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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
아가서 2: 1-8
아가서는 이스라엘의 최고의 영광과 번영을 누렸던 솔로몬 왕과 포도원지기 술람미 여성과의 열정적인 사랑을 노래한 것입니다. 결혼 전의 사랑과 결혼 후의 사소한 갈등을 극복하므로 사랑이 더욱 성숙되어 신랑과 신부의 전 가족에게와 예루살렘 여자들로 구성된 합창단의 오페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여인들의 합창과 솔로몬과 술람미가 사랑을 고백하면 그에 대한 답송을 하는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절 한절이 누가 누구를 향하여 부르는 노래인가를 알아야 이해가 되고 은혜가 됩니다.
아가서를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의 이야기로만 생각한다면 연애 소설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아가서는 구속사적으로 예수님과 성도와의 사랑의 이야기를 비유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도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느 만큼이나 큰 사랑을 받으며 또한 우리가 어느 만큼이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기 때문에 아가서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당시 왕중의 왕인 솔로몬과 시골뜨기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은 누가 보아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얼굴이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하여 게달의 장막(사막의 뜨거운 햇볕과 불어 닥치는 모래 바람을 막기 위해서 장막을 덮은 검은 가죽) 같다고 했습니다(1:5,6). 그리고 술람미는 부모나 형제들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죽었고 오라비들이 노하여 어린 술람미를 포도원 지기로 삼았습니다(1:6). 그래서 술람미는 포도원을 가꾸고 지키며 양 떼를 돌보는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염소 새끼를 먹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죄인인 우리와의 사랑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죄인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랑과 신부로 비유되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무한한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솔로몬은 술람미를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1:7),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1:8)라고 불렀습니다.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을 이와 같이 사랑하고 신부로 삼았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적 신부로 삼으셨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포도원은 지상 교회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지키고 섬기는 성도들을 보시고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나의 어여쁜 자야’라고 부르십니다. 오늘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는 자를 보시고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나의 어여쁜 자야’라고 부르십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교회를 살피고 예배하는 나와 여러분을 향하여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나의 어여쁜 자야’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영감으로 여러분의 귀에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왕중의 왕인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고 신부로 맞이하게 된 조건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술람미가 처녀로서 손톱이나 다듬고 피부나 관리하여 예쁘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포도원을 지키고 양들과 염소 새끼를 먹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술람미의 눈을 보고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술람미의 눈을 비둘기 같다고 하셨습니다. 눈이 예쁘면 얼굴 전체가 예쁩니다. 처음 만난 사람의 얼굴을 볼 때 눈을 먼저 봅니다. 눈은 마음의 창입니다.
시기와 질투를 품은 사람의 눈과 용서와 사랑을 품은 사람의 눈은 다릅니다. 눈을 보면 행복한 사람인가, 걱정이 많은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의사가 병든 사람을 진찰 할 때 눈부터 봅니다. 눈을 보면 건강상태를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눈을 보고 판단 합니다.
솔로몬은 술람미를 보고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1:15)라고 말했습니다. 비둘기는 온유하고 순결한 성품으로 평화를 상징합니다. 눈이 비둘기 같다고 한 것은 술람미 여인의 성품이 악의가 없고 순진하다는 것입니다. 오라버니들에게 쫓겨나서 포도원지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라버니에 대한 미움이나 시기가 없었고 슬퍼하거나 괴롬도 없는 평화로움을 말해 줍니다.
술람미 여인의 눈은 포도원을 지키며 양들을 살피는 눈이었습니다. 약하고 병든 양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는 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살피고 약한 자를 돌보며 섬기는 성도를 보시고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음으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다’고 했습니다(2:2).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을 ‘고벨화’(1:14)라고 했습니다. ‘고벨화’는 키가 크고 진한 향기를 품겨내는 아름다운 꽃입니다. 솔로몬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고벨화로 비유했습니다.
그런 반면 술람미는 자신을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라고 말했습니다(1).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라고 말한 것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특별한 꽃이 아닌 평범한 들꽃들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주일학교를 다닐 때 ‘나는 주의 화원에 어린 백합꽃이니 은혜 비를 머금고 고이 자라납니다. 주의 은혜 감사해 나는 무엇 드리리. 사랑하는 예수님 나의 향기 받으소서’라는 찬송을 즐겨 불렀습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은 ‘주의 화원에 백합화’가 아니라 ‘골짜기의 백합화’라고 말했습니다. ‘골짜기의 백합화’는 사람들이 보든 말든 피는 꽃입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술람미를 보고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2)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술람미 여인을 뒤엉킨 가시덤불 속에 백합화로 비유한 말입니다. 가시나무의 특징은 찌르는 것이며 땔감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가시나무’를 ‘불신앙과 심판, 파멸, 고통, 거짓 선지자 등을 비유로 말씀합니다.
