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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중에도 산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벧전 1:1~11
올해가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71년이 되었습니다. 북한 공산당에게 먹히기 일보 직전에 우리의 우방인 미국을 중심으로 16개국 UN군의 도움으로 자유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UN창립이래 처음으로 유엔군이 조직되어 파견한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6.25전쟁을 통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으며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였는데 가장 짧은 기간에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발전한 유일한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입니다.해방된지 5년만에 나라를 잿더미로 만든 원흉이 김일성뿐인가요 아니요 그와 늘 동행했던 박헌영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박헌영은 김일성보다 공산주의 이론에 대해 한 수 위였고 그의 공명심을 이루고자 6.25 한국전쟁은 일어났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박헌영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1930년 대에 나온 대중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은 80년이 지난 지금도 노래방이나 가끔 방송에서 심심찮게 불리워지고 있다. 그 노래는 왜정시대 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이별하는 님을 못잊어하는 노래라고 생각하면서 가사자체가 그런 애국심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눈물젖은 두만강이라는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을 알고나면 이 노래는 뼈속까지 공산주의자요 6.25 한국전쟁을 일으킨 북한의 2인자인 박헌영을 사모하면서 만들어진 노래인 것을 안다면 다시는 부르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것이다. 물론 박헌영은 왜정시대 때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방법이 공산주의라는 사상을 무기로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였는데 1928년 항일운동가인 박헌영은 출옥한 뒤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을 때 그는 모스크바에 있는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조선을 탈출하여 소련으로의 망명을 결심한다. 知人인 김용환(영화배우 겸 연출자)의 도움으로 부인 주세죽과 함께 두만강을 건넌다.
김용환은 두만강을 건너며 자신의 시야에서 멀어지는 박헌영을 바라보며 두만강을 건너가는 내 님은 언제 돌아올까라는 애틋한 사연을 간직하면서 이 노래를 작사했다고 한다. 후에 작곡가 이시우가 이 가사에 곡을 붙여 "눈물 젖은 두만강"이 만들어지고, 1936년 김용환의 동생 김정구가 오케레코드社에 취입하여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직장생활하면서 회식 후 2차 노래방가면 그 노래를 몇 번 부른 적이 있는데 지금은 노래방도 갈 일도 없지만 공산주의 골수분자를 사모한다는 이 노래의 배경에 이제는 입에도 담고 싶지 않은 노래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박헌영은 빨갱이 두목이 아닌 조선 민족의 해방을 위해 일제와 맞서 싸우는 항일투사였으며, 공산주의가 우리 민족에게 최적의 정치이념이라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눈물 젖은 두만강"이 박헌영을 사모한 노래라는 것은 뜻밖이었다. 반공이 국시였던 시절 단지 월북한 작가의 노래라는 이유만으로 잠시 금지곡이 되었던 것을 아는 우리로선
대한민국을 없애버리려고 했던 그 박헌영을 사모한 "눈물 젖은 두만강"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요? 새깧만 공산주의 후배 12살 띠동갑인 김일성에 의해 미 제국주의의 간첩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김용환이 봤다면 "눈물 젖은 두만강"이 아닌 "눈물 젖은 교수대"가 만들어졌을까? 박헌영의 일생은 공산주의라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펼치려다 남과 북의 정치투쟁에서 패배한 불운한 정치가이기도 하다. 자 제가 박헌영을 잠시 소개했지만 여러분
박헌영을 얼마나 잘 아십니까? 그는 남로당(남조선로동당)의 수뢰이며 6.25한국전쟁 남침을 한 주역중의 한사람이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살인하고 살상하는데 앞장섰던 인물로 공산주의 전파를 위해 일생을 바쳤던 인물이인데 우리는 박헌영이 무엇을 했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이시간 박헌영이라는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충남 예산에서 지주 박현주의 서자로 태어나면서 천대받게 되는 환경에서도 머리는 명석하였기에 경성보통고등학교(경기고)에 다니면서 서양문물에 일찍 눈을 떠 미국유학을 꿈꾸며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YMCA 영어학당에서 영어공부도 하였고 또 일요일에는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를 다니면서도 거기서도 영어를 배우기도 하였다고 한다. 경성고보 재학시절 3.1운동에도 참여했다가 체포되는 과정에서 저항의식이 공산주의자로 심취하게 되는 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공산주의 사상에 접하면서 급진적으로 신분이 상승하게 된다. 어렸을 때 서자로 천대받던 것을 생각하면 다른세상에서 사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1925년 조선공산당을 창당하다
박헌영은 1921년 5월 상해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여 공산당의 열성당원으로 활동하면서 위대한 영도자라는 별칭을 얻고 1922년 3월 고려공산 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출되면서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는 조선의 레린이라고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다
박헌영은 1922년 모스크바 원동인민 대표자대회에 여윤형 김규식 김단야 등과 참석하고 상해로 돌아온 뒤 조선에 잠입하여 조선공산당 조직하라는 코민테론(국제공산당 지도부) 지시받고 입국직전 단동에서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1년10개월 복역 후 1924년 1월 출소 후 서울에서 고려공청회 중앙총국 책임비서 재선임되었으며 1925년 4월 17일 을지로1가 아서원 음식점에서 박헌영 김재봉 등 20여명이 조선공산당을 창당하다. 초대책임비서 김재봉은 1923년 블라디브스크에서 활동하던 인물인데 김재봉이 일본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옥사하면서 졸지에 조선공산당 지도자로 올라서는 행운도 따랐다.
