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소 확인
고대 벧엘은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17km 떨어져있으며 해발고도 880m에 위치한 아랍마을 Beytin으로 본다. 이 장소의 확인은 1838년에 처음으로 성경의 지리적 언급(창12:8; 삿21:19)과 Eusebius의 Onomasticon 40:20, 21과 옛날 아랍식 지명과의 유사성을 기초해서 E. Robinson에 의해 입증되 었다. 1927년 W. Albright가 H. M. Weiner 와 합동으로 이 장소를 조사 했다. 비록 이 장소는 천연 적인 방어의 지형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많은 샘이 이곳에 있었으며, 중요한 도로(여리고 에서 해안평야를 잇는 도로와 중앙산지 도로)의 교차점에 위치해 있었기에 발전할 수 있었다.
(2) 역사
벧엘은 이전에는 루스(Luz)로 불리웠었다(창5:19; 35:6,15; 48:3; 수18:13). 그러나 수 16:2에는 벧 엘(Bethel)과 루스(Luz)가 다른 장소로 묘사되고 있다( ). 이곳은 요셉족속에 의해 정복당했으며(삿1:22-25) 그후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다시 정복되어 에브라임지파의 영역에 속한다. 벧엘은 족장의 전통과 연관되어서 종교적인 중심지이며 성스러운 장소이다(창 12:6-8; 28:10-22). 여로보암 1세가 예루살렘에 맞서는 수단으로 벧엘에 왕실 성소를 세웠다. 그러나 지금 까지는 그때의 성소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이 곳은 앗시리아 사람에 의해 사마리아 성 함락과 같은 시기인 주전 721년경에 파괴되었으나 그후에 성소는 다시 부활되어 유다왕 요시야 왕이 그 곳을 정복하고 그곳을 정화하기까지(왕하 23:15) 그후에도 계속해서 그곳에서 제사가 드려졌다(왕 하 17:28). 벧엘은 느부갓네살왕의 예루살렘 정복때는 파괴되지 않았으나 아마도 이곳은 바벨론 통치에서 파사 통치로 넘어갈쯤에 완전히 파괴된 것 같다. 그후 이 도시는 다시 건설되었으며 에스라시대에는 작은 도시였다. 헬라시대와 초기 로마 통치 시대에 이 도시는 번창하였으나, Vespasian이 황제가 되기위해 유대땅에서 로마로 돌아 가기전에 이 도시를 공략하였다. 그후 로마 말기에도 번성했으며 비잔틴 시대에는 이 도시가 최대치가 되 는 크기의 도시가 되기도 했으나 아랍이 이스라엘을 통치한 후에는 이 도시가 역사 속에서 사라 져 버렸다.
(3) 발굴
이곳 벧엘은 1934, 1954, 1957년과 1960년 여름에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와 Pithsburgh Theological Seminary 의해 발굴되었다. 첫 번째 발굴은 J. L. Kelso 도움속에 올브라 이트 교수가 주도 했으나 두 번째 발굴부터는 켈소가 지휘했다.
1)청동기 시대(약 주전 3300-1200년)
1960년 발굴에서 성소가 발견되었는데, 이 성소는 석회석 산등성이의 지표면, 북쪽 모서리 산꼭 대기에 있다. 산등성이에 몇군데의 검은 얼룩이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희생제사로부터 나온 피의 흔적임에 틀림없다. 또한 모닥불 흔적도 발견되었다. 아크로폴리스 주변에 부싯돌 칼들과 동물의 뼈뿐만 아니라 많은 요리용 도기(pottery)의 조각도 발견되었다. 밝혀진 가장 오래된 물건은 바위 의 갈라진 틈 사이에서 발견된 금속병용기 시대(주전 4300-3300년)의 항아리이다. 발견된 대부분 도기 조각은 중기 청동기(1) 시대(주전 2300-2000년)의 것이고 약간은 초기 청동기 시대(주전 3300-2300년)의 것이다. 이 아크로폴리스 일직선 위에 웅대한 신전이 세워졌는데 이것의 방향은 동쪽이며 포장용 판석을 가졌는데 이것은 중기 청동기(1) 시대(주전 2300-2000년) 경으로 추정되 며 지진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성소와 샘들 주변지역은 원래는 양을 치기 위한 캠핑 장소였으나 기원전 3200년경에 마을이 되었다. 이 장소는 초기 청동기 시대(주전 3300-2300년)의 오랜 기간 동안 버려졌으나 주전 2400-2200년경에 다시 정복 당했으며 그후 버려졌었다. 중기 청동기 시대(주전 2300-1550년)에는 거대한 성벽(두께 3.5미터 정도)을 갖춘 도시가 세워졌다. 신전에서는 많은 양의 동물뼈와 제사용 도기 제품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후기 청동기 시대(15세기-14세기)에 Cyprus와 무역 관계가 있었 음을 드러내는 도기가 발견된다. 이 벨엘은 기원전 13세기 후반기에 수 피트(feet) 깊이의 재와 파괴물의 부스러기가 쌓인 지층이 있는 큰 폐허가 있었다(삿1:22 ; 수12:16).
