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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돌아오면 삽니다! (삼상 7;3-14)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져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예뻐요.
그대는 세상에서 가장 멋져요. 그대는 세상에서 가장 예뼈요.
아싸! 감동충만, 아싸! 성령충만, 아싸! 행복충만
축복의 주인공이 됩시다.
축복의 통로가 됩시다.
축복의 근원이 됩시다.
대전에서는 지하철을 탈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가면 지하철을 많이 타게 됩니다.
그러면 한 번 여쭈어 봅시다.
숙녀들이 좋아하는 역은 어떤 역일까요? = 신사역
여성들이 좋아하는 역은 어떤 역일까요? = 남성역
그러면 노처녀들이 좋아하는 역은 어떤 역일까요? = 종각역, 총각이나 종각이나 거기서 거기 아니겠어요.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나온 사람을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일 본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은 넘어뜨리지 않습니다.
일어서려는 자에게는 반드시 지팡이를 줍니다.
하나님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나를 넘어뜨립니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항상 긍정적인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웃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칠전팔기(七顚八起)의 삶을 살려고 하면 매사에 웃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웃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느 부부가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성화로 마지못해 다녀온 ‘웃음치료’ 강좌에서 일상생활에서 독특한 웃음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전기스위치, 문 손잡이, 냉장고 손잡이, 청소기 등등에 스마일 스티커를 붙여두고 그것을 만질 때마다 큰 소리로 웃는 것입니다.
아내와 5살 난 아들은 그것이 재미있는지 집안에서는 항상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별 흥미가 없는 남편은 가끔 아들의 강요로 ‘허허’하고 힘없이 억지로 웃어주는 정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와 크게 대판 싸우게 됩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등이 꺼졌다 켜졌다 반복하는 것입니다.
주변을 살피니 아들이 전등스위치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기죽은 목소리로 ‘하하하... 하하하...’ 하며 억지 웃음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싸우지 말고 웃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부는 진심으로 크게 웃었습니다.
그러자 왜 싸웠는데 그 싸운 이유가 뭔지도 모르겠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웃는 것입니다.
웃는 사람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웃으면서 시작합니다.
하하하하 호호호호 헤헤헤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미 종교성이 강한 민족입니다.
우리나라 조상이 누구라고 하지요.
단군(檀君)의 후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단군이 실존인물이기도 하지만 이런 뜻도 갖고 있습니다.
남자무당을 박수라고 부르는데 박수들의 대장을 단이라고 부릅니다.
군은 임금을 말하지요.
그래서 단군은 남자무당들의 대장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단군의 후손이라고 할 때는 무속을 섬기는 민족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을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고 부르지요.
무당에는 백무(白巫)와 흑무(黑巫)가 있습니다.
백무는 좋은 일을 가져다준다는 귀신을 섬기는 무당이고, 흑무는 재앙, 저주, 질병 같은 것들을 가져다주는 귀신을 섬기는 무당입니다.
그래서 백무가 입은 옷을 백의라고 부르고, 흑무가 입는 옷을 흑의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백무가 입는 하얀 옷을 입는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귀신을 섬기는 민족이라는 뜻이지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명절이나 기일에 무엇을 하지요.
제사를 드립니다. 차례를 올린다고 하지요.
제사는 조상에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조상의 이름으로 찾아오는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입니다.
후손들이 그 조상을 위해서 제사를 올리지 않으면 조상이 배가 고파서 떠돌다가 후손들에게 재앙이나 저주를 내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상들이 노여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제삿날에 제사상을 차려서 귀신을 달래는 것입니다.
물론 기일이나 명절에 죽은 부모나 조상들을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좋은 일이지만 좋은 일로 끝나지 않고 귀신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방을 써서 올릴 때에 반드시 무엇이라고 써서 올려야 하는지 아세요.
000 신위라고 써서 올립니다.
신위라는 말을 한자로 神位라는 씁니다.
곧 귀신들 앞에 올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본래부터 종교성이 아주 강한 민족입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각종 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들, 그 종교를 버리고 하나님 앞으로 나와서 예수님을 믿어야 산다고 전도한다고 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내용이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전히 하나님만을 섬겨야 될 백성들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민족을 하나님께서 이끌어냅니다.
가나안 땅을 줍니다.
그러면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제사장가문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에 영적으로 어둠이 폭풍처럼 밀려와서 하나님을 떠나고 이방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 가문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깨우쳐야 되는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전혀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되는지를 백성들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어둠이 몰려왔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가나안의 신들, 농업의 신이라고 하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자신들이 섬겨야 될 신으로 알고 섬기는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블레셋 족속과의 전쟁할 때 가지고 가서는 안 되는 여호와의 법궤를 전쟁터로 옮겨갑니다.
법궤가 이스라엘에게 있으면 하나님께서 전쟁을 승리케 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전쟁에서 대패를 당하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음을 당하고, 법궤는 빼앗기고 맙니다.
법궤가 빼앗기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느하스의 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뜻으로 이가봇이라고 부릅니다.
빼앗겼던 법궤가 블레셋의 여러 도시를 끌려 다니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블레셋의 다곤 신을 비롯하여 블레셋 백성들을 혼내 줍니다.