조선공산당은 국제 공산당의 한 지부로서 폭력혁명에 의거하여 공산주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물론이다. 공산주의 자들이 독립운동하는 목적과 자유민주주의 자들이 하는 독립운동하는 목적과는 완전히 다르다. 자유민주주의 자들이 독립운동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천부적인 인권 즉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지만 공산주의 자들의 독립운동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려는 정치체제를 만들기 위해 조선공산당을 만들었고 그런 국가를 만들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가요? 당연히 자유민주주의 나라에서 우리가 살면서 마음껏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목표가 아닌가요? 그런데 이런 자유대한민국이 지금은 주사파정권이 나라를 잡고 있는데 주사파란 운동권 계열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지도이념인 주체사상을 지지하고 친북 성향을 특징인데 이들은 1960년대생이 주류를 이룬 1980년대 대학에 다니면서 북한의 주체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삼은 자들이다. 그들은 정권을 잡기 무섭기에 자유와 사유재산을 부인하는 공산주의 자들까지도 다 건국훈장을 주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는데 이 사람이 대한민국 건국에 벽돌한장을 쌓았습니까? 박헌영이도 건국훈장을 주려고 하는데 우파사람들이 난리를 치니까 지금 못주고 눈치를 보는데 박헌영이가 건국훈장을 받는 날은 대한민국이 소멸되는 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박헌영은 1925년 조선일보에 기독교를 배척하는 글을 쓰는 선봉장이 되었고 개벽이라는 잡지 1925년 12월호 역사상으로 본 기독교 내면이라는 글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은 제국주의 영토확장을 위해 첨병구실을 한다는 글도 게재했다. 언더우드선교사가 자기를 도와주었는데 박헌영과 기독교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요즘에도 교회목사가 진보주의를 옹호하는 목사가 많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목사들이 무신론을 주장하는 공산주의를 지지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극과 극인데 마귀에게 미혹당하면 목사라도 공산주의 이름을 달리한 진보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다니던 박헌영이가 무신론자가 되어 기독교를 탄압하는데 앞장섰다는게 가능할까? 하기야 김일성을 보면 가능하고도 남는다.
김일성 어머니는 강반석이다. 반석은 베드로라는 뜻이며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도 선교사가 지은 학교에 다녔다. 김일성 본인도 중학교 2학년때까지 교회에 열심히 나갔다. 아버지 김형직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설립한 신학교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인 숭실학교를 나왔다고 한다. 김일성 집안 역시 기독교 집안으로 유명했는데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장로였고, 북한의 부주석을 지낸 김일성의 외삼촌 강양욱도 목사였다. 이런 기독교 집안의 김일성이가 공산주의 최고 수장이되면서 1백년 전 동양에서 가장 큰 교회였던 장대현교회는 지금 김일성 동상과 소년궁전이 있는 만수대로 대체하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안될 것이다.
박헌영이나 김일성이가 기독교를 배반하는 것도 일치했으니 앞으로 그들이 무슨 일을 계획할지 궁금하기도 하다.
