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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도보 순례단 '별들과의 동행' 팀이 6월 27일 안산 합동 분향소를 출발해 진도까지 걷는 여정을 진행하고 있다. 국민들에게 세월호 참사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기 위해서다. 순례단의 도보대장은 임시 유족 대표였던 송정근 목사(맨 앞)다 |
"자아! 다 왔습니다. 조금만 더 힘냅시다!"
코스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송정근 목사(안산 부곡제일교회)의 목소리는 더 활기차다. 안산 합동 분향소를 출발한 지 6일째인 7월 2일, 세월호 도보 순례단 '별들과의 동행' 팀의 머리 위로 '논산'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정표가 걸려 있다. 송 목사와 함께 길을 걷고 있는 스무 명의 사람들은 크게 대꾸하지 못한다. 이들은 이미 체력이 아닌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
순례단은 지난 6월 27일 합동 분향소를 출발해, 5일 동안 수원, 평택, 천안, 세종, 대전을 거쳤다. 앞으로 논산, 전주, 광주, 목포를 거쳐 진도까지 갈 계획이다. 발바닥에 물집이 터지고 무릎은 시큰거리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국민들이 세월호를 한 번 더 기억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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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정근 목사가 쉬는 시간을 이용해 참가자들에게 도보 코스를 설명하고 있다. |
순례단의 도보 코스를 책임지고 있는 도보대장은 송정근 목사다. 그는 4월 16일 세월호 침몰 당시 진도체육관에서 임시 유가족 대표를 맡았던 사람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를 방문했을 때 사회를 봤다. 하지만 이후 그는 언론에 의해 '유가족을 상대로 사기 치는 정치인'으로 몰렸다. (관련 기사 : 세월호 임시 학부모 대표 논란 진실은? / 송정근 목사, 어떻게 정치 활동가로 매도됐나)
송 목사의 얘기는 가십처럼 한순간 달아올랐다가 사라졌다. 몇몇 언론이 그의 반론을 보도하기는 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인터넷에는 그에 대한 비난이 남아 있다. 그 후 두 달 만에 언론에 등장한 송 목사는 세월호 도보 순례에 앞장서고 있었다. 계속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일을 하고 있었던 걸까. 도보 순례 5일째인 7월 1일, 그를 만나기 위해 세종시로 찾아갔다.
비난과 오해 속에서도 진도에 간 이유
순례단은 오후 3시께 정부청사 인근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아침에 세종시를 지나면서 국무총리실에 들러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전달하려 했는데 경찰들이 막아섰다. 뙤약볕에서 5시간 정도를 대치해 모두들 지쳐 있었다. 도보대장인 송정근 목사는 점심식사 후 다른 대원들에게 휴식 시간을 주고 인터뷰에 응했다. 좀 쉬어야 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말에 그는 걷는 것에 이골이 났다며 괜찮다고 손사래를 친다.
"이번 도보 순례는 제가 준비한 건 아니고요. 세월호 사건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시민들로 구성된 '시민행동가만있지않겠다'가 기획했어요. 여기에 제가 운영하는 청소년 쉼터와 공부방 아이들 두 명이 저와 함께 참여한 거죠. 저는 청소년들과 지난 7년 동안 매년 여름에 국토 도보 여행을 했어요. 시민 단체는 운동력이 있고 저희는 도보 여행의 기술이 있어서 서로 협력하게 된 겁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오늘로 77일째입니다(7월 1일 기준). 그동안 지방선거 지나가고, 월드컵 시작되고, 사람들도 슬슬 세월호 얘기에 스트레스를 느끼고…. 관심에서 멀어지니까 진상 규명 촉구 서명율도 현저하게 떨어졌어요. 이렇게 가면 안 되겠다, 국민들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켜야겠다는 생각으로 도보 순례를 계획한 거죠. 아직도 11명이 남아 있습니다. 끝난 게 아니에요. 세월호 참사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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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보단은 1시간에 4~5km를 걷고 10~15분 정도 쉬기를 반복한다. 하루만 걸어도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종아리가 당기고 무릎이 시큰거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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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로를 걷고 있는데 한 가스 배달 차가 멈춰 섰다. 운전사는 머쓱하게 웃으며 음료수 한 박스를 건넨다. 송정근 목사가 운전사와 휴대폰 번호를 교환하는 모습. |
송정근 목사는 '사기꾼'으로 몰린 다음에도 세월호에 대한 관심을 끄지 않았다. 안산 합동 분향소에서 봉사하다가 결국 다시 진도로 내려갔다. 언론이 자신을 그렇게 매도한 건 참을 수 있었지만, 그 때문에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에게 좀처럼 다가갈 수 없었던 건 상처로 남았다.