그래서 법궤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는데 실로성막으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 집으로 옮겨져서 20년 동안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러한 상황이 계속 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이스라엘의 영적인 지도자로 우뚝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 때 사무엘의 나이가 대략 20세 정도 넘긴 청년의 때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지도자로 세움을 입은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백성들에게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3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고 선포합니다.
곧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없는 상황들입니다.
그 이유들은 지금까지 바알과 아스다롯을 너무나 친숙하게 잘 섬겨왔어요.
자기들이 평안하게 잘 사는 것은 농업의 신들이 잘 도와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신들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신들이 노여워서 저주할까봐 두렵습니다.
신들이 저주하면 블레셋 족속에 의해서 지금까지도 고통을 당했는데 더 많은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귀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은 귀신들이 한 번 뿔따구 나서 노여워하면 큰 화가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집안에 있는 부적이나 달마도사 그림이나 우상을 섬기는 글씨, 그림, 도구 앞에 항상 벌벌 떱니다.
불상이나 장승이나 온갖 것들을 누가 만들었지요?
귀신들이 직접 만들어주나요? 아니면 사람이 만드나요?
사람이 만듭니다.
사람이 만들어놓고 어떤 신기한 능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섬기면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불상을 만들어놓고 그 불상이 무슨 큰 능력이나 주는 것처럼 섬깁니다.
나무들을 가져다가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는 험상 굿은 장승을 만들어놓고 그 장승들이 악귀에게서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톱으로 장승들을 잘라버리면 우두뚝 잘라져 나갑니다.
도끼로 찍어버리면 찍혀 나갑니다.
아무런 반응을 못합니다.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요즘은 등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산에 올라가서 보면 돌탑들을 많이 쌓아놓았지요.
왜 돌탑을 쌓아놓지요.
그 돌탑이 복 준다고 믿기 때문에 돌탑을 정성껏 쌓아올리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돌탑을 보면 그 돌탑을 무너뜨려버려야 합니다.
돌탑이 무엇이라고 복을 주겠습니까?
그런데 그 불상이나 장승이나 돌탑같은 것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깨뜨려버리면 귀신들을 노여워해서 큰 화를 당한다고 생각하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깨뜨려버리면 그 신들이 노여워서 진노하여 재앙, 저주가 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두려워서 그 신들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런가하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해 주신 것이 무엇이 있나? 모두가 농업의 신들이 해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까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면서 지금까지 잘 살았는데 왜 이들을 제거하고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까?
세상에 신이 여호와 한 분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신을 섬기든지 섬길 신을 선택하는 것은 백성들의 자유로운 의사가 아닙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잘 보이는 바알, 아스다롯이 더 좋습니다.
이렇게 좋은 신들,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면서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는데 왜 이들을 제거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고 하시나요?
우리들이 섬길 유일한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과 아스다롯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블레셋 족속에 의해서 우리들은 멸망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신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기 조상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하나님께서 불러내셔서 가나안 땅을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하면서 갈등하고 고민합니다.
“하나님, 좀 편하게 살면 안 됩니까? 꼭 이렇게 힘들게 고민하면서 살아야만 하나요?”하면서 갈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고민과 갈등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고민과 갈등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처럼 지금까지처럼 여전히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다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찾아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까지 아주 친밀하고 친숙한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거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에 의해서 재앙과 저주를 당하여 농업이 잘 안되고, 실패하고, 망할지라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려고 결단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믿고 있던 신들로 인하여 재앙을 받아서 고통을 당하고, 불안하고 매사가 잘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해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지금까지 섬기던 신들로 인하여 무섭고 두려워도 하나님 앞으로 나오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여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백성들을 도와주고 싶어하십니다.
바알이나 아스다롯으로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능력으로 도와주십니다.
늘 언제나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려고 결단하고 자신들과 친밀하던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특하시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반드시 이방신들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은혜를 주시고 싶어하십니다.
바알들과 아스다롯이 형편없이 무기력한 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들과 아스다롯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이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4절에서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사무엘에게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여서 큰 성회를 열라고 합니다.
사무엘은 미스바에 모인 백성들에게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종일 금식하게 합니다.
물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온전히 금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하면서 대대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은 회개하여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것들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어떤 축복을 하실까요?
① 제사, 번제를 열납하십니다. 바알이나 아스다롯은 응답하지 않고 요구만 합니다.
②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기도 응답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③ 블레셋 족속과의 전쟁에서 승리케 합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십니다.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④ 블레셋 족속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운 존재로 여기게 되어 다시는 침범하지 못하게 됩니다.
⑤ 블레셋 족속에게 빼앗겼던 성읍을 다시 찾아오게 됩니다.
⑥ 전쟁이 없으니까 평화가 찾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면 하나님은 상상을 초월할 수 있는 놀라운 축복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합니다.
곧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만 예배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럴 수 없는 여건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미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불교, 유교, 무속을 비롯한 각종 종교에서 이미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꼭 교회 나와서 하나님만 믿어야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착하고 선하게 살면 되지 않습니까?
꼭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을 믿어야만 합니까?