다시 박헌영으로 돌아가면 박헌영은 1922년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활동 중 상해로 피아노공부를 하고자 유학온 주세죽과 결혼했는데 주세죽은 조선의 여성공산당원으로 함흥에서 태어나 영생여학교고등과 출신으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개월동안 감금되기도 했다. 1920년대 여성 공산당 3대 트로이카하면 주세죽, 고명자, 허정숙이었다. 1924년 5월 한국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 조선여성동우회 발기 및 집행위원이였던 주세죽은 1922년 두 살 연하의 박헌영과 결혼하여 딸 박비비안나가 태어나는데 나중에 소련에서 민속무용가로 활동하다.
1925년 11월 25일 박헌영과 주세죽을 일본경찰이 체포하는데 주세죽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고 박헌영은 신의주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1927년 11월22일 병보석으로 석방되고 1928년 함흥에서 두만강을 건너 탈출하여 블라디보스트크로 탈출할 때 가수 김정구의 형 김용환이가 그들이 탈출하도록 도와 준 후 두만강을 건너는 장면을 보면서 만든 노래가 눈물젖은 두만강이라고 한다. 박헌영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코바에 가서 국제 레닌대학에 입학을 하고 주세죽도 대학에 입학하여 공산주의 교육을 받게 된다. 조선인으로 레닌대학에 입학하여 공사주의 교육을 받은 자가 박헌영이가 최초가 아닌가 한다. 1929년 박헌영은 소련공산당에 입당하고 베트남의 호치민이가 국제레닌대학에서 박헌영과 같이 공부하다. 박헌영이는 중국어 영어를 잘 구사하였다고 한다. 이후 코민테론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조선을 공산화하는 지도에 박헌영이가 올라가게 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 배후로 지목되었으며 1931년 3월 3일 박헌영과 주세죽은 상해로 가 조선공산당을 지도하라는 지령을 받고 4세된 딸 박 비비안나를 육아원에 맡기고 상해로 와서 공산혁명에 몸을 바치다.
박헌영이 상해 체류하던 1932년 4월에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본 대장을 살해하는 의거가 일어났는데 박헌영은 이를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뒷받침되지 않은데 저 혼자 영웅이 되려고 폭탄을 던지다니 공산주의 활동에 해를 끼치다 하면서 극소수에 의한 폭력행위라고 윤봉길의사를 비난하였다. 공산당들은 진짜 독립운동하는 자들을 싫어하는 것은 그들 때문에 자신들의 활동이 제약받기 때문이다. 윤봉길 여파로 1933년 7월 5일 상해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년형 언도받고 구금되었는데 그가 체포당하던 1933년 주세죽은 박헌영의 친구 김단아는 부인을 버리고 주세죽과 눈이 맞아 모스크바로 도망가서 재혼하는데 두사람 사이에 김비탈리란 아들이 태어나는데 1937년 스탈린 숙청 때 김단아는 일본 간첩으로 총살을 당하고 주세죽도 일본간첩의 아내라는 사회적 위험분자로 낙인찍혀 아들은 죽고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되면서 토사구팽당한 것이다. 주세죽은 죽어라 노동을 하는동안 해방이 되어 박헌영은 북한에 가서 외상이 되었는 소식을 듣고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스탈린에게 여러번 탄원서를 냈지만 박헌영한테는 김일성이 주선해 준 나이차이가 25살 나는 윤내라라는 여자가 생겼는데 이 여자는 박헌영의 다섯 번째 여자이다. 주세죽은 1953년 죽었는데 2007년 노무현 좌파정권시절에 주세죽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주었다.
건국훈장에 기록된 글은
주세죽선생은 1919년 함흥에서 3.1만세 사건에서 참여하여 체포되었고 1925년 1월 경성여자 청년연맹 결성에 참여하여 활동하고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건국훈장을 수여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대한민국 건국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 이것입니다.
노무현 좌파정권시절에 이런 사람에게까지도 건국훈장을 주었다는 것이 대한민국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징조이다.
(1) 두 번째 부인 정순년을 만나다
1939년 대전교도소에서 석방된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재건활동을 하다 충북 청주에서 두 번째 부인 정순년을 만나 동거하다 태어난 아들이 원경스님이다. 1987년 원경스님은 박원순 문학평론가 임헌영 등과 함께 역사문제연구소를 세워 대한민국의 역사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좌경역사관 전파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2) 세 번째 여자 이순금을 만나다
1941년까지 지하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 피해 3년간 광주에 있는 벽돌공장에서 위장취업을 하는 동안 또 한사람 여자가 나타나는데 그녀가 이순금인데 광주벽돌공장에 숨어 있는 박헌영과 서울에 있는 소련영사관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한다. 8.15 해방이 되자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펼친다.
