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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이사야 51:1~6
우리가 지난 주일 저녁 예배 때 보았듯이 선지자는 오늘 본문 말씀 직전에 여호와의 종의 노래 단락을 기록한 바 있습니다. 고난당하시는 여호와의 종에 대한 예언의 내용을 보면 그는 고난 중에도 의연하게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며 때리는 자에게 자기의 등을 내밀어 주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자기의 얼굴을 맡기면서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묵묵히 자기의 사명의 길을 가는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백성들 역시 흑암 중에 행하며 빛이 없을지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여호와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흑암 중에 한걸음씩 내딛는 것이 자기의 횃불을 피워올리며 자기 인생의 길을 밝히는 자보다 낫다고 선지자는 격려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소망이 있으니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위하여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소망이 확실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바벨론의 포로 생활 가운데 처하여 괴로움과 슬픔 중에 있는 하나님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이러한 말씀을 들어도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여전히 현실의 중압감에 눌려서 부정적인 마음과 슬픔 속에 지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지치지도 아니하신지 그들을 향하여 계속하여 격려와 소망의 말씀을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하면서 용기를 내도록 격려합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러한 위로와 용기를 주는 하나님의 격려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종종 자신의 현실 속에서 낙심과 침체를 경험하곤 하는데, 오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바 용기를 얻어 심리적인 압박과 근심과 슬픔을 극복하고 주님과 함께 믿음으로 전진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과거에 받은 은혜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절로부터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내린 혹독한 징계의 시련 속에서 연약해진 나머지 미래에 대하여 아무런 희망도 갖지 못하고 주저 앉아 있는 남은 자들을 향하여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갈대아 우르에서 있을 때에 그들은 자식을 낳지 못하고 홀로 외로운 처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이나 하란은 자식들이 많이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나이가 75세가 되었으나 여전히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한 채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남자가 75세가 되고 여자가 65세가 되었다면 어찌 자식 낳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르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세기 12:1~3)
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실을 보면 아브라함은 자신이나 아내 사라가 이미 노년이 되었고 자녀를 낳기가 어려웠지만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져 큰 민족을 이룬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왔고, 그의 나이 100세요 그 아내 사라의 나이 90세가 되어 경수가 이미 끊어졌는데도 기이하게 아이를 낳아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는 결코 인간의 자연적인 생식 능력으로 된 일이 아니요 완전히 하나님의 기이한 능력으로 된 것이 확실하게 보여준 후에 일어난 기적적인 잉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후손으로 번성하여 한 민족을 이루게 된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의 시작과 그들의 번성함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에서 비롯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애초에 불임의 여인 사라의 죽은 태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다 늙은 백 살의 노인 아브라함의 씨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부존재, 비존재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과 은혜로 존재하게 되고 크게 번성하여 하나의 거대한 민족으로 성장하게 된 은혜를 입은 백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편은 자기들의 처음 시작을 생각해볼 때 한없이 겸손해져야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기이한 능력을 상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빚어서 만드신 이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이삼백만 명이나 되었다면, 이렇게 징계를 받아 형편없이 약해진 상태에 있더라도 그 수가 적어도 수만 명이 넘는 유다 백성들이 다시금 부흥하고 번성하여 큰 민족을 이룰 수 있는 것이 불가능하겠습니까?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생명 없는 불임의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하여 번성한 민족을 이루어내신 하나님으로서는 얼마든지 수만 명의 유다 백성들을 통하여 얼마든지 다시 옛날의 수백 만명의 하나님 백성으로 번창하게 하실 수 있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라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를 믿읍시다. 우리의 자녀들의 미래와 나라의 장래에 대하여 인간적으로 보면 계산이 안 나오지만,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함이 없고 지혜가 무궁하십니다. 그가 기뻐하시면 얼마든지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복되게 하시기에 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 입술에서 절망의 언어를 걷어내고 이스라엘의 처음 출발했을 때의 그들을 퍼낸 우묵한 구덩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처음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도 처음에는 그렇게 볼품없고 형편없었는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축복하시고 번성하게 하시고 창대하게 해주시어 여기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돌이켜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그리고 앞날에 많은 어려움과 시련이 다가올 것이라는 전망들이 우리 생각과 마음을 짓누를 때가 많이 있을 것이지만, 우리의 미래가 우리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자원과 지혜에 달린 것이 아니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음을 항상 기억하고 그에게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기도로써 맡깁시다. 