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140:1-9절
1. 본문 1절은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강포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 입니다.
이 시에 나타나고 있는 다윗의 대적자는 도엑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이 시의 문맥으로 보아 다윗의 대적자는 하나님의 종 가운데 한 사람인 다윗의 생명을 빼앗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울 왕입니다. 그리고 또한 곁에서 그 왕을 선동하기에 여념이 없는 신하들입니다. 다윗이 그리스도에 대한 비유였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당시 악마의 대리자들이 그토록 사납게 다윗을 대적하였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다윗은 그의 대적자들이 자기를 향하여 퍼붓고 있는 적의와 배반에 대하여 이처럼 날카롭게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대적자들에 대하여 “악인”과 “강포한 자” 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자기 자신이 아무런 도발적 행동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부당하게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의 주장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대적자들과 화해를 모색하기도 하고 또한 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죄 없는 자기를 부당하게 핍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더욱 의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의 신앙 태도는 신앙생활의 한 법칙으로서 우리 모두도 준수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폭력과 사악에 직면해 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은 더욱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보통 사람들이 논쟁할 때처럼 단순히 비난하는 말들만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는 죄가 없는 증거를 열거함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얻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선하고 평화로운 사람들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2. 본문 2-3절은 “②저희가 중심에 해하기를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 ③뱀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대적자들에게 나타난 악행의 원천이 되는 그들 심중(心中)의 악의를 고발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일반적으로 복수형으로 표현한 점, 즉 대적자의 우두머리로부터 그와 함께 악을 꾀하는 관련자와 신하들을 지칭한 점으로 보아 다윗이 언급한 대적자가 단지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실제로 앞에서 단수형으로 표현한 “악인” “강포한 자” 역시 어느 특정인물 한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자기를 겨냥한 적대감이 자기 잘못 때문에 빚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천명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이 더욱 악하게 우리를 공격할수록, 또 그들의 배반과 암암리에 행한 술책들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수록 약속된 성령의 도우심이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친히 다윗의 입을 통하여 이러한 때에 드려야 할 기도의 형태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분명히 그들 대적자들이 자신에 대한 거짓 정보를 날조함으로써 전투를 개시하는 신호인 나팔소리로 삼아 자기에 대한 일반적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다윗은 그들 대적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 부당한 싸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를 정확히 간파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선하고 결백한 다윗을 폭력으로 파멸시킬 수 없게 되자 우선 악의에 찬 중상모략을 퍼뜨려 그것으로 다윗을 궁지로 몰아넣고자 했다는 사실들입니다.
3. 본문 4-5절은 “④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강포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저희는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⑤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러한 하소연과 그들에 대한 고발에 그치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시 여호와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로 보아 다윗은 바로 여호와께서 자신의 대적자들에게 복수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는 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또한 한두 마디의 말만 바뀌었을 뿐 이 구절에서도 앞 절과 똑같은 심정이 다시 나타나 있습니다 즉 “악인”을 “악인의 손”으로 “건지시며”를 “지키사”로 바꾸었습니다. 또한 앞 절에서는 그들이 “중심에 해하기를 꾀하고” 라고 말하였으나 이 구절에서는 그들이 이처럼 불쌍하고 혐의하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꾀하는 데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대적자들의 악랄함과 사기에 대하여 “뱀” 과 “독사”를 빗대어 표현한 사실에 관해서는 더 이상 강조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해도 다윗의 처지와 그 심정을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개입하셔서 도와 주시지 않는다면 대적자들이 자기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사방에 쳐놓은 그물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 구절에서 사용한 은유적 표현은 바로 앞에 있는 단순하고 직설적 표현인 그의 기도보다는 얼른 보기에 애매한 듯하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 구절의 은유들이 앞 절의 명백한 선언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선언에 대해 훨씬 더 힘을 더해 주는 표현입니다. 또한 “교만한 자” ‘거드름 피우는 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םיאנ(게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다윗이 어떤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세를 쥐고 있는 자들, 즉 권세가 없는 사람을 죽이는 일을 어렵지 않게 생각하는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의 원수들이 교만을 떨면서 우리를 공격할 때에 우리도 하나님께 호소하여 그 사납게 날뛰는 악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물리쳐 주시도록 간구 하십시다.
한편 다윗이 그들 대적자들이 교만하다고 해서 그들이 단순하게 무례하고 사나운 방법으로만 그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그들이 “올무”와 “줄”을 놓고 있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단들은 모두 그들이 자기들의 권세에 대해 자신만만해 할 뿐 아니라 다윗을 죽이기 위해 교묘한 술책까지도 강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 본문 6-7절은 “⑥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⑦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리우셨나이다” 입니다.
