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41. 한국의 불교수용
三國 ‘전륜성왕의 이름으로’ 불국토를 꿈꾸다
1. 고구려의 불교수용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고구려가 불교를 받아들인 372년은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소수림왕의 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것이 불교를 수용하기 바로 1년 전인 371년이었고, 유교의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하고 율령을 반포한 것은 372년과 373년이었다. 이러한 나라의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고 내치를 다지기 위해서 고구려는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는 372년 들어온 전진의 승려 순도와 374년 들어온 아도를 위해서 375년 성문사와 이불란사를 지었다.
소수림왕 국난 타개책으로 도입…광개토왕 전국 보급
물론 고구려에는 불교수용 이전 불교가 전래되어 있었다. 중국의 스님 지둔도림이 고구려의 스님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것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래의 단계를 거친 후 소수림왕대 불교가 수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진>고구려 스님이었던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곳이 바로 구미 도리사다. 사진은 도리사에 모셔진 아도화상의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소수림왕을 이어 불교를 널리 보급시킨 왕은 광개토왕이다. 광개토왕은 영락 2년(392)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란 교서를 내리고 종묘와 사직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영락 3년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영락 2년의 교서는 불교를 널리 보급하려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고, 평양에 절을 세운 것은 고구려 불교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서 였다. 나아가 평양천도의 사전 조치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광개토왕은 남방의 평양뿐만 아니라 북방의 요동지역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요동에는 ‘육왕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의 ‘육’은 ‘아육왕’으로 곧 역사상 불교의 이상적인 군주인 전륜성왕으로 불리는 인도의 아쇼카왕을 말하며, 육왕탑은 그가 세웠던 탑을 말한다. 지금은 없어진 육왕의 탑자리에 고구려의 성왕이 육왕탑인 7층탑을 다시 세웠다고 한다. 이 육왕탑을 세운 고구려의 왕은 광개토왕으로 추정된다. 광개토왕은 요동을 점령한 이후 이 곳에 육왕탑을 세우고 자신을 전륜성왕에 비긴 것이다.
요동의 불교는 중국의 저명한 스님 담시가 이곳에서 활동함으로써 발전하였는데, 그 발전의 정도가 고구려의 불교가 담시로부터 비롯됐다는 말이 생길정도였다. 광개토왕의 불교홍포의 의지는 ‘영락’이란 연호에도 반영되었다. ‘영락’은 ‘열반의 영원한 즐거움’이란 뜻으로, 영락 2년의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는 교서와 함께 광개토왕의 치세를 상징하는 연호였다.
고구려 초기불교의 구체적인 사상내용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지만 고분벽화 등에 나타난 불교적 요소를 감안하면 미륵신앙적 요소가 강하다고 한다.
2. 백제의 불교수용
고구려보다 10년 늦게 받아들였지만 불교이해 뛰어나
백제는 침류왕 1년(384)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인 385년 한산에 절을 세우고 10명의 스님을 배출하였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10여년 뒤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곧바로 절을 세우고 승려를 배출한 것을 보면 불교에 대한 이해가 고구려 못지않았음을 알 수 있다. 384년 백제에 불교를 전한 것은 동진의 스님 마라난타로, 그 이름으로 유추하건데 인도나 서역출신으로 생각된다. 백제의 인도불교적 전통은 성왕대 인도에서 겸익과 더불어 범본 율장을 가져온 배달다삼장으로 이어진다.
<사진>마라난타스님은 백제에 불교를 전한 중국 동진의 스님이다. 영광군과 백제불교최초도래지 기념사업회는 최근 백제불교 최초도래지인 전남 영광 법성포의 성역화 사업을 마무리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침류왕은 한산에 절을 세운 그해 죽게 되는데, 이를 두고 불교 수용에 반대 입장을 가진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왕위는 침류왕의 동생 진사왕에게 넘어갔다가 다시 침류왕의 아들인 아신왕으로 이어졌다. 아신왕은 392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는 교서를 내려 아버지 침류왕의 불교수용의지를 이어나갔다. 고구려 광개토왕도 392년에 똑같은 교서를 내린 바 있는데, 백제와 고구려는 불교수용이후 불교의 우이(牛耳)를 잡는 경쟁체제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웅진시기 6세기 성왕대 이르러서야 웅진에 대통사를 세웠다는 내용으로 불교가 재등장한다. 이를 빌미로 한때 <일본서기>에 보이는 백제 출신의 스님 관륵의 말을 인용하여 백제의 불교 수용은 5세기 말이나 6세기였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관륵이 강조한 5.6세기의 불교는 불교 수용단계가 아닌 6세기 겸익이 정리한 율의 보급단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백제는 남조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고구려 스님 도림을 통해서 북조의 불교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백제 한성시기 불교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상의 추측밖에 할 수 없지만, 웅진시기에 이르면 법화신앙과 계율이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성왕이 창건한 대통사는 종래 중국 양나라 무제를 위해서 지어진 사찰이라고 알려져 왔지만, 실은 <법화경>의 대통불과 관련 있는 절이었다. 불경에 의하면 대통불의 아버지는 전륜성왕이고 대통불의 아들은 지적과 석가모니 법왕(法王)이다. 백제사에 의하면 백제의 성왕은 아들 위덕왕을 위하여 대통사를 창건하였고, 성왕의 손자로 법왕이 있었다.