2)철기 시대
이스라엘 시대의 도시들은 가나안 시대(후기 청동기 시대)의 그것들과는 인상적인 대조를 이룬 다. 이스라엘 시대의 집들은 넘어질듯한 오막집이었으며 도기(도자기)는 졸렬하게 만들어졌는데 대부분 요리 단지와 저장항아리였다. 여호수아 정복하에서 벧엘은 베냐민지파에 할당되었다(수 18:22). 그런데 이 철기 시대(이스라엘 정착시기)의 발굴은 그후 매우 짧은 동안 벧엘이 두번 정 복 당했음을 보여 준다. 첫 번째는 아마도 베냐민지파를 몰아내고 그곳을 인계받은 가나안 사람 들에 의해, 두 번째는 그곳의 가나안 주민 헷족속을 내쫓은 요셉 족속에 의한 것이다(삿 1:22-28). 벧엘에 대한 블레셋의 정복 기록은 없다. 이 도시는 사사 말기시대에 성장했으나 다윗이 예루살 렘을 국가의 수도로 정한뒤 벨엘의 발전은 둔화되었다. 여로보암 1세때 벧엘은 다시 종교적인 중심도시가 된다. 그 후 계속해서 번성한다. 일례로 남부 아라비아 점토 인장(seal)이 중기 청동기 시대의 도시 성벽의 바깥쪽 파편 더미에서 발견되었는 데, Hadhramaut로부터 온 것으로 추정된 이 점토인장은 약 주전 9세기의 것이다. 즉 이 인장은 벨엘과 남부 아라비아 사이에 무역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앗시리아 말기에 벨엘은 성스러운 지역으로 다시 세워지면서 빠르게 번영했는데 이 번영은 Nabonidus의 시대(바벨론 말기) 또는 바 사제국 초기까지 계속된 것 같다. 이 도시는 예루살렘과 함께 파괴되지 않았으므로 주전 587년 이후 시대의 도기(ceramic) 연구를 위한 진기한 자료이다.
3)그후 시대들
에즈라 시대때의 벧엘은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헬라시대에(비록 후기 청동기 시대만큼 눈에 띄일 만큼은 아닐지라도) 다시 두드러졌다. 헬라시대는 두 단계가 있다(전기가 더 뛰어남). Bacchides(하스모니안 혁명(revolt)시대의 셀류시드(Seleucide) 장군이었다: 마카베오 상 9:50)는 벧엘을 재요새화했다. 벧엘의 동쪽 언덕에 있는 Rujm Abu 'Ammar의 무덤은 그의 작품이 확실 하다. 왜냐하면 도자기표면이 기원전 2세기의 헬라식이기 때문이다. 초기 로마 시대의 짧은 기간 동안 북동쪽 성문은 무너졌다. 근접한 도시 성벽 부분은 평평하게 되었고 집이 그위에 세워졌다. 이 시대의 새로운 문의 기초는 도시의 옛 남쪽 문 가까운 곳에서 또한 발견 되었다. 그러나, 그 도시의 집들 안에는 로마 시대에 탄 흔적이 없다. Vespasian 과 Hadrian 둘 다 여기에 수비대를 세웠다. 이 로마 시대는 인구에 있어서 정말 크게 늘었다. 천연적인 물 공급을 늘이기 위해 사용되어졌 던 물 저장소들이 있었다. 도시는 여전히 컸으며 커다란 물 저수지는 이 마을 아래에 완성되었다. 비잔틴 시대의 벧엘은 “수도에서 12마일에 위치했으며 예루살렘(Aelia Capitolina)의 영역안에 있 는 마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Eusebius, Onom. 192). 새로운 복동쪽 성문과 새로운 동쪽 성벽 은 사마리아 사람의 습격에 대비하여 484년 또는 529년에 세워졌다. 큰 비쟌틴 교회, 즉 지금은 회교사원으로 사용되는 건물의 동쪽에 세워졌다. 비록 비쟌틴 시대의 많지 않은 건물이 남아 있 음에도 불구하고 들판 가까운 곳에서 발견된 도자기(pottery)는 비잔틴 시대 내내 사람들이 살았 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곳은 아마도 팔레스탄인의 아랍 침공후 즉시 사라진 것같다.
