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
을미년 벽두에 우리를 흥분시킨 붉은 바람은 호주에서부터 불어왔다. 우리의 태국전사들이 아시아축구대회결승전에서 2:1로 석패했다는 소식이다. 젊은 우리 선수들은 아쉬움에 펑펑 울었다. 그들의 눈물은 늙은 내게도 전이되어 아내 몰래 눈물을 닦아야 했다. 그들의 눈물도 눈물이거니와 이역만리 호주하늘아래 휘날리던 엄청난 우리 국기가 내 젊은 날을 다시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내 나라는 공기와 같은 것이어서 국내에 있을 때는 그 고마움과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데 외국에 나가면 늘 그리워지고 애국가를 듣거나 국기를 보면 울컥하며 코등이 아려온다. 젊음을 주체하지 못하던 스무 살 청년이 생사가 불분명한 이국의 전선에서 국가의 지엄한 명령을 수행하면서 어머니가 그리워 향수병을 앓았던 그 시절 우린 진정 조국이 무엇인지 몸으로 깨닳아갔다. 그래서 혹자는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했었나 보다. 격전을 치룬 우리 선수들이 귀국하고 중계방송을 하던 방송국에서 마침 ‘불멸의 명승부’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하는데 그제목이 ‘1994년 히로시마의 기적’ 이다.
1994년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개최되었던 아시아게임에서 우리의 여자배구팀이 선전하여 건국이래. 구기 종목 첫 금메달을 획득하는 가슴 짜릿한 순간을 당시 우리 낭자군의 사령탑이었던 김철용 감독(현 해설위원)과 당시 선수로 뛰었던 장윤희 해설위원이 당시의 감격스런 영상을 실감나게 해설해 주는 화면이다. 우리의 낭자군은 거함 중국을 격파하고 숙적 일본을 맞아 내리 2세트를 내주고 마지막 한 세트만 남기고 패색이 짙은 벼랑 끝에 서있었다. 일본은 아시아 최강을 자랑하며 중국을 상대로 결승전을 치루게되리라 예상해서 한국정도는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2세트를 선취해서 우승을 확신하고 있었다. 객관적인 실력으로 우리는 일본의 상대가 아니었던 때이니 우린 진다고해도 잃을 것은 없었지만 우리의 낭자군은 한일전이라는 숙명의 한판을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게 된다. 당시 선수였던 장윤희 해설위원은 “우리는 이를 갈았다.”고 회상한다. 코트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질 수는 없다는 오기가 그녀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고 김철용감독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배수진을 친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마치 신립장군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던 그 비장한 마음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정신무장으로 하나가된 우리의 태극낭자군은 몸을 내던지는 투혼으로 그들의 강 스파이크를 받아내고 그들의 진영을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 3점만을 내주고 3세트를 뺏어온 우리 팀은 내친김에 4세트 5세트를 확보하면서 마침내 대 역전극을 연출하며 ‘히로시마의 기적’을 완성한다. 20년 전의 스포츠 경기였지만 또 한 번 눈물을 흘려야 했다. 상대가 일본이었기 때문이라는데 누가 이의를 달겠는가? 우리에겐 어쩌면 태생적으로 일본에게만큼은 질 수 없다는 DNA가 우리의 혈관 속에 잠재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비록 스포츠 경기이지만 일본을 병적으로 싫어해서 어웨이 경기에서 일본팀의 입국을 불허함은 물론이고, 우리 축구팀이 일본원정을 가면 ‘반드시 이기고 오고, 지며는 현해탄에 몸을 묻으라.’고 했다는 일화(逸話)는 아직도 각종 스포츠경기의 한일전 때마다 회자되고 있다. 듣기 좋은 말로 ‘숙명의 라이벌’이라고 하지만 이 쯤 되면 라이벌이라는 표현으로는 어딘가 2% 부족한 감이 든다. 어찌 이승만 전 대통령만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민족의 피맺힌 恨의 소극적 표출이었을 것이다.
일본에 대한 恨이 어찌 없으랴 가깝게는 일제36년으로부터 멀게는 임진왜란을 어찌 우리민족이 잊을 수가 있는가? 어쩌면 우리들의 가깝고 먼 친족, 조상님 중에 그들의 만행으로 희생된 어른들이 없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 할 것인가? 그들의 침략이 있을 때 마다 이 나라의 민초들은 하나가 되어 들불처럼 일어나 저항했고 마침내 불꽃이 되어 산화했다. 조정의 고관대작들이 당리당략에 빠져 정쟁을 일삼고 있을 때 이 강산 우리 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생명을 던지기를 서슴치 않았던 민초들이 그 얼마였던가? 우리는 그들을 의병(義兵)이라 부른다. 그 선봉에서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던 의병장 중에 중봉 조헌 선생이 있다.
선생은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의병장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과 함께 임진왜란 4대 의병장이며, 임란4충신의 한 분으로 국가존망의 기로에서 의병7백을 이끌고 금산전투에서 700의병과 함께 장열하게 산화한 구국의 영웅이다. 선생은 문신이고 유학자였으니 이른바 선비다. 조선사회의 주역은 사대부 선비이니 자신의 영달만 생각한다면 더 좋은 조건에서 일생의 부귀영화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소싯적에 지독하게 가난을 경험했으니 보통의 요즘사람이라면 시류에 편승해서 자신은 물론 가문과 자손만대의 부귀를 택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나 기꺼이 불속으로 뛰어든 선생의 고귀한 희생은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지향하는 올곧은 선비정신이 있었다. 선비에게 있어 선비정신은 곧 목숨까지를 포함한 자신의 전부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조헌선생은 의(義)를 실천한 선비 중에 선비라고 할 수 있다.
항일의 DNA를 물려받았다면 마땅히 기라성 같은 선비들의 선비정신도 계승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만, 자유를 방종으로 착각하여 도덕이 땅에 떨어진 이래 선비정신도 함께 실종된 요즈음이다. 선비정신이 사라진 현실에 선비가 있을리 없으니, 사회 지도층인사들에게서 선비정신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고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돌아보면 이 나라의 국부(國富)가 오늘에 이른 과정을 본다고 해도 그 밑바닥에는 민초들의 피와 땀으로 점철되지 않았던가? 파독 광부, 간호원, 베트남 참전용사들 중동의 산업 전사들을 경제의병으로 호칭한다해도 옛 선비들께서 나무람 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소위 지도층 인사들이라는 사람들에게서 선비정신이 실종되었으니 재상감이 없다. ‘이 사람은 어떤가?’ 국회에 내 놓으면 벌떼같이 일어나 속살을 파헤쳐 부적격자로 판별되어 낙마하는데 민초들의 눈으로 보면 뭐 묻은 뭐가 겨 묻은 뭐 나무라는 도토리 키 재기고, 심사하는 자나 심사받는 자나 오십보백보다. 심사하는 청문의원들도 일단 심사를 거쳐서 선발해야 마땅할 것 같아 뒷맛이 개운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