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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왕 목사
사람들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여러 가지 호기심 중에 하나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이 바로 인간이 범할 수 없는 성역이며 또한 한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같은 호기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과학 시대에도 역술인들이 일간지에 도배를 하듯 광고를 하고 가만히 앉아서 많은 돈을 벌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누가 만일 자신의 미래에 찾아오게 될 성공의 기회를 미리 알게 된다면 누구든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기다릴 것입니다. 정반대로 자신의 미래에 일어나게 될 불행스런 일에 대해서 미리 알게 된다면 누구든지 백인이면 백사람 다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하거나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미 지나간 일들을 기록한 역사서와 더불어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을 선지서와 계시록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구약에 나오는 여러 선지서들 가운데 미래에 태어날 메시아에 대해 가장 탁월하게 예언을 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의 복음서라고 별명이 붙을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으심에 대해서 마치 이미 지나간 날의 역사를 되 돌이켜 보는 것처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이 바로 그중에 하나로 미래에 오시는 메시아가 어떤 수난을 당하게 되며, 그 원인과 그 결과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매우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을 기리는 고난주간에는 오늘 성경 말씀은 단골메뉴처럼 필수적으로 언급되어지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아실현 이론의 선구자로 알려진 저명한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Maslow)는 인간의 기본욕구를 피라미드 형태의 계급구조로 이루어진 다섯 단계의 욕구로 구분하였습니다.
1) 먹고 마심에 대한 생리적인 욕구
2) 보다 안전하게 살고 하는 욕구
3) 서로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욕구
4) 인정받으며 살려는 자존감에 대한 욕구
5) 가능성을 현실화하려는 자아실현의 욕구
이 다섯 단계의 욕구 중, 생존에 가장 긴요한 생리적 욕구와 안전에 대한 욕구는 하단 부에 위치해 있으며, 심미적 특성이나 창의적 개성을 추구하는 자아실현욕구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그 같은 관찰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아실현의 욕구를 성취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일 그 가능성이 보이게 되면 크게 기뻐하고 더욱 노력을 기울이게 되지만, 반면에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 가능성이 희박하게 되면 낙망하기 쉽고 중도에서 포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는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단계에 있으며, 어떤 자아실현의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과연 그것을 이룰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이 됩니까?
1. 메시아의 고난에 대한 예언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이사야선지가 미래에 오실 메시아는 매슬로가 말한 5단계의 인간의 기본 욕구의 피라미드와 비교하여 볼 때 전혀 자아실현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1) 사람은 먹고 마시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심리적인 욕구에 반해 미래의 오실 메시아는 철저하게 외면당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 53:3)“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미래에 오시는 메시아는 이름 그대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거룩하신 분으로 인간들이 마땅히 그를 존경하고 떠받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를 싫어하고 거절하고 배척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싫어할 것이고, 보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귀히 여기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자기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를 그렇게 핍박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메시아의 외모가 너무 연약해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외모만을 보고 과소평가하고 멸시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과 달리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며 외모보다 내실을 더 중요하게 보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세계를 유심히 관찰을 하게 되면 그와 같은 원리를 쉽사리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꽃과 열매는 화려하지만 씨앗은 탐낼 마음의 없도록 볼품이 없어 오래 가며
2) 금이나 보석은 보잘 것 없는 돌 속에 감취어져 있기 때문에 그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힘들여 채광을 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으며
3) 과일의 여왕이라고 일컫는 열대 과일 두리안은 그 껍질이 갑옷과 같아서 볼품이 없으며, 그 냄새가 인분냄새처럼 역겨우나 그 맛을 아는 사람은 고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맛을 보아야만 즉성이 풀릴 정도로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로마 황제나 헤롯 대왕과 같이 위풍당당한 모습이 아니라 북쪽 나사렛 촌 동네의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신 사실을 사람들이 알면서 예수님을 더욱 멸시 천대한 것은 이사야 예언이 그대로 예수님에게 성취된 것입니다.