"그 보도가 세월호 침몰 6일째에 나왔어요. 내용 자체가 전혀 말도 안 되니까, 내가 거기에 주눅들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죠. 물론 전국에 '나쁜 놈'이라고 방송이 나가는 게 힘들기는 했습니다. 저보다 가족들이 힘들어했어요. 방송이나 SNS 찾아보지 말라고 했지만 그게 되나요.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보호하는데 왜 힘들어하느냐'고 말씀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지금 밖에 뙤약볕이 내리쬐지만 우리는 건물 안에서 시원하게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보호하시는데 밖에서 뭐라고 떠들든 무슨 상관이냐는 믿음이 생겼어요.
용기를 내서 안산 합동 분향소에 찾아갔죠. 봉사하면서 초창기 희생자 대표였던 분을 만나게 됐어요. 저는 어느 정도 괜찮아졌지만, 어쨌든 그런 보도가 나간 것 자체가 유가족들에게는 미안한 거잖아요. 조심스럽게 다가갔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목사님은 우리 도와주려고 하신 건데…'라며 오히려 위로해 주셨어요. 나는 괜찮다고 답하고, 유가족들이 허락해 주시면 봉사를 계속하겠다고 말했어요.
그러다 5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지 딱 한 달 되었을 때였죠. 아… 마음이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밤에 잠도 안 오고. 제가 있어야 할 곳이 여기가 아닌 것 같은 거예요. 진도로 가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가면 몰매 맞을 수도 있는데. 아무리 사실이 아니라고 하지만 알아주는 사람은 몇 안 되니까요. 밤잠 설쳐 가며 고민했죠. 문득 예수님이 생각났어요. 오해받더라도, 죽더라도 가야 하는구나. 그래서…."
송정근 목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얼굴을 감싸 쥐고 눈물을 삼키려 노력했다. 몇 번이나 말을 하려다가 다시 목이 메었다.
"그렇게 5월 16일에 다시 진도로 내려갔습니다. 처음에는 그분들 근처에도 못 갔어요. 열여섯 가정 남았을 때인데. 그분들은 내 얼굴 다 알죠. 저는 죄스러운 마음에 체육관에도 몰래 들어가고, 먼발치에서 쳐다만 봤어요. 주중에는 진도에 있다가 주말 되면 안산으로 올라가 사역하고, 그런 생활을 4주 동안 했어요. 그러니까 유족들이 어느 날 '이리 와서 같이 밥 먹자'고 하는 거예요. 유족들이 식사하는 곳은 따로 있거든요. 계속 진정성을 가지고 옆에 있으니까 마음을 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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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정근 목사와 순례단 단장 등 참가자들이 도보 코스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 이들은 7월 1일 순례 다섯째 날, 세종시에서 대전으로 이동했다. |
대화 도중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 순례를 떠날 시간이 됐다. 송 목사는 쪽잠을 자는 사람들을 깨우며 힘내자고 독려했다. 도보 순례단은 세종시에서 예상치 못하게 시간을 지체해 대전 시내까지 차로 이동했다. 시내에서 5km를 걸어 대전시 중구 은행동 으능정이 문화의 거리에 도착했다. 순례단은 각 지역에 도착할 때마다 시민 단체와 연대해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서명운동을 진행한다. 순례단 참가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김제현 어르신이 마이크를 들고 시민들에게 서명을 부탁했다.
