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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조선의 22대 왕, 즉위까지의 험난한 길
원래의 휘호는 정종이었지만 후에 정조로 바뀌었습니다.
영조에 의해 뒤주에서 사사된 사도세자의 아들로 1752년 10월 28일 탄생 했습니다. 산실청 밖에서 깜빡 잠이들었던 사도세자는 용이 침실로 날아오는 꿈을 꾸고 붓을 들어 꿈에서 보았던 용을 그렸다고 합니다.
잉태에서 탄생까지 모든이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이 아들은 사도세자를 빼어 닳았으며 사도세자는 아들의 탄생에 한없이 감동하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험난한 길
정조가 건설을 명한 수원 화성의 동북각루와 그 주변 성벽
정조가 때어나기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더 있었는데 영조는 첫돌이 되기전의 이 아이를 거처로 데려와 원손으로 책봉하고 귀여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세손은 3살의 어린나이에 병으로 죽게 됩니다.
상심한 영조는 세손에게 "의소"라는 시호를 내리고는 당시 정조를 임신중이던 혜경궁 홍씨를 위로하기 위하여 그녀의 친정 부모를 입궁시켜 며느리를 돌보게 했습니다.
이처럼 손수 기르다시피 했던 첫 손자를 잃은 경험이 있는 영조는 이번에는 태어난 원손을 혜경궁 홍씨에게 일임 하였습니다.
아들인 사도세자 역시 100일이 지나자 생모와 떨어뜨려 정성왕후의 아들로 입적시켰을 만큼 자손들의 교육에 극성이었던 영조의 성격으로써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결국 정조는 어머니의 품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할수 있었고 아버지, 어머니 모두를 사랑했던 정조는 훗날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외가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도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평생 어머니에게 극진한 효도를 다합니다.
영특 하다던 말을 듣던 세손이 자라 가면서 일어난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과 비극에 대해서는 지면상 이전에 포스팅한 글로 대체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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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처럼 결국 뒤주에서 목숨을 잃은 아버지 사도 세자의 사후, 당시 9세에 불과했던 세손은 세상이 자신에 대한 적의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외가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 할아버지인 영조도 그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이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로 정조는 아버지가 느낀 울화증과 강박의 정체를 일찍이 공감하고 빠르게 철이 들어야 했습니다.
앞서의 글에서도 언급 하였던 정조가 사랑하였던 영조, 혜경궁 홍씨, 외할아버지 홍봉한 모두 사도세자의 죽음에 연루되어 방관하거나 주도했던 사람들 입니다. 그럼에도 이 세사람은 누구보다 세손인 정조를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이기 까지 했던 사람들로 정조는 이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원망도, 절대적인 감사도 할 수 없는 비극의 중심에 선 주인공이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 후 친정에서 돌아온 혜경궁 홍씨는 영조에게 세손이 경희궁에 머물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당시 혜경궁 홍씨는 창덕궁에 머물렀으므로 아들과는 생이별을 하는 셈이었으나 영조가 있는 왕의 거처인 경희궁에 살게 하는것이 세손인 정조를 보호하기 위한 가장 나은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아침에 죄인의 아들이 된 정조는 주변의 적의와 위협들로부터 자신의 몸과 정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정의 정치에 눈을 감고 학문에 몰두하는 것으로 자신을 지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무예의 단련도 게을리 하지 않아 정조는 활쏘기에 매우 능했다고 합니다. 그가 나중에 왕으로 즉위한 이후의 왕의 활쏘기 성적을 기록한 "어사고충첩" 에서는 정조가 50발을 쏘아 49발을 적중시킨 기록이 10여번 이상 존재할 정도였습니다.
다행히 영조는 세손을 보호하기 위해 그를 동궁으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으나 이미 연산군을 통해 피바람과 복수의 전례를 알고 있는 노론과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자들은 이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려 할것이 분명했습니다. 어찌 되었던 정조가 왕위에 오르려면 죄인의 아들이라는 가장 큰 결격 사유를 벗어나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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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도 사도세자를 역적으로 여기는 벽파와 그를 동정하는 시파로 쪼개어 졌으며 벽파의 경우에는"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 라는 명분으로 세손을 동궁에서 폐위할 것을 영조에게 거세게 요구하였습니다.