(막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당시 외모로 사람을 취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 것처럼 다른 사람을 대하거나 과소평가하지 말고,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처럼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각기 다른 가능성들을 씨처럼 보잘것 없는 외모 안에 감추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오늘 성경의 예언의 말씀처럼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것은그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 미래의 메시아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할 뿐 아니라 하나님에게 마저 버림을 받아 징계를 당하는 사람처럼 여겨질 정도로 혹독한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고 배척을 당하는 것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지만 실망하거나 낙망하지 않는 까닭은 그와 같은 때에 하나님께서 그 억울함을 아시고 위로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실 메시아는 그 같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을뿐더러 사람들이 볼 때 유일한 희망인 하나님께 마져 버림을 당한 사람처럼 보여 질 정도로 미래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고난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처럼 미래의 메시아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고난이 가중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볼 때는 인간의 마지막 소망인 자아실현의 욕구가 성취될 가능성이 갈수록 더욱 희박하여 지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느 때에 그러한 절망감에 빠지게 될까요? 그것은 나름대로 옳고 바르고 성실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마음을 먹고 최선을 다하여도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더 어려움에 처하기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지막 도피처로 삼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을 찾고 도우심을 구하지만 묵묵부답으로 침묵만 하고 계시는 것이 마치 나를 외면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중에서도 그 문제를 예수님에게 가지고 나와서 도우심을 구할 때마다 예수님은 거절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요구대로 치료하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 예수님은 그처럼 베푸시기만 하셨을 뿐 당신의 무슨 육신적인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신 적이 전혀 없음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서 삼십 삼년을 살아가시는 동안 누가 들어도 선한 말, 누가 보아도 선한 일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는 흉악한 죄인들이나 사형시키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하나님께서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것이 마치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하신 것처럼 생각될 정도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셔서 마지막 남기신 말씀을 귀기울여보면 오늘 성경의 이사야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과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버리심을 당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미래의 소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고난에 처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물론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그와같이 억울한 고난을 당하실 필요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사람과 하나님에게 다 버림을 받으신 것처럼 보이신 것은 곧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로 세상에 오신 분임을 입증하는 증거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그대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2. 메시아의 대속
오늘 성경에 예언된 미래의 메시아는 그렇게 억울한 고난을 당하는데 불구하고 그것을 상소하거나 자신의 무죄함을 변론하는 일을 하지 않고 마치 진짜 죄를 지어서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잠잠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미래의 메시아가 입을 열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욱 멸시와 천대가 극심하게 될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도 구차스런 변명을 하시지 않으시고 계속 침묵만을 지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고난이 있습니다. 물론 그 원인은 자기가 잘못한 허물과 죄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하는 고난이 있는가 하면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자신이 잘못한 결과에 대해서는 분명히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법의 정신이요 정의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것을 부인하고 뇌물을 주고서라도 형벌을 모면하려고 합니다.
만일 자신이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까닭 없이 오해나 불이익을 당하게 되면 명예훼손이라는 명목으로 법정고소도 마다하지 않고 손해 배상을 청구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에서 미래에 오시는 메시아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그 외모가 빈약하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고 멸시와 천대와 고난을 받되 마치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여 징계를 받는 사람처럼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항변이나 법정고소를 하지 않고 묵묵히 고난을 감당한 까닭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1) 미래의 메시아는 아무런 잘못이나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의 백성된 우리가 필연적으로 겪게 될 질병의 고통과 슬픔을 메시아가 대신하기 위해 대속의 고난을 겪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형벌을 받는다고 오해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2) 미래의 메시아가 찔리고, 상하고, 채찍에 맞게 되는 까닭은 그의 백성된 우리가 범한 죄악에 대한 징계와 형벌을 대신 받으시기 위함이며 그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가 회복되고 아픔이 치유받게 되는 대속의 고난이라는 예언입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3) 미래의 메시아가 그와 같은 사실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제멋대로 살아갈 것을 잘 아시면서도 묵묵히 참고 견디신 근본적인 이유는 그 일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시기 때문에 묵묵히 순종하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8)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이처럼 그의 백성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비웃과 조롱하고 오해를 하는데도 메시아처럼 모욕과 멸시와 고난을 묵묵히 당해줄 사람이 누구입니까? 부모 형제, 친구와 애인이 그러한 수모와 고통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만이 그렇게 대신하여 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의 예언자처럼 가고 오는 역사 속에 누가 우리의 죄와 허물을 그렇게 대속해 주신 분이 있습니까? 바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 말씀에 예언된 미래의 메시아는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이 예언의 말씀대로 로마 병정의 채찍을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몸이 상하시고, 나중에는 죽기까지 하시면서 당신의 무죄함에 대해서 일체의 변명을 하시지 않고 이 예언의 말씀을 따라 대속의 고난을 당하심으로 예언을 다 이루셨습니다.