(3) 네 번째 여자 현엘리스를 만나다
박헌영의 인생에 또 한번의 여성이 등장하는데 현엘리스라는 여자 때문에 결국은 미국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당한다.
박헌영은 상해에서 체류하던 시절에 현엘리스와 만났다. 현엘리스는 상해 임시정부 외무차장 현순목사의 딸로 현순목사는 공산당에 가입한 사람인데 현순은 박헌영과 같은 공산당원으로 친밀한 사이인데 그의 딸이 박헌영을 흠모하지만 박헌영은 주세죽과 결혼한 사이. 현순목사는 목회위해 미국을 갈 때 딸을 데리고 가게 되니 현엘리스는 미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거기서 정준과 결혼을 하였는데 결별하고 미국에서 공산당 활동을 하였다. 후에 현엘리스는 남한에 와서 미군군속으로 근무하다 박헌영을 조우하게 되면서 미 군정은 조선공산당 책임자인 박헌영과 만나는 것을 알게 되면서 박헌영에게 미군관련된 정보를 넘기다가 들통이 나면서 그녀를 추방시킴. 현엘리스는 미국으로 가서 계속 공산당활동을 하면서 독립이라는 잡지에도 참여. 현엘리스가 체코에 와서 북한으로 망명을 함. 현엘리스는 영어를 능통하게 잘해 북한외무성에 근무함. 현엘리스가 체코에서 월북할 때도 박헌영이가 도움을 주었고 외무성 근무때도 박헌영이가 도움을 주었는데 결국은 이것이 알려지면서 이 여성과의 관계로 미국간첩으로 처형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2. 1946년 남로당 결성
1925년 박헌영이가 창당한 조선공산당을 비롯하여 몇 개의 단체들이 있었는데 해방이 된 후 1946년 박헌영은 조선인민당·조선공산당·남조선신민당 3당이 합동하여 결성한 정당을 남조선노동당이라고 하는데 보통 남노당이다. 이들은
'9월 총파업'과 '10월대구폭동사건'을 주도
경찰서 습격 ,방화 , 살인 , 인민재판, 등등
굵직한 남로당 관련 사건으로는
제주 4·3 사건,
여순 14연대 반란사건<==대한민국 공식 군대 반란 사건.
여수 순천 장악 후 지리산 빨치산됨.
이런 사건으로 남노당은 남한 내의 골치아픈 정당이었다
박헌영과 현엘리스관계가 터지면서 박헌영은 자진 월북하였다.
3. 6.25 한국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합작품이다
올해는 한국전쟁 71돌이다. 한번쯤 정리하고 넘어갈 인물이 박헌영이다.
그는 조선의 레닌으로 음미되고 비운의 혁명가로 역사가들은 지칭하기도 한다. 해방되기 전까지 그가 얼마나 공산주의를 위해 일생을 바쳤는가를 위에서 밝혔다. 8.15 해방과 더불어 1946년에는 남로당을 조직하였고 남한의 지식인 거의가 그가 조직한 남로당에 가입하였다. 해방 후 불안한 시대에 그는 제주 4.3사건을 일으킨 배후자였고 여순반란사건을 일으킨 배후자였고 마지막은 6.25한국전쟁을 일으킨 공모자였다.
박헌영의 경력은 1948년 북한 외무상 이전에는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 창립의 코미테른이 인정하는 간판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이말은 띠 동갑인 김일성보다 12살 위인 박헌영의 과거인력이 훨씬 앞선다는 점이다. 해방후 북한 권력 1,2인자는 김일성과 박헌영이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6.25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소련의 스탈린을 만났을 때에도 중공의 모택동을 만났을 때도 둘은 항상 같이 동행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의견은 언제나 같았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은 둘 중의 누구도 반대한 것이 아니라 두사람이 공동으로 일으킨 것이다.
이승만 박사가 건국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가장 방해가 된 인물이 당연히 박헌영이었다. 마침 박헌영과 그의 네 번째 여자 현엘리스와의 관계가 밝혀지자 그는 1946년 10월 미군정의 체포령과 김일성의 권유로 자진 월북하여 김일성 체제 확립에 기여를 하였다.