"안산 합동 분향소에서 출발해 5일 만에 대전에 도착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나이가 팔십둘입니다. 세월호 참사는 저 같은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생때같은 어린 자식들을 저세상으로 보낸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그냥 지나가지 마시고 진상 규명 촉구를 위한 서명에 동참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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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가자 중 가장 연세가 많은 김제현 어르신(82)이 대전 시민들에게 서명을 촉구했다. 어르신은 지팡이를 잡고 걷다가 체력이 달리면 차로 이동하고, 다시 걷기를 반복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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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단은 각 지역 시민 단체와 연대해 세월호 진상 규명 촉구 1000만 인 서명운동을 벌인다. 7월 1일에는 대전 으능정이 문화의 거리에서 많은 이들이 함께했다. |
안산서 청소년 사역 20년…사례비 받은 적 없어
하루 일정을 모두 마치고 밤 10시가 넘어서야 송정근 목사와 여유롭게 대화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세월호 사건에 마음을 쓰는지 물었다. 송 목사는 잠깐 할 말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자신의 목회 얘기를 꺼냈다.
"저는 '빈곤 목회'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라고 믿었어요. 20년 전, 안산에서도 가난하다는 부곡동으로 들어와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이 지역은 빈부 격차가 아주 심합니다. 산에서 내려다보면, 절반도 더 되는 곳이 골프장이에요. 거기를 보면 잔디도 고르고 꽃도 피고 분수도 올라오고 무릉도원 같습니다. 거기에서 딱 한 명이 라운딩을 해요. 골프장 옆에는, 절반도 안 되는 곳에 수만 가구가 바글바글 붙어서 살아요. 빈곤 가정, 한 부모 가정, 독거노인이 많아요.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노는데 해가 져도 집에 들어가지 않는 거예요. 그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어요. 부모들이 잦은 야근 때문에 아이들을 챙겨 주지 못했던 거죠. 그래서 밑천도 없이 무료 급식을 시작하고 아이들을 돌봤습니다. 처음에는 밥과 반찬이 부족해서 학교를 20군데 정도 전전했어요. 학교 급식에서 남은 음식을 얻으려고요. 아이들이 빵을 좋아해서 빵집도 50군데 이상 돌아다녔죠. 독거노인들에게도 무료 급식을 했습니다. 돈은 없었지만 예상치 못하게 주변의 도움을 받아 매일 40~50명에게 하루 세끼 분량을 4년간 나눠 줄 수 있었어요."
20년 동안 겪은 우여곡절은 말로 다 못한다. 청소년 쉼터가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면 사단법인으로 등록해야 한다고 해서, 전 재산을 몽땅 털어 법인을 설립했다. 초대 이사장을 맡아 4년의 임기 중 2년만 하고 깨끗하게 물러났다. 하지만 다음 이사장 때부터 이사들끼리의 이권 다툼이 생겨 쉼터는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결국 정부도 지원을 끊고 쉼터는 문을 닫았다. 그래도 송정근 목사는 청소년 사역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제 손으로 청소년 쉼터를 운영했습니다. 단기 쉼터는 가출한 아이들이 2~3일, 길게는 석 달까지 생활하다 나가는 곳인데요.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국가 지원을 못 받은 지 3년이 지나니 빚이 자꾸 늘었어요. 결국 쉼터로 쓰던 집을 팔았습니다. 이런 쉼터는 국가 지원을 받아야 할 수 있는 일이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더라고요. 쉼터는 문을 닫고, 거기 있던 아이들을 우리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이번 도보 순례에 참여한 아이들 중 한 명이 우리 집에서 같이 삽니다. 다른 한 명은 공부방 출신이고요. 얼마 전에는 쉼터에 있다가 군대에 갔던 녀석이 제대 후 자기 집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어요."
