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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종택(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옆에 있는 정충효각(旌忠孝閣). 1686년 간재의 충효를 기려 나라에서 건립한 것이다. |
‘옛 사람 사모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慕古是何人)/ 오직 내 참성품 지키기 바랄 뿐(庶幾守我眞)/ 세상 밖의 일 말하지 않고(莫論世外事)/ 달갑게 농사꾼이 되었네(甘作中身)/ 어버이 돌아가실 때 효도하기 어려웠고(親歿難爲孝)/ 재주 없어 끝내 뜻 펼치지 못했으니(才疏竟不伸)/ 세상을 경륜해 보려던 건 그 옛날의 뜻일 뿐이고(經營伊昔志)/ 청춘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네(無復更靑春).’
간재(簡齋) 변중일(1575~1660)이 만년에 지은 시 ‘술지(述志)’다. 겸손한 표현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지나간 자신의 삶을 잘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조선 중기의 학자인 간재는 이 시에서 부모에게 제대로 효도를 다하지 못했음을 자책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생전에 ‘하늘이 낳은 효자’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남다른 효행을 실천해 주위를 감동시켰다. 그리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각별했다.
간재의 각별한 효행과 충성심은 당시 선비들의 귀감이 되었고, 그의 사후 119년이 지난 뒤 지역 유림은 간재의 충효 정신을 길이 전하고자 간재를 불천위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이에 관한 기록이 전하고 있다.
간재는 이처럼 유림에 의해 불천위에 오른 과정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보기드문 사례의 인물이다.
◆‘하늘이 낳은 효자’라며 왜병도 감동
서너살 때 사람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외울 정도로 총명했던 간재는 7세 때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간재는 어버이를 섬기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책은 무엇인지를 물었다. ‘효경(孝經)’이라는 답을 들은 그는 바로 효경부터 먼저 배우겠다고 요청했다.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가도 대추나 배 같은 것을 얻으면 품에 넣고 집으로 가서 할머니께 드렸다. 그의 삶을 정리해놓은 행장(行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한 번은 모친이 병이 들었는데, 의원이 “꿩고기를 고아 먹으면 낫는다”고 했다. 마침 큰 눈이 내려 간재가 산에 들어가 꿩을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어 애를 태우고 있는 중에 우연히 꿩 한 마리가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 꿩을 잡아 모친에게 먹게 해 드리자 효험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위 사람들은 간재의 효심이 감응(感應)한 결과라고 이야기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일이다. 왜적이 침범해 안동까지 밀려들자 동네 사람 모두가 달아나 숨기에 바빴다. 당시 간재는 18세로 집안에 늙고 병든 조모와 함께 있었다. 조모는 여름 더위에 이질까지 만나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로 위중해서 간재는 조모를 간호하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속을 태우고 있었다. 결국 하루는 왜적들이 총을 쏘며 마을에 들이닥쳤다. 집안 사람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황망해하는 가운데, 간재는 먼저 모친을 업어 빽빽한 삼밭 속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다시 조모를 업고 피신하려고 했으나 조모가 곧 숨이 넘어갈 지경이라 옮길 수가 없자, 죽음을 무릅쓰고 조모 곁에 앉아 간호하며 무사하기만 빌었다.
마침내 한 왜병이 먼저 집으로 들어와 간재를 때리며 끌고 나가 넘어뜨리고는 칼을 빼들고 죽이려 했다. 이에 간재는 간절하게 말하기를 “조모 나이가 금년에 80세가 넘는데 나같은 불효한 손자는 죽어도 아무 상관이 없지만, 조모님만은 꼭 살려주시오”라고 부탁했다.
진심어린 간재의 말을 들은 다른 왜병들이 급히 간재를 죽이지 못하게 하고 부축해 일으킨 뒤, 다시 방에 들어가 조모를 간호하도록 했다. 그리고 왜병들은 “이는 실로 하늘 낳은 효자이고,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이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우리가 떠나고 난 후에 다른 왜병이 오면 다시 화를 당할 수도 있으니 신표가 없으면 안될 것”이라고 말하고는 깃발 하나와 칼 한 자루를 주며 “뒤에 왜병이 오거든 이것을 보이며 사정을 이야기하라”고 설명했다. 왜병들은 집안 물건을 하나도 약탈하지 않고 물러가고, 조모의 병도 점차 회복돼 집안을 보전할 수 있었다. 당시 받은 일본도(길이 1m20㎝ 정도)는 가보로 전하고 있다.
◆정유재란 때는 화왕산 전투 참여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고, 학봉 김성일이 경상도 초유사(招喩使)로 임명돼 경북지역을 돌며 초유할 때 간재는 “군신간의 큰 윤리는 하늘이 내린 법이고 땅이 정한 의리인데, 지금 임금님이 피란 길에 오르고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려하는데 비록 나 같은 초야의 미신(微臣)이라도 어찌 힘을 다해 나라의 위급을 구하기 위해 충성을 다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뒤, 집에 있는 쌀 100석을 군량미로 상주 진영(鎭營)으로 실어보냈다.
그 후 간재는 형(喜一)과 함께 학봉이 있는 진주로 가니 이미 학봉이 전장에서 별세한 뒤라 몸을 맡길 수 없음을 슬퍼하며 발길을 돌려, 망우당 곽재우 진중(陣中)으로 가서 기무(機務)에 종사했다. 이곳에서 간재는 적의 탄환에 맞아 팔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적이 다시 쳐들어오자 간재는 창녕 화왕산으로 달려가 박수춘, 성안의, 남사명, 류복기, 정사성 등과 함께 맹약(火旺同盟)에 참여해 적들을 막아냈다.