한편 남한에서는 박헌영 월북 후 6.25까지 1년 10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에 남한 내의 남로당 조직은 궤멸의 길을 걷는다. 조직 내에 경찰의 프락치들이 깊숙이 침투했고 급기야는 박헌영의 월북 후에 지하운동을 지도해 오던 김삼룡과 이주하마저 김삼룡의 비서였던 안영달의 밀고로 체포된다. 남로당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 검거되는 바람에 졸지에 남한 내 남로당 최고위직에 오른 박갑동은 그야말로 숨만 겨우 쉬는 처지에 있었던 남로당 조직원들의 한심한 상황을 증언하였다. 그러나 안전한 북한에 있던 박헌영은 남침만 하면 자신을 따르는 20만명의 남로당원들이 봉기해서 삽시간에 '남조선 해방'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헛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김일성과 함께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남침지원을 애걸하였었다. 결국 소련, 중국, 북한의 지도부는 남침을 감행하겠다는 파국적인 결정을 내리게 되었고 여기에는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뿐만 아니라 박헌영의 공명심 또한 크게 작용했으니 그는 김일성과 함께 동족상잔의 범죄를 일으켰던 민족 앞에 크나큰 범죄를 저지른 대죄인이라 할만 하다. 6.25가 북한군의 남침으로 발발했고 서울이 불과 3일 만에 함락되었으나 박헌영이 호언장담했던 이십만 남로당원들의 봉기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좌경 맹동주의, 민중의 절실한 요구들에 실현가능한 방식으로 응답하지 않고 오직 모스크바에 보여주기 위한 방식의 운동에만 매진한 것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3일을 지체한 것은 박헌영의 호언장담을 믿고 남로당원들의 봉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덕분에 미군이 개입할 수 있는 천금 같은 시간을 벌어 남한이 구출될 수 있었다고 한다.
남로당원들이야 박헌영의 삽질과 경찰의 효율적인 운용으로 박멸되었지만 중요한 사실은 6.25의 양상이 국공내전이나 베트남전쟁 같은 내전이 아니게 된 것에는 6.25 직전 이승만이 불완전하지만 유상몰수·유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남한 농민들이 이미 자기 땅을 가지게 되어 북한이 "토지를 밭갈이하는 자에게"라는 구호를 외쳐도 먹혀 들어가지 않았던 탓도 아주 컸다고 하겠다. 박헌영은 서울 점령 후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타던 차를 몰수해 타고 다니기까지 하며(이병철회장 증언) 잠시 반짝하는 듯 싶었으나 그의 호언장담들이 모두 공수표로 끝나고 전선이 낙동강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다가 인천상륙작전을 거쳐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해 북진하는 지경에 이르자 박헌영도 김일성과 함께 도주한다.
4. 박헌영은 김일성에 의해 총살 당하다
김일성과 박헌영,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을 일으킨 이 두 민족사의 범죄자들이 국군과 유엔군에 쫓겨서 압록강변에서 처량하게 중공군이 그들을 구원해 주기를 이제나 저제나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1950년 늦가을에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대판 싸웠다고 한다.
전쟁중에 둘은 의견차이로 갈라서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삼일이면 통일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전쟁을 일으킨 두 사람은 유엔군의 개입으로 3일이 3년으로 연장되는 중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전투를 승리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완수한 후 서울을 탈환하고 거침없이 북으로 밀어부쳤다. 당연히 김일성과 박헌영은 후퇴하면서 1950년 11월 7일 유엔군의 북진으로 만포진으로 옮겨있던 소련대사관에서의 김일성은 술에 취해 박헌영에게 시비를 걸며 남침하기만 하면 튀어 나올 것이라던 남로당원들 당신이 말한 그 빨치산들은 다 어디에 갔는가? 남침만 하면 남로당들이 들고 일어나면 사흘이면 전쟁은 끝날거라고 했던 것을 추궁했던 것이다. 그러자 박헌영은 ‘아니 김일성동지 어찌해서 군대를 낙동강으로 다 보냈는가? 서울이나 후방에 왜 병력을 하나도 안 두었는가?... 그러니 후퇴할 때 다 독안에 든 쥐가 되지 않았는가?’ 