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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상 중의 최상
“대답해봐요. 상, 중, 하로.”
하하.
그는 감이 왔는지 이렇게 대답했다.
“상중의 최상!”
그녀는 별안간 영주의 집사 놈이 생각났다.
그는 그녀의 상품 가치를 ‘하’로 매긴 인간이었다.
또 베르베르는 어떤가.
그 역시 그녀의 외모를 결코, 상으로 치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오마르 공화국 예쁜 여자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오마르 공화국에선 미인의 조건이 가슴과 엉덩이가 툭 튀어나오고 전체적으로 통통해야 한다는 게 불문율이었다.
즉 통통한 여자가 대세였다.
영주나 기사의 여식들은 만 10세만 넘으면 허리만 잘록하게 만들고 가슴과 엉덩이를 펑퍼짐하게 만드는 것에 익숙했다.
그리하면 15세가 지날 때쯤 완벽하게 풍만하고 육감적인 몸매가 되는 거였다.
그래서 바짝 마르고 여윈 그녀는 그 조건에 해당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미지의 세계에서 미의 기준은 오마르 공화국과 다른 모양이었다.
‘세상에!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나 제대로 먹지 못하여 여읜 나를 상중의 최상으로 여기다니.’
그의 말에 그녀는 눈물이 나올 뻔하였다.
그녀는 다시 한번 이 미지의 세계로 온 것에 관하여 마녀에게 감사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저는 유희 씨가 이 무인도에 오기 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제가 어떤 일을 하다뇨?”
“음, 물론, 이건 추측입니다만, 유희 씨는 아마 모델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허걱!
“분명해요. 아마 이곳에 오기 전에 화보 촬영이 있었는데, 기획 단계에서 유희 씨를 아름다운 지중해 소녀로 잡은 것 같습니다.”
‘뭐래?’
“그래서 지중해와 가장 유사한 이곳 남도의 바다에서 당시에 유행했던 돛단배를 띄우고 촬영하다 그만 풍랑을 만난 거죠.”
“??”
“그 증거로!”
“증거?”
“지금 유희 씨 옷차림은 중세 시대 여자들이 입는 옷이잖아요.”
그녀는 그가 그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갖춘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하마터면 마녀의 소리가 없었다면,
그녀는 그만 “내가 그 시대에서 이 시대로 왔어요.”라고 실토할 뻔하였다.
그때 마침 마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림잡아 후려치지 말라고 해. 이건 그냥 해본 소리야. 절대 넘어가면 안 돼.》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마녀의 말대로 크게 소리쳤다.
“흠, 흠. 후려치지 말아요! 아니거든요.”
이번엔 그녀의 얼굴이 벌게졌다.
벌게진 뺨이 봉숭아가 물드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본 그는 큰소리로 웃었다.
목젖이 보일 정도였다.
“뭐, 아니면 말고. 하하.”
다음 날 아침, 그녀는 그가 부를 노래의 악보를 받았다.
그들은 이미 연주할 준비를 마쳤다.
이제 그녀만 노래하면 연습이 시작되는 거였다.
“유희 씨. 일단 제가 먼저 부를 테니 한번 듣고 따라 해봐요.”
제임스가 기타를 메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바로 시작하죠.”
그녀의 말에 제임스를 비롯한 모두의 표정은 뜨악했다.
‘뭘 그리 놀래? 이 정도는 기본이지.’
그녀는 악보를 받아 들고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 없음에 깜짝 놀랐다.
한 마디로 똑같았다.
이 정도야 교회 성가대 경험으로 듣지 않고도 부를 수 있었다.
“좋아요. 자, 시작합시다. 드럼부터 들어가고!”
그녀는 노래 시작 전에 베르베르를 생각했다.
그러자 가슴 밑바닥에선 알 수 없는 슬픔과 후회가 쏟아져 나왔다.
결국,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26. 첫 데뷔
이 노래는 연인과 헤어진 후의 감정을 애절하게 담은 가사가 압권이었다.