그리할 때에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 가운데 일어났던 기이하고 놀라운 축복처럼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삶에도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기이한 은혜와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의 고난 속에서 남은 자들은 이러한 의심과 불평의 마음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빼앗기고 머나먼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하는 자기들이 황무지로 변해버린 시온 땅에 돌아온다 한들 어찌 그 황무지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고 장래를 매우 비관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3절에서 이렇게 예고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가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이 말씀처럼 죄로 인하여 유다 왕국이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완전히 초토화되어서 예루살렘에 성전과 왕궁과 모든 집들이 다 불타고 성벽도 무너지고 그들이 생활하던 목초지나 감람원이나 논과 밭이 가꾸지 않아서 돌무더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이 지나는 동안 그 기름졌던 시온 땅은 완전히 황무지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바벨론에서 그 백성을 돌아오게 한 후에 이 예언대로 다시금 기름진 땅으로 바꿔지는 은혜가 임하여 돌아온 자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땅으로 다시금 변화되었으니 이 예언도 현실로 이루어졌다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모의 땅을 쁄라와 헵시바 곧 결혼한 여자처럼 기름진 땅으로 바꾸어주신다고 한 약속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g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혼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들까지도 기름지게 공급하사 평안하게 살게 해주시는 은혜도 겸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4절로부터 5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하나님은 다시금 자기 친 백성, 남은 자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말씀을 계속해주십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율법과 공의를 선포하고 실행할 것인데 그로 인하여 만민에게까지 구원의 빛이 비추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남은 자들에게 율법과 공의의 메시지 곧 하나님의 진리의 가르침을 베푸실 것이라는 말씀인데, 궁극적으로는 선지자들 중에서 완전한 선지자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생명의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시고 그 자신이 구약의 모든 예언된 구원의 말씀을 실행하시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구원의 메시지를 완성하시고 그 구원의 진리 말씀을 땅 끝까지 증거하도록 교회에 그 복음 말씀을 맡기심으로써 이 예언의 말씀을 지금도 성취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렇게 율법과 공의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만민의 빛으로 세워질 터인데, 그것은 동시에 만민에 대한 심판이 되기도 한다고 선지자는 여기서 말씀합니다. 5절에서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라고 하신 것이 그러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복음 진리 운동은 한편은 구원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대적하고 불신앙을 고집하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미치광이의 말이라 생각하고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며 둔한 양심을 가지고 악을 행하며 죄를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은 결국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거부함으로써 그 본인이 스스로 화를 자취하고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한편으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멸망길로 가는 자들에게 더 이상 핑계를 대지 못하게 만드는 심판 행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일은 그처럼 종말론적인 행위입니다. 한 사람은 생명의 길로 다른 사람은 멸망의 길로, 한 사람은 천국 길로, 또 한 사람은 지옥 길로, 한 사람은 축복의 길로, 한 사람은 저주의 길로 가르는 개인의 종말을 결정하는 중차대한 행위이기도 합니다. 우리 전도자들은 이처럼 마치 영원한 생사 여탈권을 준 가장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장 이 지엄한 권세를 기억하면서 멸망하는 자들을 향해서는 그들의 멸망의 운명을 인한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전하고, 또 믿는 자들에게는 지극한 복을 받은 자임을 인하여 천사처럼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고 환영하고 축복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지극히 존귀한 사역을 계속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선지자는 갑자기 6절에서 묵시록적인 환상을 보았는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선지자 이사야는 율법과 공의가 만민의 빛으로 세워짐으로 인하여 마침내 때가 차면 곧 복음이 땅 끝까지 이르게 되면 이제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세상을 심판하실 기약이 차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게 되고 땅은 옷 같이 해어지게 될 것이며 거기에 사는 자들은 하루 살이같이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구원의 말씀을 들어도 믿지 아니하고 불순종한 자들은 그 때에 불타 없어지는 이 세상과 함께 하루살이가 죽는 것처럼 그처럼 비천하게 죽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주님과 사도들이 선포한 말씀 속에는 장래 온 세상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가 가득하지 않습니까? 온 세상은 장차 불로 다 살라질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그의 순교 전에 남긴 마지막 편지 마지막 부분인 베드로후서 3:10 이하에 이르기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베드로후서 3:10~15)
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담 이래로 모든 인간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더러워지고 저주로 인하여 거칠어지고 혼돈과 무질서와 슬픔과 고통이 가득찬 이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이 다스리는 완전한 평화와 질서와 행복과 생명의 세상으로는 부적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그의 백성들과 함께 세우고 하나님을 공의와 공법을 따라 섬기며 온 세상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공법이 가득차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빛나고 온전한 찬양 곧 천사들과 구속받은 성도들과 모든 피조물들이 영광을 하나님께 충만히 돌려드리는 그런 나라를 가져오시도록 옛 것을 다 불로 사르고 정화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전해진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 성을 세우시고 주의 백성들 역시 모든 죄의 세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거룩한 존재로 하나님 앞에 영광의 몸을 입고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 분명한 소망을 갖고 살아갑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율법, 그의 공의 곧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만이 참되며 그 말씀이 변치 아니하며 영원히 존재하며 그 말씀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효력이 세세토록 미침을 기억하면서 이 복음 진리를 굳게 붙들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요한일서 2:15 이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 풍조도 다 지나가고 변합니다. 우리의 모든 육신적인 성취도 이 세상과 함께 뒤로 물러가고 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따라 시대에 따라 변전하는 이 세상과 우리 자신 안에 일어나는 여러 정욕들을 따라가지 말고 오직 영원히 변치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을 순종하여 살고자 온 힘을 씁시다. 우리 힘으로는 잘 안 되지만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며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주실 것이니, 우리가 끝내 이길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