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 목사
전도서 기자는 인생 행로는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이 병행함을 말하고, 모든 일이 잘되는 날에는 기뻐하되 고난과 슬픔의 날에는 그 목적, 이유가 무엇인지 돌아보라고 합니다. 헌데 하나님께서 인간이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이 언제 임하는지 모르게 하셨다고 합니다.
인간은 똑 같은 시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만사가 뜻대로 잘되어 번영을 구가하고, 어떤 이들은 역경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만사가 형통하던 사람이 역경에 처하기도 하고, 역경에 처해있던 자가 만사 형통할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동일한 한 사람
이 두 행로, 즉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다 겪는 다는 것입니다.
낮과 밤이 맞물려 돌아가고, 여름과 겨울이 이어지는 섭리처럼 인생 행로도 밝은 날과 어두운 날이 잇대어 있기도 하고 나란히 같이 가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전도서 기자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과 삶의 모든 상황에서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입니다.
첫째: 형통한 날, 기뻐하라
‘형통’이란 모든 일 이 뜻대로 잘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형통한 날 기뻐함은 아주 쉬운것입니다. 헌데 왜 쉽고 당연한 것을 새삼스러이 가르쳐 주는 것일까요?
‘형통’이라는 히브리어 ‘토브’는 ‘좋은’ ‘선한’ ‘아름다운’이란 뜻이며, ‘기뻐하다’라는 히브리어 ‘투바’의 원형도 ‘토브’입니다. 그러므로 ‘형통하게 되었다’는 것은 ‘선(善)중에 거하게 되었다’라는 말이며, ‘기뻐하라’는 ‘선’중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선을 행하고 있어야 하며, 또 다른 선을 얻도록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풀어 말하면 거룩하신 분의 축복 속에서 거룩한 기쁨을 유지해야 하고, 모든 것이 풍부한 가운데 있을 때 심령의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하면 안된 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당대의 완전한 자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요, 하나님과 동행할 만큼 훌륭한 신앙의 사람이요, 믿음으로 구원의 방주를 준비한 의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축복의 풍요로움, 즉 형통한 날에 포도주에 취함으로 말미암아 벌거벗은 하체를 드러내는 수치스러운 실수를 범했고, 이로 인하여 자기 아들을 저주하는 비극의 아버지가 되고 말았습니다(창 9장).
이제 아시겠습니까? 왜 가르쳐 줄 필요가 없는 쉬운 진리를 말씀 하시는 가를… 사람들은 곤고할 때보다 형통할 때 짓는 죄가 더 많고 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형통한 날에 형통함이 생이 다할 때까지 지속 되도록 지혜롭게 살아야 할 책임적인 존재들입니다.
형통한 순간이 오히려 위험한 순간임을 깨닫고 형통할수록 더욱 더 뜻대로 순종하며 감사하고, 여호와를 기뻐하며 찬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형통의 복을 주셨을 때 형통의 복에 취하여 탈선하면 형통이 슬픔으로 바뀝니다. 복을 받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을 받은 후 복의 관리가 더 중요합니다. 형통이 불행으로 연결되거나 비극으로 끝나서는 아니 됩니다.
어느 날, 로렐라이(Lorelei) 언덕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답니다. 마침 그때 배를 타고 라인강을 건너던 어부가 그 여인을 보게 되었지요 그는 여인에게 넋을 잃었고, 결국 급류에 휘말려 죽었답니다.
둘째: 곤고한 날, 생각하라
‘곤고’라는 히브리어 ‘라’는 ‘악한’ ‘해로운’ ‘비참한’ ‘슬픔’등의 뜻을 갖고 있으며, ‘역경’ ‘고난’의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생각하라’는 히브리어 ‘라아’는 ‘보다’ ‘관찰하다’ ‘숙고하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곤고 할 때 생각하라’는 고통과 괴로움을 당할 때 그 목적과 이유를 찾고, 자기 성찰과 인생을 심사숙고 할 때라는 것입니다.
곤고한 날에 자기를 관찰할 줄 아는 사람은 새로운 축복의 문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허나 곤고 할 때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자는 곤고로 인하여 와진 고통으로 짓눌리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나 여호와가 말 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학1:5).”