궁지에 몰린 영조는 세손을 요절한 아들인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을 시키는 것으로 이들의 반발을 무마하려 합니다. 결국 정조는 죄인인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로 동궁의 지위를 지킬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여든이 넘은 노쇠한 영조가 세손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위한 전 단계로 대리청정을 시켜려 하자 노론 벽파의 선봉에 선 홍인한 (외조부 홍봉환의 동생, 이처럼 당파는 정조의 외가 마져도 분열되게 하였습니다.)은 세손은 노론과 소론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알 필요가 없다는 이른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들어 반대하고 승지가 교지를 작성하지 못하도록 몸으로 막으며 방해할 정도로 불손 하였으나 이미 노쇠한 영조는 눈물을 흘릴뿐 이를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 임금이 이르기를,“근래 나의 신기(神氣)가 더욱 피로하여 한 가지의 공사를 펼치는 것도 역시 수응하기가 어렵다. 이와 같고서야 만기(萬幾)를 처리할 수 있겠느냐? …… 두 자[주해 3]를 하교하려 하나 어린 세손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렵다. 청정(聽政)에 있어서는 우리 왕조(王朝)의 고사(故事)가 있는데, 경 등의 의향은 어떠한가?”하니, 적신(賊臣) 홍인한이 앞장서서 대답하기를,“동궁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하였다. 임금이 한참 동안 흐느껴 울다가 기둥을 두드리며, 이르기를,“경 등은 우선 물러가 있거라.”하였다. ”
이때의 영조의 눈물은 왕위와 혈육에 집착했던 영조가 자신의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지킨 왕위를 혈육인 세손에게 물려줄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절망의 눈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노론 벽파의 홍계희, 김상로, 정후겸, 김지주 등도 힘을 합하여 세손인 정조의 대리청정과 즉위를 막으려 필사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늙고 힘을 잃었다고는 하나 50여년간이나 왕위를 지켜온 노회한 영조입니다. 홍인환을 파직하고 세자 시강원의 홍국영으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원흉들인 홍계희, 김상로, 정후겸, 김지주등 노론 핵심인력을 탄핵 하도록 한 후 결국 옥새를 세자궁으로 넘겨 대리청정을 성사시킵니다.
또한 순감군이라는 군사력을 세손에게 넘겨주고 문관의 임명권과 무관의 임명권을 뜻하는 수점권을 넘겨주어 혹시나 있을지 모를 불온한 세력의 시도에 대비케 합니다.
결국 영조는 세손에게 "특히 김상로는 너의 원수이다" 라는 말을 하여 정조가 대비할 세력을 분명히 지적했고 대리청정 뿐 아니라 군사력과 관리 임명권을 모두 넘겨주어 장차 왕위를 승계할 힘을 미리 실어준 셈입니다.
1776년, 조선의 역대 임금 중에서 가장 장수하고 오랜기간 재위한 영조가 여든 두살로 승하 하자 노론 벽파의 계속된 방해 속에서 언제 실각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시기를 무사히 넘긴 정조는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의 나이 스물 다섯 이었습니다. 이 장성한 청년왕은 즉위 후의 첫번째 일성에서 자신의 시대가 왔음을 분명하게 알리고 노론 벽파 세력들을 충격과 공포속에 몰아넣습니다.
“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정조의 이런한 천명은 죄인지자불위군왕(罪人之子不爲君王,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여덟자 흉언(凶言)을 유포시키던 노론 벽파 측에 정면으로 대응한 것이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세종대왕 이후 조선의 왕들 중 그에 버금가는 성군이라는 평까지 듣는 정조의 치세에 대해서 더 논해 보려합니다. 정조, 홍국영과 규장각 -2-
이전 글에서 정조가 어렵게 왕위에 올라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는 말로 노론 벽파를 공포에 몰아 넣는 모습까지 이야기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연산군의 피의 복수를 떠올리며 이 왕을 제거할 마음을 품었음은 분명합니다. 실제로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즉위 첫해에만 일곱차례의 암살시도가 이어졌습니다.
