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사를 자처하는 시인 김남주의 평전이 나온 모양이다. 며칠전 한 유투브에서 김남주 평전을 다루면서 죽창가를 꽤 자세하 소개하였다. 곡도 아름답고 슬프지만 시의 내용도 매우 아름다운데 마지막 죽창이라는 구절 때문에 보수정치인들이 몸서리를 친다고 하였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반란에 되자 하네
청송녹죽(靑松綠竹)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김남주, ‘노래’)
처연하게 아름답다고 할까? 내용이 쉬운 건 아니다. 두메가 날라와 꽃이 되다니... 그것도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라니... 알 듯 모를 듯하다. 2연, 3연은 그보다는 좀 쉬워보인다.
두메, 산골, 들판, 고을... 농민들의 삶이 이어지는 여러 공간, 그리고 그 속에서는 꽃, 새, 불, 죽창(반란)으로 이어진다. 땅에 뿌리박은 꽃, 여기저기 서로의 아픔과 소식을 전하러 다니는 새, 그리고 울분이 불씨가 되어 들판을 휘돌고, 마침내 고을에서 소동이 일어난다. 가만히 뜯어보면 농민의 삶의 전과정일 것 같다. 녹두꽃, 파랑새... 동학농민전쟁을 지도한 전봉준이 연상되지만 그도 역시 농민이 아닌가? 녹두꽃, 파랑새, 들불같은 농민은 그 이전에도 적지 않게 있었고, 그래서 19세기 후반 여러차례 농민항쟁으로 전개되었다.
김남주는 시의 제목을 ‘노래’라고 하였다. ‘죽창가’로만 알아왔기에 ‘죽창의 노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할 수도 있지만 김남주는 훨씬 생각이 깊을 듯하다. ‘녹두꽃의 노래’ ‘파랑새의 노래’ ‘들불의 노래’ ‘죽창의 노래’가 모두 어우러진 ‘노래’였다. 그리고 각연마다 ‘꽃이’ ‘새가’ ‘불이’ ‘죽창이’라고 추임새를 넣어 제목그대로 노래가 절로 나오는 시이다.
‘죽창가’는 김경주라는 화가(음악에도 조예가 깊은)가 본래의 시를 그대로 사용하여 아름다운 곡조를 붙여서 만든 노래의 이름이다. 본래 시를 거의 그대로 사용하여 노래를 만들었다. 그만큼 ‘노래’라는 시가 한 글자도 소홀하게 여길 수 있지만 또 간결하면서도 시 그대로가 노래처럼 만들어졌던 것이다. 단 한 부분이 바뀌었는데 마지막 연에서 ‘가슴으로’가 ‘가슴에’로 바뀌었다. 단 한 글자이지만 자꾸 되뇌여 보면 작은 변화는 아닌 듯하다. 은유적인 시가 직설적인 노래로 바뀌는데 크게 기여한 게 아닐까?
또 하나 작곡자는 제목을 ‘노래’라는 시 제목을 그대로 쓰지 않고 ‘죽창가’라고 붙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점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죽창가’라고 이름붙였기에 ‘녹두꽃의 노래’ ‘파랑새의 노래’ ‘들불의 노래’ ‘죽창의 노래’으로 이어지는 본래의 시가 포괄하는 세계에서 마지막 한쪽만을 강조함으로써 크게 축소된 감이 있다. 또 하나는 이 노래는 우리 사회의 현장에서 ‘죽창의 노래’가 절실했기에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실제로 1980년대 많은 시위 현장에서 많이 불리웠다. ‘죽창가’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농민들의 고된 삶과 아픔, 분노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마지막에 죽창을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는데 대한 반발심일 것이다.
농촌과 농민들의 삶은 신경림 시인이 참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김남주의 이 시는 신경림 작품과도 잘 통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