형통 날에 형통의 축복을 빼앗기지 아니하면, 빛에서 빛으로의 복이 계속될 것이며, 곤고한 날에 뜻을 찾고 감사하며 회개하면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움의 날에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는 인생이 되게 하심으로 삶의 어두운 장(章)을 올바로 해석하게 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곤고 하십니까? 비관, 불평, 반항, 원망하지 마시고 무릎꿇고 기도하고, 깨닫고 회개하며 감사하십시오. 그리하면 곤고는 섬광처럼 지나가고, 큰 형통으로 가는 탄탄대로의 지름길이 보일 것입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우리네 속담이랍니다.
어떠한 삶의 날이 내게 찾아와도 그리스도인들은 수용하여야 하고, 감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형통과 곤고가 병행하는 인생의 양로에서 성화 되어 가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곤고의 아픔을 감당하고 소화시킬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해야만 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시119:55).”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것은 평탄속이 아니라 역경속입니다. 고난 속의 순종은 인간을 인간답게 가다듬어 온전케 만듭니다. 곤고한 날은 교만의 가지를 꺾는 때이며, 강퍅한 마음이 깨어지는 날입니다.
“나는 굶주리면 기도로 힘을 달라고 간구 했고, 높은 산을 만나면 나의 믿음을 산보다 높여 달라고 기도했으며, 추우면 주님의 사랑의 띠를 띠고 올라가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의 내재로 추위를 이겼고, 깊은 물을 만나면 몇 십리라도 걸어서 낮은 물을 찾아 건너갔으며, 험한 준령을 만나면 찬송하고 기도하며 믿음으로 오르고 또 올라갔더니 넘게 되더라” 선다 싱(Sundar Singh)이 에베레스트 산을 넘을 때의 고백입니다.
선다 싱의 고백 하나 더-. “내가 박해를 당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내 박해를 통하여 내 영혼의 눈을 뜨게 하셨다” 곤고함의 선한 활용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신앙을 성장시켜 주며, 새로운 축복의 세계에서 살게 합니다.
이스라엘에 가서 다이아몬드 공장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이아몬드의 90%를 세계로 수출하는데 1캐럿의 다이아몬드를 얻으려면 무려 30톤의 원석을 부수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무엇보다 귀한 믿음은 수 많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기차는 양(兩) 레일을 달려가야만 합니다. 인생이 형통과 곤고의 양로를 살아감은 섭리입니다. 빗나가면 지금까지 달려온 행로가 모두 허사가 되고 맙니다. 형통과 곤고가 내 인생에 계속되는 복이 되게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재산’이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섭리에 대한 무지에서 깨어나야만 합니다. 인간사의 형통, 곤고 때문에 우매자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매일 매일의 삶이 힘들지라도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무궁 무진한 은총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일제 말기 지순택이라는 한 청년이 조상의 얼이 담긴 청자와 백자를 구워 훌륭한 예술품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애국하는 길이라고 생각, 도자기를 구울 좋은 흙을 찾아 나섰답니다. 그는 근 40년을 헤매다가 마침내 도자기 구울 흙을 찾았습니다. 헌데 도자기의 아름다운 색을 낼 수가 없더랍니다. 그는 전국의 유명한 도예공을 모두 찾아다닌 끝에 결국 아름다운 색을 내는 비법을 알아 냈답니다. 그의 도자기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도자기라고 합니다.
내게 언제 와질지 모르는 형통의 날과 곤고의 날, 항상 믿음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세상이 유혹의 미소를 던져도 등돌리고 견고히 여호와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함으로 불변의 사랑을 입어야 합니다. 지금의 처지에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과 자기 성찰이 빠지면 미래의 삶은 캄캄할 뿐입니다.
언제인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어폰으로 뉴스를 듣는데 갑자기 소리가 안 들렸습니다. 내 귀에 무슨 이상이 생긴 줄 알고 깜짝 놀랐지요. 허나 원인은 내 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의자에 꽂은 코드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형통의 날과 곤고의 날을 알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기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까닭은 유일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미래를 알 수 없게 하셨음입니다. 우리의 생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속에 있습니다. 힘들고 고달픈 날이 하나님을 만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병행하는 인생의 양로에서 승리의 개가를 불러야 합니다. 어떠한 길에서도 실패해서는 아니 됩니다. 의인 노아가 역경에서는 성공했으나 순경에서는 실패했습니다.
하물며 우리임에랴…
우리는 한 순간도 나를 방심, 방만, 방임하게 내 버려 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항상 내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도록 해야만 합니다. 나를 복되게 하거나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환경이나 상황이 아니라 내 믿음의 유무입니다. 똑 같은 기독교인일지라도 똑 같이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인생의 양로는 음식, 명예, 권력, 재물의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 성령의 능력으로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