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오라이 버스 1
안양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말엽부터이다. 이를 객관적으로 말할 만한 근거가 있다. 바로 버스 종점의 위치가 해마다 달라진다. 서울이 급팽창하면서 덩달아 신흥개발지였던 시흥 안양 화곡동까지 물밀듯 사람들이 밀어닥쳤다. 영동 잠실 천호동 상계 면목 미아 불광은 이미 고질적인 교통난이 발생했다고 했다. 안양은 당시는 미군부대가 있었던 석수동과 시흥 쪽에 박미를 경계로 해서 서울과 경기도로 나뉘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안양 시내는 이미 70년대 초 더 이상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바람에 경사가 진 언덕배기인 안양국민학교하고 전화국 근처인 곳(현재 남부시장 바로 못 미친 곳)에 버스종점이 생겨났다. 그곳이 당초는 마부들의 터전이었는데 엉겁결 그들은 비산동으로 빠지는 다리를 닦기 위해 만든 비포장 도로 옆으로 임시 이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며 26번 삼양교통이란 버스에 이어서 104번 유진운수가 전화국 언덕배기를 넘어 남하를 해 당시의 등기소 위쪽에 자리를 잡았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버스종점이었다. 연이어 103번 안양교통이 등장을 해 영등포와 마포 서대문을 상대하였고 104번은 용산과 중앙청을 경유해 삼청동까지 가는 황금노선을 놓치지 않았으며 뒤늦게 98번,99번 태광교통이 나타나 고속버스 터미널을 상대하기에 이르렀는데 그쯤은 이미 신작로는 2차선 포장이 완성되어 저 멀리 군포까지 길이 연결되었던 시점으로 종점은 그 뒤 어디로(지금의 금정 역 부근)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마치 수은 계 온도 올라가듯이 안양시내에서 차츰 차츰 언덕을 오르고 올라 저 멀리 군포 쪽으로 종점이 밀려난 것이다. 70년도 새로 지은 우리 집은 명학에 가까운 위치였는데 하필이면 버스종점이 이웃이라 밤낮 시끄러운 차 시동소리와 기름 냄새로 늘 시끄럽고 북새통을 이루었다. 차장이라는 칭호의 버스 안내양들은 시멘트 블럭으로 겨우 만든 간이숙소에서 자거나 동네에 방 한 칸을 얻어 너 댓 명이 무리를 지어 자곤 했는데 실로 처참할 정도로 사는 환경은 빈약했다.
당시 자료를 살펴보면 50년대는 전차운전사·전화교환원·공장노동자가 인기였으며 60년대는 신발·섬유 기능공이 주를 이루고 은행원은 최고 신랑감이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진 선망의 직업들이다.1945년 광복 직후 자원과 물자가 부족하다 보니 고물상이나 광산개발업자도 수입이 괜찮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교사는 매달 현금으로 월급을 받는데다 스승을 존경하는 유교적 전통 등으로 각광 받는 직업이었다.
1950년대는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의 토대를 마련한 시기다. 전차ㆍ전화ㆍ라디오 등 새로운 서구 문화가 물밀 듯 들어왔다. 자연히 전차 운전사ㆍ전화 교환원ㆍ라디오 조립원ㆍ공장 노동자(고무ㆍ가발ㆍ섬유)가 떠오르는 직종이었다. 나라의 기틀이 잡히면서 군인ㆍ경찰도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된 1960년대는 직업도 다양하게 분화했다. 엔지니어나 섬유ㆍ합판ㆍ신발 분야의 기능공이 인기 직종이었다.
섬유ㆍ가발 공장의 여공은 서민 여성의 대표적인 직업이었다. 대기업엔 일자리가 귀했던 시절이라 사무직을 선호하는 엘리트는 은행으로 몰렸다. 은행원은 손꼽히는 최고 신랑감이었다. 여성 공무원이 드물던 시절 우체국ㆍ경찰서의 전화 교환수는 신부 감 0순위였다. 1970년대는 중화학공업이 중심 산업으로 부상했다. 그 덕분에 대기업에 다니는 회사원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종합상사 맨은 해외 주재원으로 나갈 수 있고 월급도 많아 인기가 많았으며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시절 스튜어디스는 젊은 여성이 꿈꾸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취직이 하늘에 별 따기 다음으로 어려운 시절, 그 무렵부터 셀러리라는 말이 등장한다. 어찌 얻은 직장인가. 하지만 직장은 서울도심이고 사는 곳은 변두리. 요즘도 그런 기현상은 비슷하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을 나선 시간은 오전 6시.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걸음이 바쁘다. 정류장을 가득 메운 인파. 버스가 올 때마다 100m 달리기 경주가 시작된다. 차 안은 발 디딜 틈조차 없다. 낯선 사람들과의 어색한 부대낌도 이력이 났다.
짐짝처럼 실려 가길 50여 분. 파김치가 돼 사무실에 들어서면 책상 위에 서류가 가득하다.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오전이 후딱 가고 나면 점심시간. 각자 싸 들고 온 도시락을 꺼낸다. 1971년 봉급생활자의 월급은 평균 2만 2천원. 소비자물가지수를 감안해 현재 돈 가치로 환산하면 33만 1,500원 남짓. 학생 뿐 아니라 대다수 샐러리맨도 점심 도시락을 싸 들고 다녔다.
통계에 따르면 1970년대 버스를 이용해 서울 도심으로 통근한 사람은 194만 명, 이에 비해 5,000여대 버스로 실어 나를 수 있는 사람은 135만 명이 고작이었다. 40만 명은 '콩나물' 버스를 감수해야 했고 20만 명은 지각을 밥 먹듯 했다. 겨우 매달린 팔, 운전기사가 급커브를 돌면 차는 기우뚱하며 사람들은 안쪽으로 쏠려 들어간다. 그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된다. 꼽쳐 신은 신발로 발판에 버티고는 배로 승객들을 밀면서 황급히 차문을 닫는다.
그러면 사방에서 비명소리와 함께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 X아, 우리가 뭐 콩나물인 줄 아니!" 그럴수록 버스는 속력을 냈다. 차장(車掌)은 차의 손바닥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차의 부품이었다. 그 시대 버스는 지금의 9호선 지하철을 말하는 ‘지옥철’과는 비교도 안 되었으며 여차장은 억세게 살아야 한다는 그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녀들은 언제부터 그 일에 종사했던 것일까. 그들이 벌써 환갑도 넘은 나이가 되었으니. 참 고달픈 세상을 잘도 헤쳐나간 우리 누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