장르는 ‘록 발라드’였지만 그녀는 ‘발라드’라는 기본에 충실했다.
“사랑을 다 했노라 뜨거운 가슴으로 고백했는데
원치 않았던 슬픈 시간을 오늘 내 임과 가졌네.
(중략)
사랑을 다 해 사랑할건만, 이제는 지난 얘기
아아! 내 임아. 우리 사랑이 다시 한번 맺혀주오.”
노래가 끝나자 제임스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의 찬사가 이어졌다.
그런데 유독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혹시 원곡자의 의도를 잘못 파악했나 싶어 안절부절못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제임스가 고함을 질렀다.
“세상에! 깜빡 잊고 남자 원키, Em로 연주했잖아. 그런데도 완벽하게 고음이 올라갔어. 브라비!”
“와우! 유희 씨, 쵝오!”
경태가 한마디 했다.
“제임스처럼 인상 안 구기고, 고함 안 질러서 좋네.”
제임스는 그길로 달려와 또 그녀를 안아주었다.
헉!
그녀는 그에게서 나는 짙은 땀 냄새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그녀의 첫 데뷔는 성공이었다.
그녀는 드디어 오마르 공화국에서 꿈도 못 꿀 가수가 되는 첫 길을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앨범에 수록된 8곡 모두를 로테, 아니 유희 씨가 부르는 게 어때?”
제임스는 나머지 구성원들을 설득했다.
“그래도 음원엔 다 네 목소리잖아.”
경태가 토를 달았다.
“상관없어. 어차피 녹음이 아니라 공연이잖아. 뭐, 정 그렇다면 나는 로테 뒤에서 백 화음을 넣으면 되지.”
“그것도 나쁘지 않아.”
“그렇지?”
“그래, 워낙 유희 씨 목소리가 좋으니까 관객들이 껌뻑 넘어갈 거야.”
멤버의 유일한 여자인 재희가 마지막으로 거들자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로테는 나머지 7곡을 그들과 함께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아침 일찍 연습한다고 했으나 마칠 때는 정오가 한참 지나있었다.
점심 먹을 때가 지나간 것이다.
제임스는 불을 피우고 나머지는 식사를 준비했다.
그때 막내 심황이 요트에서 흰 박스를 가지고 왔다.
제임스가 물었다.
“뭔데?”
“캔 맥주요. 오늘 새 멤버가 왔으니 축배를 들어야죠.”
“좋아. 돼지고기 삼겹살과 맥주로 근사한 파티 한번 하지.”
그녀는 불에 구운 돼지고기가 이렇게 맛있는 줄 처음 알았다.
사실 오마르 공화국에서도 양이나 돼지를 키웠다.
하지만 식탁에 돼지고기를 올린 날은 1년에 정말 며칠 되지 않았다.
그날은 아빠의 생일, 추수감사절, 성탄절 정도였다.
영주는 농민에게 갖은 명목으로 세금을 걷어갔다.
오물세, 물세, 기름세. 심지어 여성들의 그날인 월경세까지 걷어갈 정도로 그들에게 착취당했다.
그러니 그들이 먹는 것은 늘 멀건 수프에다 딱딱한 빵 정도였다.
어떤 때는 산에 올라가 나무뿌리를 캐어 연명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곳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것 한번 마셔봐요.”
재희가 또 그녀에게 술을 권했다.
오마르 공화국에도 맥주가 있지만 이런 맥주는 처음이었다.
정말 맛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찬 맥주가 양철에 들어있다니.’
이날 그들은 낮부터 밤까지 찬 맥주와 삼겹살을 먹고 마시면서 하루를 보냈다.
더우면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하였다.
그러다 또 목마르면 하얀 박스에 있는 찬 맥주를 마셨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이들과 이들이 사는 세계에 관하여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녀는 무려 6백여 년을 뛰어넘은 미래에 온 것이다.
이들이 사는 나라는 대한민국이었고 지금은 2026년이었다.
27. 신분 세탁
물론 그녀의 옷차림은 그들과 달랐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 비슷했다.