왜란이 평정된 후 여러 친족이 간재의 효행을 나라에 보고해 포전(褒典)을 청하려 하자 간재는 내세울 일이 아니라며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극구 말렸다. 친족은 할 수 없이 그 뜻을 접었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당시 간재는 노쇠하고 병을 앓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식(素食)을 하며 상기(喪期)를 마치고, 인산(因山:장례)과 소상(小祥: 죽은 지 한 돌만에 지내는 제사), 대상(大祥: 사후 두 돌만에 지내는 제사) 때는 노지(露地)에 엎드려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했다.
◆만년에 고향 집 옆에 정자 ‘간재’ 지어 수양
간재는 만년에 고향 집의 동쪽 언덕에 정자를 지은 뒤 ‘간재(簡齋)’라는 편액을 달고 그것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간재가 지은 ‘간재기(簡齋記)’ 내용 중 일부다.
“…작은 서재를 지어 이름을 간재라고 써붙였다. 일찍이 듣기를 ‘군자의 도는 중(中)에 적응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君子之道 適於中而不倚於偏)’라고 했다.…나는 감히 덕을 이루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덕을 숭상할 뜻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렇더라도 내가 간자를 취한 이유가 어찌 중을 버리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취하는 것이겠는가. 나는 재주가 모자라고 뜻도 게을러 큰 일을 경영해 백성에게 혜택을 주지 못하고, 왜적이 침입해 나라가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몸을 바쳐 수치와 분통을 씻지도 못했으니 내가 장차 세상에 무슨 뜻이 있겠는가.
그래서 자취를 거두어 몸을 숨기고 그 뜻을 담아 이 서재의 이름을 지었다. 기와가 아닌 초가로 한 것은 거처함의 간이고, 담장을 흙으로 바르고 붉은 칠을 하지 않은 것은 꾸밈의 간이다. …말이 많고 교묘한 것이 간단하고 서툰 것만 못한 것이니, 간이란 중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원래 도를 해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간으로써 내 삶을 즐기련다. 그러나 내가 또 어찌 지나치게 간하는 사람이겠는가. 내가 바라는 것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에 적응하기를 기할 뿐이다.”
1603년 조정에서 그의 행의(行義)를 가상하게 여겨 건원릉 참봉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해 나아가지 않았고, 80세가 넘어서야 통정대부에 올랐다.
간재 별세 후 경상감사가 여론을 받아들여 간재의 충효 행적을 조사해 조정에 보고하자, 1686년 5월 숙종 임금은 간재의 충효를 기리는 정문(旌門: 나라에서 충신·효자·열녀를 기리기 위해 세우는 붉은 문)과 각(閣: 旌忠孝閣)을 간재종택 앞에 세우게 했다. 이듬해에는 금고(琴皐)서원에 제향되었다.
■변중일 약력
△1575년 안동 출생 △1581년 ‘효경(孝經)’ 공부 △임진왜란 때(1593년) 망우당 곽재우 휘하에서 기무(機務) 담당 △1597년(정유재란) 화왕산성 전투에 참전 △1655년경 통정대부 가자(加資) △1686년 충효 정려(旌閭) 내림 △1779년 유림 공의로 불천위 오름
간재 불천위 이야기
보기 드물게, 불천위 오른 과정 기록으로 남아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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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가 만년에 지어 강학하며 수양하던 정자 간재(簡齋). 정자 이름을 직접 지어 걸고 그것을 또한 자신의 호로 삼았다. 간재종택 뒤편에 있다. |
간재가 불천위에 오른 내력은 기록으로 남아있다.“1779년(정조 3년) 10월15일에 禮(신주를 땅에 묻는 의식인 埋祭) 일자를 잡아 원근의 사림에 통고하니 모인 사람이 280여명이었다. 오후에 대청 앞에 회의자리를 여니 공의(公議)가 일어나 ‘간재공의 탁월한 충효행은 이미 조정에서도 은전의 포상이 있었는데, 사림에서 존모하는 정성이 어찌 없겠는가. 오늘의 자리는 조매제사(埋祭祀)로 거행할 것이 아니라 불천위로 모시는 제례로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버렸다. 이에 종손과 지손들이 그 자리에 찾아가서 ‘사림의 논의가 이같이 정중하니 실로 후손된 사람으로서는 감축하는 바이나 뜻이 뜻대로 될 수 없는 지극히 어려운 처지가 있습니다’라고 했으나, 참석한 사람들이 자손의 겸양을 들어주지 않고 공의로 이미 결정한 대로 마무리짓고 모인 사람 중 김응탁(金應鐸)을 선정, 본손(本孫)을 대신해 고유문을 짓게 했다.”그리고 김성탁이 본손을 대신해 지은 가묘부조고유문(家廟不告由文) 중 후반부 내용이다. ‘…세상을 떠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라에서 특별히 정전(旌典)을 내려 엄연한 유각이 저기 휘황(輝煌)하게 서 있습니다. 세상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 조례의 날이 다가오니 뜻 있는 선비들이 모두 모여 옛 현인을 앙모함이 더욱 새로워, 이에 불천위의 예로 모실 것을 결정하니 자손들은 송구하고 두려워하면서 삼가 맑은 술과 여러가지 안주로 제주를 바쳐 올립니다.’간재 불천위 고유 행사 때 800여명의 유림이 참석했다간재 불천위 제사는 기일(음력 10월20일) 밤 9시, 간재종택(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안채 대청에서 지낸다. 간재 11세 종손 변성열씨(1960년생)는 “20년 전에 제사 시간을 변경했고, 요즘 참석하는 제관은 60~70명”이라고 말했다. 제수는 유사들(3명)이 준비하고 고·비위 신주를 함께 모시는 합설로 지낸다. 아헌은 종부가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