드러난 역모사건만 세 차례로 정조는 밤에도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고 만약을 대비하여 옷을 벗지 않고 침소에 드는 날들이 허다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들의 우려대로 정조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정조는 복수심에 미쳐 날뛰며 무시무시한 공포로 일관해 피를 뿌린 연산군과는 분명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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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추존과 복수
정조는 즉위후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승하였는데 그 연유를 "오직 종천(終天)의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려 한것" 이라고 일단락 지었는데 그 연유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더 깊이 파헤쳐서 노론과 첨예하게 대립하지는 않겠다는 의사의 표명이었습니다.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존호(尊號)를 추후하여 올려 ‘장헌(莊獻)’이라 하고, 수은묘의 봉호(封號)를 ‘영우원(永祐園)’이라 하고, 사당을 ‘경모궁(景慕宮)’ 이라 하였다. 이어서 존봉(尊奉)하는 의절을 송(宋)나라 복왕(濮王)의 고사에 따라 마련하고, 봉원 도감(封園都監)을 추숭 도감(追崇都監)에 합쳐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시호를 의논한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시호를 ‘사도’라고 하신 것은 성스러운 뜻이 있으신 것인데, 지금 내가 오직 종천(終天)의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한 것일 뿐이다. 옛적부터 제왕들이 시법(諡法)을 간여하려 하였음을 내가 일찍이 그르게 여겨 왔다. 만일 혹시라도 지나치게 아름다움이 넘치도록 한다면 어찌 나의 본뜻이겠느냐? 여러 신하들은 그것을 알아야 한다.” 하였다.
-조선왕조 실록 정조 1권 (1776 병신년 3월 20일)-
사도세자의 죽음에 연관된 이들에 대한 것도 홍인한과 정후겸을 유배보낸후 사약을 내리는것으로 그 대상을 최소화 하였습니다.
이미 세상을 뜬 김상로는 그 관작을 추탈하고 김상로의 일가는 유배에 처하였으며 그외 사도세자와 영조사이를 이간질 하는데 앞장섰던 숙의 문씨의 작위를 삭탈하고 폐서인으로 사가로 내보냈고 그 집안 일가는 노비로 삼았습니다.
역시 권력욕에 오빠인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이간질에 앞장섰던 정조의 고모인 화완옹주도 유배를 당했으나 화완옹주는 결국 용서 받고 궁으로 돌아올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하여 파악한 연산군이 두차례의 사화로 죽인 사람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정조는 가열찬 복수보다는 분명한 죄가 있고 왕권에 위협을 가하는 최소한의 인물들을 제거하는것에 그치는 것으로 복수심에 미쳐 날뛰는 폭군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이처럼 명을 내린 후에도 숙원이었던 사도세자를 추존하는 일을 실제로 시작한 것은 즉위 후 13년이나 흐른 후의 일로 그 과정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조는 시간을 가지고 노론의 의심을 풀고 기회를 기다려 이 일을 결국은 마무리 짓는 놀라운 인내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홍국영과 규장각
정조 1년 7월 왕이 머물던 경희궁에 괴한이 칩입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에 정조는 안전을 위해 창덕궁으로 처소를 옮겼습니다. 그러나 그해 8월에는 창덕궁에도 암살자가 침입하는 있을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때는 조사 결과, 정조의 외척인 홍상범, 홍계능등이 유배되어 있던 홍술해와 모의하여 반정을 기도한것으로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천군을 추대해 일을 진행한것이었습니다.
결국 역모에 추대된 은천군은 자진을 명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다 사약을 받았고 홍술해, 홍상범은 사형에 처해지고, 홍계능은 국문중 모진 고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정조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을 제외하면 홍봉환의 동생인 홍인환을 비롯하여 뼈속까지 노론 집안인 정조의 외가는 힘이되기 보다는 오히려 노론이라는 당파의 논리에 따라 대부분이 정조에게 위협을 가하는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사방이 적이었던 정조를 세손시절 부터 보호한 일등 공신은 세손때 부터 그를 보필해온 홍국영, 정민시, 서명선 세 사람이었습니다.
서명선은 영조가 승하 하기전 삼불필지설을 주장하며 정조의 즉위를 강력하게 반대했던 홍인한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그를 실각시켰는데 이를 뒤에서 계획한 이는 홍국영 이었습니다.
이 서명선이 상소를 올린 12월 3일을 기념하여 매년 12월 3일이면 정조는 이들과 따로 술자리를 가지곤 했을 정도였습니다.