(마 27: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3. 메시아의 승리
예나 지금이나 중죄인을 사형시키는 방법은 갖가지가 있습니다. 돌무덤, 화형, 단두대, 목졸음, 태형, 사지절단, 짐승의 밥, 전기의자, 가스처형, 총살 등 여러 가지 방법이 문헌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 여러 사형 방법 가운데 사형수를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것이 바로 사람을 산채로 십자가에 달려 죽이는 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 형은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로마제국에서는 자국민들에게는 시행하지 않고 지배국의 백성들을 위협하기 위해 반역자들이나 패전국의 왕들을 십자가로 처형을 하였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도 그러한 죽음을 저주의 죽음이라고 규정할 정도로 나무에 매어달려 죽임을 당하는 죽음은 저주의 죽음이었습니다.
(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이미 이사야선지의 예언을 다 아시고 계셨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신 까닭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예수님이 고난을 묵묵히 참아내신 또 하나의 이유는 이사야선지를 통해서 예언된 미래의 선지자가 당하는 고난은 패배적인 것이 아니라 승리의 고난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1) 메시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미래의 메시아가 대속의 고난을 당하심으로 인해 그의 백성들이 구원함을 받게 되는 대속의 제물이 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으 뜻을 다 성취하시는 승리를 예언하였습니다.
(사 53:10)“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2) 메시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되고 구원함을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아담이 범한 원죄로 말미암아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가 없는데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으로 그 죄값을 다 지불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백성들이 의롭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사 53: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3) 그러나 자아실현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고난을 감당하신 메시아가 마침내 존귀하게 되고 승리하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비록 메시아의 초라한 모습 때문에 사람들에게 멸시천대와 핍박을 받고 죄없는 몸으로 고난을 받았지만 그 같은 고난은 헛되지 않고 승리자들이 전리품을 나누는 것처럼 마침내 승리하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사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예수님은 이 예언의 말씀대로 메시아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패배가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고 그의 백성된 우리를 구원하여 내심으로 예수님은 가고 오는 모든 세대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심으로 존귀케 되심으로 마침내 승리하셨습니다.
(유 1: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이사야 선지의 메시아 예언을 잘알면서도 예수님을 그처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였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폄하한 것은 예수님이 작은 나라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신 외모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땅은 거룩한 땅 성지가 되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외모만을 보고 허세를 좇는 시대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닙니까? 사기꾼치고 못생기고 말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외모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사기를 당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강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존심일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보다 약할수록 더욱 자존심이 강해서 조금이라도 멸시를 당하게 되면 상처를 쉽게 받고 무자비한 보복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보다 자존심을 많이 상하셨으나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시기 위해 다 참아내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를 구원하여 내심으로 마침내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십자가는 저주스러운 사형틀이 아니라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심볼로 변했습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순종을 묵상하고 닮고 배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 비록 고난일지라도 예수님처럼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주의 백성으로 우리의 남은 생을 살아갈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한 주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히 5:8,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이 메시아의 고난의 예언을 아시면서도 고난을 피하지 않으신 것은 그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선한 일에 열심을 다하는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메시아의 예언을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하신 복음을 더 멀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주님의 이름을 선한 일에 열심하는 성도의 삶을 사는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감당하시면서 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선이요, 예수님이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대신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남을 사랑하기 위해 고난을 마다 하지 않고 희생하는 삶이 바로 선한 일에 열심하는 것이 이제부터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선한 삶인 것입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