우리 집 주변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을 보면 정나미가 떨어져서 교회 근처에도 가기 싫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꼴도 보기 싫습니다.
이렇게 반항하고 반기독교적인 생각과 반감으로 가득차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 영혼을 사랑하여 구원하고 싶어하십니다.
그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의 독생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며 구원을 베풀고 싶어하십니다.
요한복음3:16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그 영혼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수없는 전도자들을 보내십니다.
어떤 때는 품어주시기고 하고, 어떤 때는 꿈에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매운 매로 때리기고 하고, 어떤 때는 질병을 주기도 하면서 부르십니다.
어떤 때는 크고 놀라운 은혜를 주시면서 이미 믿고 있는 이방신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나고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주십니다.
오직 하나님 앞으로 나와서 예수님을 믿는 길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을 믿으면 산다는 믿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이지요?
다같이 해 봅시다.
“돌아오면 삽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면 삽니다.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앞으로 나오기로 결단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온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① 구원의 확신을 주십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면 아무 것도, 그 어떤 것들도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습니다.
②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자신의 편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든든하고 담대해지고 당당해집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합니다. 마음이 편하니까 행복합니다.
③ 항상 웃을 수 있고 웃음꽃이 활짝 피기 때문에 어떤 질병과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웃을 수 있습니다.
웃음은 질병을 이기는 힘을 줍니다.
질병을 치료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응답받아서 어떤 질병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면 그 사람은 삽니다.
결코 축복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은 주일낮예배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했듯이 주일낮예배는 모든 예배의 대표이고, 꽃이고, 열매입니다.
모든 예배의 근본이고, 시작이며 끝입니다.
그러므로 주일낮예배에 매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일낮예배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축복하시고 은혜주시고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주일낮예배에 매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일낮예배에 올인하는 것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주일낮예배에서 자신의 예배자리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일낮예배에 앉아야 될 자신의 자리를 사탄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주일낮예배시간에 내가 앉아야 할 자리에 내가 앉아 있지 않으면 그 자리에 사탄이 와서 앉아 있게 됩니다.
그러면 주일낮예배를 통해서 받아야 할 복을 사탄에게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낮예배만이 진짜 예배입니다.
주일낮예배를 드리지 않고 저녁예배, 수요일예배, 금요일예배를 드려도 말장 도루몽이 됩니다.
반드시 주일낮예배를 드리는 사람만이 믿음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요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주일낮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주일낮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는 영혼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일낮예배는 주일 아침에만 준비하여 참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낮예배는 일주일 내내 준비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일낮예배를 드렸으면 이제부터 다음 주일낮예배 참석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면 드라마가 끝날 때쯤 되면 예고를 하면서 안 보면 안 되도록 만들어놓지요.
그래서 그 다음 드라마를 기다립니다.
그런 것처럼 오늘 주일낮예배를 드리면 다음 주일낮예배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음 주일낮예배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죄악에 빠질 수 없습니다.
주일낮예배를 사모하며 그리워하는 사람은 항상 주님만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삽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께서 주일낮예배를 잘 드릴 수 있는 은혜와 믿음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헌금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은행에 가서 새돈, 신권으로 바꾸어 놓아야 합니다.
옛날 고육영수 여사는 지폐가 생기면 다리미로 깨끗하게 다렸다고 합니다.
그만큼 돈의 소중함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기 때문에 깨끗한 돈으로, 신권으로 바꾸어놓았다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정성입니다.
그런가하면 아이들에게도 주일낮예배에 대하여 좋은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일주일 내내 좋은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주일낮예배를 드리면 달콤한 사탕을 준다는 느낌을 갖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전에는 주일낮에 아이들 먹으라고 사탕을 사다놓았는데 어른들이 먹어 버려서 사탕을 사다놓지 않습니다만 아이들에게 주일낮예배를 드리면 달콤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토요일 늦게까지 TV를 보지 말고 일찍 온 가족이 기도하고 잠 자는 것이 좋습니다.
부부싸움도 좀 자제하고 오직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잠을 자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주일낮예배를 참석하여 자신의 예배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온전하게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주일은 일주일 삶의 시작이고, 대표이기 때문에 주일에 주님께 드림으로 온전하게 일주일 내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요한삼서1;2의 말씀의 축복으로 역사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5중 복음이 있습니다.
중생의 복음, 성령충만의 복음, 신유의 복음, 축복의 복음, 재림천국의 복음을 5중 복음이라 하는데 주일낮예배를 잘 드리는 이들에게 5중 복음의 축복을 줍니다.
그런가하면 3중 축복이 있습니다.
3중 축복은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일낮예배에 매진하여 헌신하며 예배를 잘 드리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우리들이 지금 살아가는 현재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까지도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지켜주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러면 축복은 우리들의 것입니다.
따라 해 봅시다.
“축복은 우리들의 것이다.”
그렇습니다.
축복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은 우리들의 것입니다.
축복이 우리들의 것이 되면 자연히 우리는 축복의 주인공이 됩니다.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축복의 근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넘치도록 받아서 기쁨과 행복으로 넘치게 되는 축복과 은혜로 가득 채워지시는 우리 산성교회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야베스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