라면서 ‘그러니 다 내 책임은 아닌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김일성이 ‘야 이자식아 야 이자식아 만약에 전쟁이 잘못되면 나 뿐 아니라 너도 책임있다. 이 무슨 정세판단을 그렇게 했는가’ 라며 대리석으로 만든 잉크병을 내던지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1950년 11월 7일 유엔군의 북진으로 만포진으로 옮겨있던 소련대사관에서의 일이었다. 박명림 교수[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박헌영과 김일성과의 갈등이 사실이라면 이 싸움은 박헌영의 비극적 운명의 전주곡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김일성은 6.25 남침 실패의 책임이 자신에게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희생양을 찾고 있었고 객관적으로 보아서도 박헌영의 이 민족 대참사에서의 책임은 작지 않았다. 그러나 김일성이 누군가? 이미 군사경력으로는 박헌영 뺨을 치고도 남을 자로 모든 무력을 틀어쥐고 있었기에 박헌영과 그의 동지들인 남로당계의 이승엽, 이강국, 임화 등은 곧 굴비두루미처럼 줄줄이 꿰어서 잡혀 들어간다. 이들에게 씌워진 죄목과 범죄사실은 '미 제국주의자들의 고용간첩으로 공화국에 반역행위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이후의 남한에서의 박헌영과 그때 같이 재판받고 처형된 이승엽, 이강국, 임화 등의 모든 공산주의, 사회주의 관련 활동들은 깡그리 미국을 위한 간첩활동이라는 어마어마한 결론은 박헌영이가 총살을 당하는 운명이 된 것이다. 김일성은 그 후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를 계속 제거하고 독재체제를 굳힌 다음 세습체제까지 만들어 내 이제 북한이 3대 세습까지 가게 된 건 이미 김일성이 1950년대에 2인인 박헌영을 제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한에서 6.25 전쟁 직전 월북해 김일성과 힘을 합쳐 남한의 적화 통일을 시도한 "골수 빨갱이"로 인식되어 온 박헌영에게서 마르크스의 제자에 가까운 면을 발견했을 것이다. 교수 박명림의 경우에는 박헌영의 입지가 모자라 고비에 몰려 전쟁을 일으킨게 결코 아니며 오히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장이었던 김일성하에 부위원장이자 내각 부수상 박헌영으로 군림하며 김일성과 철저하게 손잡고 일으킨 것이 6.25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이 둘의 의견이 맞아 떨어졌기에 남침을 개시했다는 것이다. 어떤 분석이 맞든 남침을 주장하고 주도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다.
5. 십계명을 모방한 김일성 유일사상 10대 원칙
김일성이 기독교를 박해한 건 자신이 만들었다는 주체사상이 사실 기독교 십계명을 본따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먼저 기독교에서 구속력이 강한 십계명을 북한의 유일사상체제 확립 10대 원칙과 비교하면서 “사실상 북한에서 헌법 위에 있는 실질적인 법”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기독교의 십계명처럼 북한에는'유일사상 10대 원칙'이 있는데, 내용이 비슷하다.
기독교의 주기도문은 북한에서 명절이 끝나면 외우는 ‘선서’와 대칭됐다. 성탄절을 본딴 ‘태양절’도 있다. 교회에서 매주 드리는 예배는 매주 선전실 등에 모여 하는 ‘생활총화’다.
기독교에서 예배 의식을 위한 종교적 공간이 있듯이 김일성주의 연구실이 있는데, 엄숙하고 성스러운 곳입니다.
십자가와 같은 상징물로 초상화, 휘장으로 불리는 배지도 있습니다.
예배에 가서 드리는 ‘회개 기도’는 생활총화 시간에 비서 앞에서 잘못을 털어놓고 용서받는 것과 같다.
설교는 목사 역할의 당 비서가 주관하는 당 정책 등의 학습으로, 설교에 앞서 읽는 성경구절은 당 비서가 회의에 앞서 인용하는 교시 말씀으로 탈바꿈했다. 회의 전 ‘김일성 장군의 노래’,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노래’, 회의 후 ‘수령님 만수무강 축원합니다’ 같은 ‘찬송가’도 존재한다.
북한 체제가 기독교 방식을 따라간 이유에 대해서는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음을 알아야 한다”며 “반석은 베드로에서 따온 기독교 이름이고, 강반석의 아버지 강돈욱은 칠골교회 장로, 할아버지 강량욱은 목사였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집안이 기독교이니 그 체계를 교묘하게 본떠 북한 체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사상교’는 세계 10대 종교가 됐다.