이번 순례에 참가한, 송 목사와 한집에 산다는 사람은 올해 나이가 22살인데 벌써 2살·3살짜리 딸들이 있다. 쉼터에서 만난 여자와 눈이 맞았다. 송 목사의 집에는 아내와 자녀 둘, 쉼터 커플과 그들의 아이 둘, 전역 후 돌아온 사람까지 총 9명이 살고 있다. 그는 지금도 1년에 500~600명의 청소년들을 만난다고 했다.
송정근 목사는 다섯 가정이 모이는 작은 교회를 목회하고 있다. 단기 쉼터는 문을 닫았지만 장기 쉼터와 공부방은 계속 운영한다. 최근에는 대안학교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전세금으로 산 45인승 버스를 개조해 청소년들의 이동 쉼터로 사용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돈은 항상 모자란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 그대로 살았을 때, 꼭 필요한 사람을 붙여 주셨던 하나님을 믿고 있다.
"저는 사역하면서 단 한 번도 교인들에게 사례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헌금, 십일조 내라는 말 한 번도 안 했어요. 월급도 얼마 안 되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동안 쉼터 소장도 하고 대학교에 출강도 하면서 그럭저럭 버텨 왔습니다. 요즘에는 그런 게 없어서 가계에 빚이 자꾸 쌓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해요.
지금 교회와 집이 어렵습니다. 어쨌든 애들 데리고 살아야 하니까 돈을 벌어야 해요. 제가 쉼터를 운영하다가, 여기에 찾아오라고만 할 게 아니라 직접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가출 청소년 만나려고 45인승 버스를 샀습니다. 운전기사를 둘 형편이 안 돼 제가 직접 대형 면허 땄죠. 그러다 보니 그걸로 생계를 유지하게 됐어요. 반월공단·시화공단 출퇴근 차량 스페어 기사를 하는 겁니다, 아침저녁으로. 낮에는 목회하고요. 관광 시즌이 되면 관광버스도 몰아요. 그렇게 해서 생활비·사역비 감당하는 거죠."
다시 진도로 내려가려고 결정할 때 송 목사는 경제적인 상황을 많이 걱정했다고 한다. 아내가 그래도 가라고 허락했을 때 너무 미안했다며 눈물지었다. 그러나 이내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 잃은 사람들보다 더하겠느냐"고 말하면서 감정을 추슬렀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 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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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정근 목사가 함께 도보 순례에 참가한 청소년의 링거 주사 바늘을 손봐 주고 있다. 이 청소년은 송 목사가 운영하는 공부방에 다니고 있다. |
송정근 목사는 20년간 '청소년들이 행복한 나라'를 꿈꿔 왔다. 그가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남다른 감정을 느끼는 이유다. 아마도 유가족 외에 세월호 참사에 가장 가슴 아파하는 사람은 자신일 거라고 말했다.
"안산에서만 청소년 사역을 20년 가까이 했어요. 단원고등학교 학생들도 많이 상담했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불길한 예감이 들어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진도에 내려갔어요. 안산 사람들은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던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청소년에 미친 사람이니까. 그때는 뭐 제가 새정치민주연합 경기도의원 예비 후보라는 사실은 새까맣게 잊고 있었죠. 청소년 사역자, 목사로서 간 거죠.
도의원에 출마했던 건 그동안 청소년 사역에서 느꼈던 한계 때문이에요. 저는 나름 사회복지학 대학원도 졸업했고, 현장에서 청소년을 수없이 만났으며, 청소년 관련 법안도 만들어 봤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뭔가 하려고 할 때 공무원의 펜대 하나도 넘기 힘들더라고요. 이럴 바에야 차라리 직접 정치인이 되는 게 낫겠다 싶어서 출마했던 거죠.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후에 미련 없이 사퇴했습니다. 지금 아이들이 물에 빠져 있는데 그런 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죠."