3. 신라의 불교수용
고구려, 백제의 불교수용 경위에 대해서는 기록이 불비하여 그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지만, 신라의 경우는 기록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있어 대체적인 윤곽을 살필 수가 있다. 신라의 불교 수용은 법흥왕 14년(527년) 이차돈의 순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왔지만, 불교전래의 역사는 상당히 거슬러 올라간다.
‘이차돈 순교’ 100여년 전부터 외교 통해 부처님 접해
고구려 광개토왕이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는 교서를 내린 그해(392) 신라의 실성이 고구려에 인질로 머무른 적이 있으며, 415년 광개토왕의 상례를 치르는데 사용한 그릇이 신라의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되었다. 이렇듯 신라는 불교 수용 100여년 전부터 고구려와의 외교관계 속에서 불교에 접한 것으로 생각된다. 선산이나 순흥 등 고구려와의 교통로 상에 위치한 지방에서도 불교를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모례와 같은 불교신자와 묵호자, 아도 등의 스님이 주로 활동하였다.
알게 모르게 알려진 불교는 신라 궁중에 승려를 둘 정도로 많이 퍼져 나갔다. <삼국유사> 사금갑조에는 비처왕(479~500)때 무속신앙의 대표자 격으로 추정되는 노옹(老翁)이 까마귀, 쥐, 돼지를 등장시켜 왕으로 하여금 궁주와 간통 중인 내전의 분수승을 활을 쏘아서 죽인 사건이 있었다. 노옹과 동물의 무리들로 상정되는 무속신앙 신봉자들은 불교 수용에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며, 법흥왕때 이르게 되면 불교수용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맞붙게 된다. 한편 법흥왕의 불교수용 이전 신라는 순장을 금하고, 상복법을 제정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유교적 예속이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영일 냉수리비와 울진 봉평비를 통해서 소를 희생물로 하여 서약을 하고 있는 유교적 예속의 구체적 사례도 볼 수 있다.
법흥왕의 불교수용은 위와 같이 무속신앙과 유교적 예속에 입장에 있던 두 부류의 세력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충돌의 심각성은 이차돈의 순교가 대변하고 있다. 법흥왕이 불교를 일으키고 이차돈이 순교한 527년은 보통 신라의 불교수용(공인)연대로 알려져 있지만, 법흥왕이 불교를 일으킨 구체적인 실상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법흥왕과 이차돈이 단지 흥륜사를 짓는 것과 관련하여 이차돈이 순교를 하였다면, 불교를 수용한 몇년만에 절을 창건한 고구려와 백제의 사례와 비교할 때, 불교를 반대한 입장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너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즉 단순히 흥륜사란 절을 짓는데 무속신앙과 유교예속의 입장에서 그토록 강하게 반대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유교입장에서의 반대는 법흥왕이 흥륜사를 창건하려한데 대한 반대가 아니고, 법흥왕의 사신(捨身)에 대한 강력한 반대 입장의 표명으로 생각된다. 이차돈도 법흥왕의 흥륜사 사신에 맞춰 기존의 흥륜사를 확장해려 했던 것은 아닐까. 흥륜사의 확장은 기존 무속신앙의 중심지역인 천경림의 훼손을 가져왔고 이에 대한 무속신앙 세력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527년 법흥왕의 사신을 둘러싼 흥륜사 확장 공사는 유교와 무속의 양쪽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했고, 이차돈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순교를 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교해 불교수용이 늦었던 신라는 그것을 만회라도 하듯 불교의 교리를 교조적으로 이용하고 석가족의 왕손이라는 골족의식을 강조하였다. 진흥왕은 자신의 아들에게 동륜과 철륜(진지왕)이라는 전륜성왕의 이름을 지어줬으며, 진평왕은 자신을 석가의 아버지로 자처하기도 하였다.
4. 전륜성왕과 부처
지금까지 지면의 제약도 있었지만 삼국의 불교수용을 다루면서 귀족이나 백성들의 입장을 많이 반영하지 못하고 왕의 입장에서 주로 살펴보았다. 불교는 자신의 현 위치나 미래의 위치를 하늘에서 주어졌다는 수동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쌓은 업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능동적 입장에서 바라보게 하는 종교이다.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최고의 통치자인 왕의 입장에서, 시시각각 변해가는 국내외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능동적 입장의 세계관인 불교가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삼국 광개토왕-성왕-진흥왕 저마다 “내가 전륜성왕”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은 불교를 받아들인 삼국의 왕들이 이상적인 왕으로 여겼던 모델이었다. 사찰을 건립하고 불상을 모시고 불공을 드리는 의례 속에서 왕과 귀족의 서열이 자연스럽게 드러났고, 나아가 초월적인 존재로까지 부각될 수 있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요동에 ‘육왕탑’을 세워 자신이 전륜성왕임을 내세웠고, 백제의 성왕은 자신을 전륜성왕임을 자처하며 그 아들인 대통불(위덕왕)을 위하여 대통사를 창건하였으며, 신라의 진흥왕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전륜성왕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삼국의 왕들은 부처님을 대신하는, 부처님을 기다리는 세간의 불국토를 이루고자 하였다.
조 경 철 / 한국학중앙연구원 동아시아역사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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