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온 이야기>
나는 고향인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3살 때 대전으로 이사했다.
아버님은 대전에서 제재소를 하셨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잘 살았다.
집에 트럭도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도가 났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게 되었다.
중학교 때에는 나는 토끼풀을 뜯어
토끼와 닭을 키웠다.
학교 성적은 중간이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공부를 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울법대에 들어갔다.
대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술집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욕을 했다는 이유로 법대 동기생 3명과 함께
국가원수비기모욕죄로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구류 20일을 살았다.
그후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다행이 3차를 통과했다.
1977년도 일이다.
군법무관으로 입대한 후,
박대통령이 서거했다.
군사독재정권이 끝나서 다행이
나는 검사로 임명되었다.
검사생활을 하면서 나는
국제형사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범죄인인도법을 만들었다.
국제형사사법공조조약을 체결하러 다녔다.
형법개정작업 실무를 맡았다.
미국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주립대학 로스쿨에서 1년간 유학하고 돌아와서
법무부에서 검찰2과 검사로 3년 가까이 근무했다.
대검찰청 환경과장을 2년간 했다.
이때 미국 환경범죄단속시스템을 파악하러 2주간 혼자 미국에 출장을 가서 미국 공무원 및 환경단속직원, 환경단체임원 등 100여명을 만났다.
한국의 환경범죄전담검사제를 만들었다. 그 공로로 조선일보에서 환경대상 특별상을 받았다.
경희대학원에 들어가 7년 동안 공부하면서 석사와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제천지청장, 대전지검 특별수사부장, 서울서부지청 특별수사부장을 거쳐 서울중앙지검 공판부장을 역임했다.
이때 나는 서울서부지청, 서울중앙지검에서 검찰기독신우회장을 했다. 1998년 검사를 사직하고 변호사로 개업했다. 처음에는 단독으로 하다가 2000년 법무법인 태일을 설립하고 대표변호사가 되었다. 주로 형사사건을 맡고 있었다.
개업하면서 곧 바로, 사법연수원 형사변호사실무와 국제형법 담당 강의를 맡았다. 그리고 검찰-경찰 수사권조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검찰동우회 편집위원을 오래 맡기도 했다.
사단법인 맑은환경국민운동본부를 설립하고 총재를 맡았다. KBS 2 TV 생활법정 재판장을 담당하기도 했다. KBS TV와 JTBC TV 고문변호사를 오래 했다. 한명숙 장관님을 모시고, 남녀차별개선위원회 위원으로 몇 년간 활동했다. 이 때문에 2005년 6월 23일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강동에 있는 고덕중학교 학교폭력자치위원회 위원을 몇 년간 담당했다. 그후 대한공증인협회 수석부회장을 수년간 담당했다. 2011년부터는 법학전문대학원 평가위원회 특별위원장 및 사무총장을 맡았고, 2018년부터는 평가위원장을 맡았다.
2006년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정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형법과 헌법을 강의했다.
학교폭력방지센터를 설립했고, 외국인인권보호활동을 하고 있다. 2000년 사법정의실천연합을 설립하고 상임대표가 되었다.
법무부 마을변호사로 활동하고,
서울시 성내동 자문변호사로 활동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소청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돌이켜 보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다. 검사로서 폼을 잡지 않고, 뇌물 먹지 않고, 룸살롱 가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 변호사로서 돈만 챙기지 않았다. 악덕 변호사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치스러운 골프 대신 배드민턴, 테니스를 쳤다. 백화점 보다는 동대문시장, 재래시장을 이용했다. 그래도 나는 돈을 많이 번 변호사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막걸리를 먹어도 마음 편한 게 좋다. 내가 잘 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