어떻게 하면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싶어 무작정 진도로 내달렸고, 유족들의 부탁으로 임시대표를 맡았다.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언론에 매도당하고 유족들에게 죄스러워해야 했다. 하지만 송 목사의 마음은 처음 진도로 향했던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도보 순례가 끝난 다음에는 무엇을 할 계획이냐고 물었다.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어디에 트라우마 센터 마련해 놓고, 정신과 의사 석·박사들 모아 놓고, '와라' 이러는 건 방법이 아닙니다. 이런 재난을 당했을 때의 상담은 '생활 상담'이어야 해요. 저는 이 용어를 쓰고 싶어요. 물론 요즘에 어떤 심리상담가 한 분은 상처가 있는 가족에게 찾아간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5월 16일 진도를 다시 찾은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거기서 한 가정 한 가정 만났어요. 상담의 형식과 절차는 없었지만 그냥 옆에 있어 주었던 거죠.
안산에 있는 주부들이 안타깝다고 글을 올려요. 빨래라도, 밥이라도 해 주고 싶다고.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집에 혼자 있으면 어떨까요. 밥이고 뭐고 그냥 넋을 잃고 있는 거예요. 마침 그 밑에 동생이 있으면요, 학교 갔다 왔는데 밥도 없고 엄마는 넋 놓고 있고…. 그러면 여기에 도우미라도 돼서 함께해 주는 거, 그게 재난 치유 상담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네가 뭘 아느냐'고 할 수 있겠죠. 화내고 히스테리 부리는 거 다 받아 줘야죠. 그분들은 그럴 자격 있습니다. 그럴 권리 있다고 봐요. 저는 안산 가면 이걸 하고 싶어요. '동네 아줌마들 아저씨들 다 나오세요. 유가족들의 삶으로 들어갑시다' 하면서요.
세월호 이전의 대한민국과 이후의 대한민국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민 의식이나 국민성, 영성 같은 내면적인 부분이 4월 16일 이전과 이후에 달라져야 하고,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도보 순례는 기도…팽목항 가기 전까지 모두 찾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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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째 날, 7월 2일은 대전에서 논산으로 가는 날이었다. 순례를 시작하며 숙소 앞에서 '파이팅'을 외치는 참가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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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정근 목사는 순례 중간 쉬는 시간에도 잘 앉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일일이 음료수를 따라 주며 힘내라고 독려한다. 그는 지난 7년간 청소년들과 국토 도보 여행을 해 왔다. |
다음 날, 세월호 도보 순례 6일째인 7월 2일, 순례단은 아침 8시 30분부터 논산 방향으로 걸었다. 송정근 목사의 안내대로 걷다가 쉬기를 반복했다. 남쪽으로 갈수록 점점 구름이 끼더니 세차게 비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비옷을 입고 계속 걸었다. 신발이 젖어 들고 몸은 더 무거워졌다. 도보대장인 송 목사는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쉬는 시간에도 잘 앉지 않고 사람들에게 일일이 음료수를 따라 줬다.
잠깐 송 목사와 나란히 걸었다. 송 목사는 도보 순례를 기도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작 하루 이틀 동행한 나는 힘들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데, 그는 한 발짝씩 내딛으며 기도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송 목사는 진도에 도착할 때까지 실종자 11명을 모두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참사의 진상도 제대로 규명되기를 바랐다. 그는 아마 진도까지 수백만, 수천만 발걸음을 내딛으며 같은 기도를 올릴 것이다.
세월호 도보 순례단 '별들과의 동행'은 7월 12일까지 팽목항에 닿는 것을 목표로 걷고 있다. 이들의 동향은 <뉴스300> 김진혁 기자의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phadosea64?fref=ts)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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