(4) 벧엘과 성경(보충자료)
벧엘은 구약성서에 서로 다른 두 장소에 대한 명칭이다. 하나는 예루살렘 북쪽19km 지점에 위 치한 곳이고 다른 하나는 시므온 지파의 영역(삼상 30:27)에 있었던 곳이다. 후자의 벧엘 경우에 는 수 19:4의 '브둘'과 대상 4:30의 '브두엘'의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 중에하나일 것으로 추정하 고 있다. 전자의 벧엘은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한 벧엘로서 처음 성경에 언급된 것은 아브라함이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창 12:8, 창13:3)"는 행적과 관련해서 이다. 아 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벧엘에서 본 환상 때문에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곳이기도 하다. "꿈 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 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창 28:8)"라는 환상을 보고 그 곳 이름을 벧엘(창28:19)이라고 명명하였 다. 원래 그곳의 이름은 루스였다. 그리고 그가 있었던 자리에 돌 기둥을 하나 세웠다(창 28:22, 창 31:13). 그리고 나중에 야곱은 그곳에다 제단을 건설하였다(창 35:1-16). 사사시대, 이스라엘과 베냐민 사이에 전쟁이 있던 때에(삿 20),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 차례에 걸친 패배 이후에(삿 20:21, 25)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던 벧엘로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서 그 다음날 전쟁에 나갈것인지 아닌지를 여호와께 물었던(삿 20:26-28) 곳이다. 벧엘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금식하며 화목제와 번제를 드렸다. 그리고 세 번째 전쟁에서 베냐민 지파는 패전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백성이 벧엘에 모여서 베냐민을 위하여 애곡하였다(삿 21:1-4). 솔로몬 왕이 죽고 난 이후에, 왕국이 분열되고 나자,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은 금송아 지로 만든 제단을 벧엘과 단에다 만들었다(왕상 12:29, 32-33). 결국 벧엘은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왕상 13:1-32, 왕하 10:29). 그리고 예루살렘의 성전에 버금가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종교 적 중심지가 되었다. 선지자 예레미야와 아모스는 벧엘의 우상숭배에 대하여 책망하였다(렘 48:13, 암 5:5-6). 호세아 는 이곳에 만들어졌던 금 송아지 때문에 이곳을 벧 아웬이라고 불렀다(호 10:5,15). '하나님의 집', 벧엘은 '우상숭배의 집' 벧 아웬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벧엘에 세워두었던 산당을 허물어 버렸다(왕하 23:15). 바벨론으로 끌려갔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귀환하여 벧엘에 다시 정착하였으며(에 2:28, 느 7:32), 다시 베냐민 지파의 영역이 되어졌다(느 11:31). 벧엘은 540 B.C. 무렵에 대화재에 의하여 파괴되어졌다. 이 파괴는 아마도 바빌론 왕 나보나이 드에 의한 것이었거나 아니면 페르시야 왕 다리우스 바로 직전의 일로 생각된다. 오늘날 벧엘은 베이틴이라는 작은 아랍 마을이 위치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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