술람미는 자신을 찔리거나 상처가 없는 순진한 백합화라고 말했지만 솔로몬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술람미 여인이 가시에 찔리고 상한 박해와 고난을 의미합니다. 술람미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오라버니들에게 쫓겨나서 포도원을 지키며 목자들의 장막에서 염소 새끼를 먹이며 고난을 당하는 술람미라고 말한 것입니다.
‘가시나무’란 미움과 시기, 질투, 고난과 질병과 슬픔이 많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악한 사탄 마귀들이 성도들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마치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처럼 많은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사랑하는 부모나 형제들로부터 비난과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고난 받는 성도를 보시고 주님께서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의 특색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입니다. 바람이 불면 백합화는 가시에 찔리고 찢겨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찢겨진 백합화는 짙은 향기를 토해 냅니다. 그 향기는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서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술람미가 당한 고난으로 말미암아 풍겨내는 향기에 솔로몬이 취한 것입니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이란 복음송을 부릅니다.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면 가시밭에 백합화의 꽃잎은 가시에 아름다운 꽃잎은 갈기갈기 찢어지지만 향기는 더욱 진하게 더욱 멀리 풍겨냅니다. 백합화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향기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바람이 불어서 찢겨지면 향기는 더 짙고 더 멀리까지 퍼집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결혼하여 사랑이 영걸어 갈 때 솔로몬이 술람미를 향하여 노래를 불렀습니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라고 노래하였습니다(4:16). 북풍은 찬바람이고 남풍의 뜨거운 바람입니다. 찬바람과 뜨거운 바람이 불어서 식물들의 성장을 촉진시켜 더욱 짙은 향기를 내품겨 날리듯이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은 단순한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라 신랑과 신부의 사랑이 된 것 입니다.
구속사적인 의미로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가시나무 가운데 한 송이의 백합화였습니다. 유대교의 부패한 지도자들로부터 온갖 횡포와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채찍으로 맞고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풍겨낸 그 향기는 죄로 인한 영원한 지옥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기독교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와 같은 수난속에 피어난 종교입니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는 기독교의 상징이요 역사이요 특색입니다. 교회는 가시밭과 같은 세상에 피고 찢기고 상하고 터져 향기를 품어내는 한 송이의 백합화입니다. 성도의 생애는 가시에 찔리고 상처로 곪아 터진 고난의 삶입니다. 고난 받은 성도를 향하여 오늘도 주님은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상대적이라야 합니다. 상대적이지 않는 사랑은 짝 사랑입니다. 솔로몬의 사랑의 고백을 듣고 술람미 여인은 화답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향한 사모하는 정이 너무나 깊었기 때문에 사랑의 열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5)고 말했습니다. 솔로몬만을 생각하는 술람미 여인의 심정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사랑에 빠진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그 무엇으로서도 얻을 수 없는 큰 행복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더 깊은 애정이 담긴 사랑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술람미는 “그가 왼 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6)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왕의 품에 안긴 자신을 어루만지며 깊은 사랑의 애무를 보내는 솔로몬의 손길 하나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기억하는 술람미 여인의 행복함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술람미의 노래가 8:3절에도 있습니다. “너는(그가) 왼팔로는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 손(팔)으로는 나를 안았으리라”고 노래했습니다. 2:6절은 결혼을 약속한 솔로몬이 한 번씩 찾아와서 안아주는 것이고, 4장에 결혼을 하고, 8:3절은 예루살렘 왕궁에서 부른 왕의 신부로서의 노래입니다. 이 말씀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의 첫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첫 사랑이 오래 가지 못하고 변합니다. 결혼 전에 사랑과 결혼 후의 사랑은 차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은 결혼 전과 결혼 후의 사랑이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교를 해 보니까 결혼 후의 사랑이 더 크다고 느껴집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성도를 향한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천국에서도 변함없이 성도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와 같은 사랑이 그리스도의 신부 된 성도들이 누리는 행복입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으로 왼 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 손으로 안아주는 사랑을 누리는 성도들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믿는 성도는 참으로 행복한 성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을 믿지 못한다면 아직도 성도다운 성도가 되지 못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과의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원합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7)고 노래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품에 안겨 누리는 행복을 누군가의 방해로 인해 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의 심정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8:4절에도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영원히 솔로몬의 품에 안기기를 소원한 술람미 이었습니다. 오늘의 술람미인 나와 여러분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 모두에게도 주님의 왼 팔로 머리를 고이고 오른 팔로 안아주는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방해로 깨어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기를 소원합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영원한 새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왕중의 왕이신 예수님의 품에 안겨 영원히 사랑받는 신부가 됩시다.
출처: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허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