해방 직후 북한은 기독교가 대단히 왕성했다. 그 중에서도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만큼 신자들이 많았다. 북한에서 기독교는 단순 신앙의 문제를 넘어 체제 유지와 직결된다. 다른 공산국가보다 기독교를 유독 탄압하는 이유이다. 하자만 북한에는 지하교인수가 최소한 10만명 정도는 된다고 한다. 나는 30년전 지하교회 예배모습을 비디오로 2시간 정도 본 적이 있다. 오늘날 목숨걸고 예수님을 믿는 곳이 북한 말고 어딘가? 하늘나라가면 북한에서 올라간 성도가 남한에서 올라간 성도들보다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속에 잠자는 한국교회는 깨어날 때가 되었다.
6.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대한민국
북한 공산주의와 남한 민주주의의 차이점은 인권과 자유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아니, 죽으면서까지 자유를 지켜야 하는가?’라고 반문 할 수 있겠지만 자유는 그만큼 중요합니다. 자유가 전혀 없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우리나라는 자유 대한민국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바쳐 싸웠던 것은 자유를 찾기 위해 싸웠던 것입니다. 올해가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71주년입니다. 북한 공산당에게 먹히기 일보 직전에 우리의 우방인 미국을 중심으로 16개국 UN군의 도움으로 자유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UN창립이래 처음으로 유엔군이 파견한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G2 국가, 즉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는 예언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영적 부흥입니다.
베드로전서는 로마의 황제 네로가 기독교를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했던 AD 65년을 전후로 하여 베드로 사도에 의해 쓰여진 서신입니다.
이 편지는 ‘소망의 서신’ 이라고 불려지는데, 베드로는 이 서신을 통하여 환난 중에 있는 성도로 하여금 곧 닥쳐올 큰 박해를 극복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어떤 고난과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당시 AD 65년경에는 네로 황제가 통치하던 시대로 특히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때입니다. 따라서 이 편지는 고난 속에서 교회가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가 이 고난을 어떻게 이기고 감당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주는 [산 소망의 말씀]이 됩니다.
(1) 산 소망의 말씀
고난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누구에게나 닥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고난을 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환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고난을 기뻐하라 말씀합니다. 성경은 역설적인(paradox) 말씀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일찍이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고난을 당합니다. 아니, 주님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도 고난을 당하셨다면 죄 많은 우리 인생들이야 말할 것도 없이 고난이 있음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의미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 하십니까? 본문 말씀 1장 7절을 보시겠습니다.“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했습니다. 금이 정금 되는 것은 그냥 될 수 없습니다. 뜨거운 용광로를 거쳐서 불순물이 다 타 버리고 녹아 버린 다음에야 불로 연단해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금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거치는 동안에 정금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신앙과 고귀한 인격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 23장 10절에“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말씀하십니다.
(2) 고난을 통하여 영광을 기대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고난을 극복하면서 살아갈 때, 거기에는 주님의 놀라운 영광이 있습니다. 7절에“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영광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11절에“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상고하니라” 했습니다. 주님도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주님에게 영광이 찾아 왔던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고난은 쓰지만 열매는 달다’‘눈물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는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고난 중에서도 해야 할 일은 인내와 충성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3) 고난을 통해서 산 소망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롬5:3~4“다만 이뿐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고난이 아무리 무겁고 숨 막히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아무리 아픈 것이라고 해도,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산 소망’은 헬라어로‘엘피다 조산’으로 영원한 생명의 보장을 말합니다.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아무런 소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지옥에 간 부자가 불꽃 가운데서‘손가락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시원하게 해달라고 애원을 해도, 물 한 방울의 자비도 통하지 않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전서는‘산 소망’이란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1장 3절 말씀에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그 나라는 고통이 없는 곳입니다. 슬픔이 없는 나라입니다. 불만족이 없는 곳입니다. 죽음이 없는 곳입니다. 모든 것이 넘쳐납니다. 기쁨과 행복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산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여러분은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고 해도 절대로 실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4) 산 소망은 주님의 재림할 때 이루어 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갖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산 소망이 되실 때 우리 삶은 완전히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산 소망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주권자로 나의 왕으로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세상에서 이겨셨기 때문입니다(요16:33).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승리와 상급과 영광은 주의 재림 때입니다.
그 나라는 영원합니다.
6.25전쟁 71주년을 맞는 올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는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분들의 희생의 대가로 주어진 고귀한 선물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특히 일부 단체에서 최근 국가보안법을 폐지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방관해서는 안됩니다. 이 법은 결코 건전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악법이 아니다. 이 중요한 헌법을 폐지하려는 자들은 북한을 이롭게 하고 이나라를 혼란중에 빠뜨리는 자들인 것을 알고 믿는 우리들이 이 나라의 안위를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