홍국영은 정민시와 함께 정조의 세손 시절 부터 그의 신변을 보호하는데 앞장섰고 정조는 즉위 후에도 홍국영에게 계속 신변 보호를 맡길 만큼 그를 깊이 신뢰하였습니다. 이들 중 특히 홍국영은 정조 즉위 나흘 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고 이조참의를 거쳐 규장각 직제학을 겸임하고 정조의 신변보호를 책임지는 숙위대장, 금위대장을 겸직하여 군사를 담당하는 비변사 제조에 임명되는등 눈부신 출세와 권력을 한몸에 지닌 사람이 되었습니다.
홍국영도 정조의 신임에 보답하듯 당파를 떠나 오직 정조를 위해 충성을 바쳤으며 임금도 두려워 하지 않던 노론도 홍국영의 눈치는 볼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조정의 권력과 이목이 홍국영에게 집중되어 있는 동안 정조는 노론의 시선을 피해 개혁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해 나갈수 있었습니다.
홍국영을 전면에 내세운 정조는 자신이 구상한 개혁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기관으로 규장각을 건립합니다.
이 규장각은 정치, 경제, 사회등 현실 문제를 학문적으로 뒷받침 하고 수행하기 위한 위한 국왕 직속의 기관으로 세종대왕의 집현전과 같은 역활을 담당하였습니다.
특히 정조는 신분과 당파를 가리지 않고 능력있는 인재를 규장각에 배치하였는데 조선 시대에 양반가에서 태어났지만 양반으로 인정 받지 못하던 서얼 출신인 이덕무, 박제가, 서이수, 유득공등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약 하였습니다.
또한 남인의 채제공을 규장각 제학으로 임명하였는데 이 체제공은 저 유명한 정약용의 후원자였습니다. 규장각의 인물들을 보면 실학자와 북학파와 같은 새로운 학문에 눈뜬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정조를 실학을 진흥시킨 왕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사실은 정조는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기관으로 규장각을 육성한 것뿐이고 이들의 새로운 문체등을 졸렬하다고 비판하는등 그가 진작하려 한것은 새로운 학문은 아니라 성리학에 기반한 옛사상의 부흥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규장각은 많은 서적을 간행하고 정조의 개혁정치에 추진동력이 되어준 기관이었습니다. 정조는 자주 궁 밖으로 나가 백성들의 민원을 직접 듣고 이를 토대로 백성의 고충을 헤아려 여러 신분차별 조항을 철폐하였으며 신분과 상관없이 양반과 천민을 모두 똑같은 백성으로 보려 노력했습니다. 도망친 노비를 잡은 노비추쇄도감을 폐지하고 백성들이 부당한 형벌의 피해를 받지 않도록 형법을 개정하였습니다.
이러한 개혁 정책들도 규장각을 통해 검토되고 시행하는 이론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조의 개혁정치에서 규장각과 함께 권력의 핵심이자 주축인던 홍국영은 1778년 실각을하게 됩니다. 그 연유는 홍국영의 지나친 독주와 권력욕 때문이였습니다. 정조의 즉위 이듬해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삼아 왕의 외척이 됩니다. 또한 자식을 낳지 못하던 정비 효의왕후를 대신하여 자신의 여동생(원빈)이 아들을 낳을 경우 차기 국왕의 외삼촌이 되려는, 정조가 극히 경계하던 외척으로의 야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원빈이 후궁이 된지 1년만에 병으로 목숨을 잃자 실망하였던 홍국영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원군의 아들 이담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나의 외조카"로 부르는 등, 그를 정조의 후계자로 만드려는 야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냈습니다.
아직 후사가 없긴 하지만 정조의 나이가 불과 서른이었기에 그의 이런 행동은 이미 도를 넘어서는 행동이었습니다.
수 많은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일까요? 원빈의 죽음에 중전인 효의왕후의 의한 독살 가능성에 의심을 품고 중전이 직접 부리는 궁인을 독단으로 체포하여 문초하는 등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안하무인의 행동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결국 정조는 1779년 9월, 홍국영에게 관직에서 물러날것을 종용합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주었던 홍국영에게 은퇴한 관리에게 내리는 명예 관직인 봉조하에 임명하고 홍국영이 자진해서 올린 사직서를 수락하였습니다.