희망, 사랑, 기쁨 그리고 슬픔, 고통, 비탄 등의 감정은 똑같았다.
단지 궁금한 점은 여기 이 세상은 그때 그녀가 오마르 공화국에서 살던 삶과 비교하여 얼마나 진보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과연 여기도 초야권을 주장하는 영주가 있을까?
* * *
다음날부터 그녀는 그들과 공연을 연습했다.
제임스가 만든 노래 8곡을 원곡자의 의도를 살리면서,
그녀의 목소리를 덧입히는 작업이었다.
작업은 힘들었지만, 너무도 황홀하면서 재미있었다.
그녀의 꿈이 실현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매일, 매일 구름 속에 걷는 기분이었다.
오마르 공화국을 탈출한 게 그제야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야 그녀는 악기 이름을 다 알았다.
기타, 드럼, 베이스, 피아노(전자 오르간)의 협주는 완벽했다.
특히 제임스의 리드 기타는 거의 예술이었다.
전주와 간주에 들어가는 그의 기타독주는 한음, 두음 딸 때마다 너무 슬프고 아름다웠다.
♫♭♫♪♪♫
베이스나 드럼, 피아노 역시 제임스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피아노의 선율은 너무 고왔다.
튕기듯 박자를 넣은 베이스의 둔탁하면서도 세밀한 음도 일품이었다.
좌충우돌 해변을 때리는 드럼의 화려한 두드림은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다.
그녀는 이곳이 마치 천상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연습이 한창이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녀는 제임스와 바닷가의 바위 위에 맥주 2캔을 들고 앉아 있었다.
그가 저녁밥을 먹고 나더니, 갑자기 그녀더러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바람도 없고 파도는 잔잔했다.
“유희 씨. 오해 말고 들으세요. 이게, 우리나라 법으론 불법이긴 한데, 앞으로 우리와 함께 활동하려면 유희 씨의 신분증이 있어야 합니다.”
‘신분증?’
“하지만 지금 과거에 관한 기억이 없으니,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유희 씨가 제 동생이 되어주세요.”
그녀는 그의 말의 의미를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네? 제가 동생이라뇨?”
“마침, 유희 씨와 나이가 비슷한 제 친동생이 있어요. 당분간 그 아이의 주민등록증을 이용하는 겁니다. ”
‘주민등록증이 뭐야? 공화국 시민권 같은 건가?’
“아! 그렇다고 그 아이 행세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활동하기에 필요한 서류만 유희 씨가 가지고 있는 거죠.”
“여동생인가요? 실례지만 나이가?”
“올해 우리 나이로 스물여섯이고 현재 미국, 뉴욕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테보다 네 살 정도 많은 셈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유희 씨도 화장하고 옷만 잘 차려입으면 그 정도 나이로 보일 겁니다. 하하.”
“그런데 방금 뉴욕이라 했어요?”
그녀는 그때 마녀가 도착한 곳이 뉴욕이라고 한 게 떠올랐다.
그 단어를 입에 올리자 마녀가 생각났다.
“네, 제 여동생은 뉴욕대학에서 미술 계통으로 석사과정을 밟고 있어요.”
“그렇군요.”
그런데 그녀는 이 상황이 약간 야릇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다니.’
그녀는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밤바다만 바라보았다.
그때 어떻게 알았는지 마녀가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뭘 망설이고 있어? 그에게 그렇게 한다고 말해. 아무 문제 없어. 오히려 그런 편이 네가 그 세계에서 무사히 살아갈 방법이야.》
“그래도 될까요? 난 엄연히 오마르 공화국에 날 낳아주신 아빠와 엄마가 있고 동생도 둘이나 있잖아요?”
《쓸데없는 소리! 그런 기억은 그만 잊고 그의 요구에 응해. 내가 보기엔 아주 진실하고 좋은 남자 같아. 베르베르완 비교도 안 돼!》
“알았어요. 마녀님 의견이 그렇다면 그렇게 할게요.”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