%로 동일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