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K는 사뿐사뿐 걸어서 카운터로 가더니 명함을 석 장 가져와서 나누어 주었다. K교수는 예쁜 디자인의 명함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정통 이태리 음식점. 파스타 밸리. 대표 K은경. 전화번호 031-xxx-xxxx 명함을 들여다본 K교수는 갑자기 운명 같은 만남이라는 생각이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봄꽃은 오래 가지 못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열흘 넘게 피어 있는 꽃은 드물다. 그것은 마치 인생에서 아름다운 청년 시절이 10년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청년 시절처럼 힘이 넘치고 모든 일에 자신이 있는 질풍노도의 시절은 10년을 넘지 못한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언제까지나 청춘이라는 말은 과장법이요 소망일 뿐이다. 몸이 늙으면 마음도 따라서 늙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청춘 시절에 일도 열심히 하고 놀기도 열심히 놀고 후회 없이 보내야 할 것이다.
며칠이 지나자 이제 진달래는 지고, 노란 개나리 꽃잎도 울타리 아래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그렇게 화사하던 목련은 넓은 꽃잎이 뚝뚝 떨어져서 목련나무 아래에는 시들고 변색된 꽃잎이 수북하였다. 목련은 피어 있을 때는 아름답지만 떨어진 꽃잎은 슬프게도 추한 모습이다. 떨어진 꽃잎이 아름다운 꽃은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이다. 무궁화가 질 때에는 펼쳐졌던 다섯 조각 꽃잎이 피기 전 모습으로 오므라든 후 뚜욱 떨어진다. 무궁화꽃은 떨어져도 색깔이 전혀 변하지 않고 은은한 분홍빛 고운 색깔을 유지하고 있다.
떨어진 꽃이 가장 아름다운 꽃은 아마도 동백꽃이리라. 동백꽃은 선명하게 붉은 꽃이 피어 있던 모습 그대로 통째로 떨어진다. 동백은 겨울에 피고 지기 때문에 운 좋게 눈이라도 내리면 하얀 눈 위에 떨어진 붉은 동백꽃의 처연하게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겨울에는 곤충이 없는데 동백꽃은 어떻게 수정을 할까? 동백나무 숲에는 동박새가 산다. 길이 10cm 정도로 작은 동박새는 동백나무에 둥지를 짓고 동백꽃 꿀을 먹으면서 추운 겨울에 동백꽃을 수정시킨다.
목련꽃이 질 무렵 어느 날, 옆 연구실의 ㄷ교수가 K교수에게 점심을 같이 먹자고 제안을 했다. 지난 번에 연구과제 심사 건으로 신세진 일도 있고 해서 자기가 점심을 사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ㄷ교수는 K교수에게 ㄹ교수와 같이 가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ㄹ교수는 K교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ㄹ교수는 유전학 전공인데, 유전학을 대중에게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쓴 몇 권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꽤나 유명해진 교수였다. 왜 하필 ㄹ교수를 초대할까? 두 사람의 공통점을 생각해 보니 둘 다 강원도 원주 출신이었다. 아직도 우리 나라에서 지연이란 엄연히 살아있는 일종의 문화적인 전통이다. 같은 고향 사람이라면 웬지 말이 잘 통하고 또 초면이라도 친근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하기사 두 사람의 고향이 같다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동네 이름과 거리 이름이 있을 것이다. 또 누구 아느냐, 누구 아느냐고 두어 번만 물어보면 두 사람이 공통으로 아는 사람이 나타나는 법이니 가깝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넓고도 좁은 것이다.
지구상에는 60억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지만, 몇 사람만 거치면 이 세상의 누구와도 쉽게 연결이 된다. 어느 학자가 실험한 바에 의하면 여섯 명만 거치면 지구의 어느 사람과도 연결된다고 하는데, 이러한 이론을 ‘6단계 분리 이론’이라고 한다. 6단계 분리라는 말은 1920년대 헝가리의 작가 카린시가 쓴 <연쇄(chain)>라는 책에서 유래되었다. 카린시는 당시 지구 상의 15억 인구 중 누구라도 여섯 명만 거치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방법으로 이를 입증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