사실 이때만 해도 홍국영은 잠시 조정내의 거센 탄핵 여론을 피하기 위한것으로 다시 재기할 기대를 품었습니다. 아마도 일시적인 은퇴로 생각을 했었던것 같은데 그가 퇴출되기 무섭게 그의 죄상을 토로하는 상소가 빗발치자 사실상 재기가 불가능 하다는것을 깨닿고는 강원도 강릉에서 실의와 좌절감을 술로 달래다가 33살이란 젊은 나이에 그만 세상을 뜨게 됩니다.
조선 왕조 실록의 홍국영 졸기를 읽어 보면 정조는 홍국영의 폭주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아무리 믿고 의지하는 아랫 사람이라도 지나친 권세를 주어 그가 권력을 남용하게 되었다면 그 사람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행사해야 할 권력을 지나치게 넘겨줘버린 그 윗사람의 잘못이라는 취지의 이야기 인데 역사속의 에피소드이기는 하지만 현재에도 사회나 회사에서 여전히 많이 보고 듣고 일어나는 일들이기도 한것 같아 씁쓸한 마음도 듭니다.
홍국영(洪國榮)이 죽었다. 경자년2664) 봄부터 정신(廷臣)들이 일제히 홍국영의 하늘까지 닿은 큰 죄에 대해 성토하였는데도, 임금이 끝내 주벌(誅罰)을 가하지 않았었다. 처음에는 횡성현(橫城縣)으로 방축시켰다가 다음에는 강릉부(江陵府)로 방축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통분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이런 죄에 빠진 것은 참으로 사려(思慮)가 올바른 데 이르지 못한 탓이다. 그가 공을 세운 것이 어떠하였으며, 내가 의지한 것이 어떠하였었는가? 처음에 나라와 휴척(休戚)을 함께한다는 것으로 지위가 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았기에 권병(權柄)을 임시로 맡겼던 것인데, 그가 권병이 너무 중하고 지위가 너무 높다는 것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삼가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서 오로지 총애만을 믿고 위복(威福)을 멋대로 사용하여 끝내는 극죄(極罪)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이는 나의 허물이었으므로 이제 와서는 스스로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9월 이전의 죄는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9월 이후의 죄에 대해서는 더욱 할 말이 없다. 내가 만약 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 중신(重臣)의 한 차자(箚子)에 그의 죄가 남김 없이 드러났으니, 공의(公議)는 숨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니,
예조 판서 김익(金熤)이 말하기를,
“권간(權奸)의 신하가 예로부터 한정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만, 홍국영처럼 손으로 나라의 명운을 움켜쥐고 권세가 임금을 넘어뜨릴 정도에 이른 자는 전적(典籍)이 있은 이래 없던 바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홍국영에 대해 작위(爵位)를 높여 주고 은수(恩數)로 총애하여 주신 것 또한 전적이 있은 이래 없던 것이었습니다. 권병(權柄)이 한번 옮겨지자 국세(國勢)가 거의 위태할 뻔하였으니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하여 보면 써늘하여 가슴이 떨립니다. 이는 실로 전하의 과실인 것인데, 신이 전석(前席)에서 자신을 책망하는 하교를 우러러 받드니, 삼가 우충(愚衷)에 스스로 격동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예판의 말이 옳다. 한마디로 포괄하여 말한다면, 이는 곧 나의 과실인 것이다.” 하였다.
조선왕조 실록 정조 11권, 5년(1781 신축 4월 5일)
홍국영은 낙마 하였지만 정조의 개혁은 멈추지 않습니다. 아마도 재위기간 이처럼 왕의 역활에 충실하고 열심이었던 사람은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이 아닌가 합니다.
왕이야기에서 줄기차게 말했듯 역사는 위인전이 아니기에 성군으로 평가받는 두 대왕에게도 공이 있고 과가 있을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조를 대왕이라 부르는 것은 세종대왕과 마찬가지로 재위기간 동안 왕이 된자로써 왕의 책무를 스스로 인식하고 이를 수행 하고자 몸도 돌보지 않고 너무나 끊임없이 노력하고 열심히 일해온 왕이기 때문입니다.
선거때는 악수하고 절하고 우리의 일꾼이 되겠다던 사람들이 금배지를 달고나면 민생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지는 것을 너무 많이 보는 요즘인지라 이러한 대왕들의 정치와 개혁에 대한 이상이 더 아쉽게 느껴지는 요즈음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