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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金光石) 다시 그리기길 (김광석 거리)
김광석 거리는 대구 방천시장내 ... 지하철 경대병원역 3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나온다. 방천시장과 둑길 사이에
나 있는 폭 3m 길이 350m 정도되는 골목길이다.
둑길 벽면에 수 많은 예술인들이 모여 김광석 벽화를 만들고 이 골목 벽화 반대쪽은
작은 가게 (카페) 들과 조각품들이 설치되어 있다. 이 거리는 예술가들이 만들고 난 후,
주말 저녁에 공연 등을 하면서 2009년 이후부터 활성화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방천시장내에는 소주를 한잔할 수 있는 먹거리 가게들이 생겨나 있다.
故 김광석 (1964 ~ 1996) 이 새롭게 탄생한 시기는 2009년이다. 대형마트들의 골목상권 침해로 전통시장들이
죽어가기 시작하자 이를 그대로 둘 수가 없어 "방천시장 문전성시 (文傳成市 프로젝트)" 가 진행되면서부터
조성된 거리 (골목) 인데 그 취지는 문화로 전통시장을 되살리겠다는 생각으로
"이장호 경북대 건축과 교수" 가 시작한 문화예술운동이다.
이젠 전국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고 특히 모방송국의 프로그램 "히든 싱어" 에서 고인과 모창자들의 대결이 벌어져
"김광석거리" 가 알려짐으로 해서 더욱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방천시장은 1960년대에는
세방천시장내 쌀집과 떡방아간으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소규모의 가게 약 60여개가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한다.
고 김광석처럼 그들의 재능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화사한 꽃을 피우기도 전에 사라져 간 가수들이 있다.
"이름모를 소녀" 로 유명한 故 김정호, 그리고 "내사랑 내곁에" 로 유명한 故 김현식 ...
왜 이들은 30대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져야만 했을까 ?
◎ 故 김광석 (金光石)
김광석은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로 1964년 1월 22일 대구광역시 남구 대봉동 (지금은 중구 대봉동) 에서 태어났는데
이 곳은 방천시장에서 버스로 10분거리이다. 그의 데뷔는 19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 앨범 "산하" 로 하였다.
그는 1984년에 김민기의 음반에 참여하면서 데뷔하였는데 이 후 동물원의 보컬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일반 대중에까지
알렸으며 동물원 활동을 그만둔 후에도 통기타 가수로 큰 인기를 누렸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96년 1월 6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그의 일생을 마쳤다.
그의 대표곡으로는 "사랑했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곳", "서른 즈음에", "그날들", "이등병의 편지", "먼지가 되어" 등이
있으며 2007년에 그가 부른 노래 중 하나인 "서른 즈음에" 가 음악 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었다.
그 후 2008년 1월 6일에는 12주기 추모 콘서트와 함께 노래비 제막식이 열렸는데
노래비는 대학로의 학전 블루 소극장에 세워졌으며 조각가 안규철이 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0년에는 그가 태어난 대구 대봉동 방천시장에 그를 기리는 "김광석 거리" 가 조성되어
350미터의 길에 김광석의 삶과 노래를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들이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그는 1964년 경상북도 대구시 대봉동 방천시장 번개전업사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창신동(현재는 종로구 관할)으로 이주하여 창신초등학교, 경희중학교, 대광고등학교를 나왔으며
중학교 시절 현악부 활동을 하였고 이때 선배들로부터 바이올린을 다루고 악보를 보는 법을 배웠고
대광고등학교 시절 합창부로 활동을 하면서 음악적 감성을 키웠다고 한다.
1982년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대학연합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민중가요를 부르고
선배들과 함께 소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였다. 1984년 12월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1985년 1월 입대하였으나 군 생활 중 큰형(김광동)이 사망함으로 인해 6개월 단기사병(방위병)으로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였다. 그 후 복학해 다시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 합류하여 1, 2회 정기공연에 참여하게 되며
1987년 학창시절 친구들과 함께 동물원을 결성해 동물원 1집과 2집을 녹음하였다.
그리고 동물원을 나온 뒤 1989년 10월 솔로로 데뷔하여 첫 음반을 내놓았으며, 이후 1991년에 2집, 1
992년에 3집을 발표하였고 1994년에 마지막 정규 음반인 4집을 발표하였는데 정규 음반 외에 리메이크 앨범인
다시부르기 1집과 2집을 1993년과 1995년에 각각 발표하였다. 특히 그는 1991년부터 꾸준히 학전 등의 소극장을
중심으로 공연하기를 좋아했는데 1995년 8월에는 1000회 공연의 기록을 세웠었다.
1996년 1월 6일 자택에서 전깃줄로 목을 매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시신을 화장한 후 사리 9과가 나와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부인은 타살이 아닌 자살이라고 주장을 했지만
가족 및 지인들은 의혹을 제시하기도 했다.
김광석 자살에 대한 보도에 따르면 김광석 (당시 32살) 은 1996년 1월 6일 오전 4시 30분경 서울 마포구 한 빌딩
자택의 계단에서 전기줄로 목을 매 사망했으며 이를 김광석 부인이 직접 발견했다고 되어 있다.
물론 타살의혹(?)또 있었지만 그 의혹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광석 사망보도에 나타난 김광석의 자살이유는 1995년 11월 미국을 다녀온 김광석이 유?을 꿈꿨으나
이를 반대한 부인과 갈등을 빚은 것이 그의 자살원인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살인데도 유서가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자살이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그가 사망한 뒤 2005년 11월 김광석부인 서해순씨가 시아버지 소유의 음반
저작인접권 (가수가 자신이 부른 노래에 대해 갖는 권리) 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3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이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했던 바가 있다.
그 이유는 故 김광석이 죽기전에 자신의 저작인접권을 아버지에게 양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광석 사암후 부인 서해순씨가 딸과 함께 상속인의 권리를 요구해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소송이 벌어진 것이다.
그 후 김광석부인과 시아버지 양쪽은 소송을 취하앴는데 김광석의 다시부르기 음반 4장의 저작인접권을
시아버지가 갖는 대신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모든 권리를 김광석씨의 딸에게 양도한다는 합의를 하고는
시아버지가 사망하면 모든 권리를 김광석의 딸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의 합의를 하고 소송은 취하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도 4차례에 걸친 소송이 있었고 그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에 시아버지는 2004년 돌아가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