이 구절에 사용된 어휘들을 볼 때에 다윗은 자신의 기도가 외식하는 자들처럼 단순히 겉으로 보이기 위해 큰소리로 하나님께 호소하는 입술만의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진지한 심정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은밀해야 하는 신앙 원리에 입각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구원받은 확신을 얻게되기 까지는 아무도 진정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이 구절에서 이 시편 기자가 보통 종교인들의 관습을 버리고 홀로 떨어진 곳에서 하나님께 간구 함으로써 심중에 외식이 없도록 기도하는 모습 가운데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다윗의 이 기도는 겉으로 목소리만 높여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속으로 향하는 신앙 원리에 의해 간구 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기도입니다.
또한 다윗은 현재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분명히 얻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자기를 위해 어떻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던지를 회상합니다.
그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의 방패가 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제까지 하나님의 손길로 보호받아 왔던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경험을 통해서 자기 신앙의 위안을 얻을 수 있게 되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전진하는 모습은 서툴고 훈련되지 않은 신병처럼 전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의 전투를 통해 잘 단련된 백전노장처럼 두려움 없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능력”이라는 말로 여호와 하나님을 표현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구원이 비상한 능력으로 이루어진 구원이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5. 본문 8절은 “여호와여 악인의 소원을 허락지 마시며 그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가 자고할까 하나이다” 입니다.
“허락지 마시며”라는 말은 ‘세우지 마시며’라고 번역해도 그 의미가 같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소원을 억제하시고 그들의 목적과 시도를 꺾어 주실것을 간구합니다 이 사실로 보아 인간의 온당치 못한 계획과 사악한 음모를 꺾으시며 그들의 술수를 언제고 적절한 때가 되면 부셔 버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수들을 올바른 마음 상태로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들이 획책하는 음모가 즉시로 무너지고 망쳐지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라는 구절은 좀 애매합니다.
히브리어 동사 קופ(푸크)는 ‘치다’ ‘쓰러뜨리다’ 를 뜻할 뿐 아니라 ‘끌어내다’ 라는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의 꾀를 이루어 주시지 아니하시리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악한 자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편들어 주시지 아니하신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해석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악한 자가 버릇처럼 생각하는 악과 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10편 6절에서도 대적자들의 교만에 대해 비슷한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완전히 무시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자기들 뜻대로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 세상도 자기들의 독단적인 지배 아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다음에 “저희가 자고할까 하나이다” 라는 말은 이러한 뜻을 적절하게 나타내 줍니다. 그들이 자고한다 하는 것은 그들이 결코 누구에게도 패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갖기 때문에 그 교만으로 인해서 항상 악한 자들이 환상 가운데 빠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본 절은 ‘악인들의 죄를 이루어 주시지 마옵소서, 그리하여 그들이 높아지지 않도록 해주소서’ 라고 부정사를 두 번 반복한 문장으로 고쳐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방종에 내맡긴 대적자들이 여전히 안전하게 지내고 있는 사실에 대해 비난하고 있습니다.
6. 본문 9-10절은 “⑨ 나를 에우는 자가 그 머리를 들 때에 저희 입술의 해가 저희를 덮게 하소서 ⑩ 뜨거운 숯불이 저희에게 떨어지게 하시며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저희로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 입니다.
이 구절의 “머리”라는 용어가 다윗을 대적하는 무리들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문장이 바뀌어 복수가 단수로 바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저들이 나를 겨냥하는 악한 말들의 저주가 바로 저들의 머리 위에 떨어지게 하소서’ 입니다. 이 구절의 “머리”란 도엑이기 보다는 사울 왕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곧이어 그의 대적자들 모두에게 “뜨거운 숯불이 저희에게 떨어지게 하시며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저희로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저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무서운 종말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시편 11편 6절에서도 악한 자를 두려워 떨게 하기 위하여 성령께서 하나님의 복수에 대한 본보기를 보여주시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유다서 7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불신자들의 심판자이시라는 사실에 대해 소돔과 고모라의 이 영원한 본보기를 들어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그 다음에 나오는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저희로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라는 구절에서 그 불이 사라져 없어질 수도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 ב(베트)는 종종 어떤 일의 수단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불 가운데”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에 불을 내리셨던 것처럼 ‘불로써’ 그들을 멸망시키옵소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한 번역입니다.
또 다윗은 그들이 “깊은 웅덩이” 에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우 엄하게 진멸 하셨던 자들을 치유하실 때도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대적자들이 도저히 뉘우칠 수 없는 자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버림받을 자들이 다시 용서받고 그 깊은 웅덩이에서 빠져나올 희망마저도 절단시켜 버리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면 다윗 자신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입장을 취했을 것입니다.
7. 본문 11절은 “악담하는 자는 세상에서 굳게 서지 못하며 강포한 자에게는 재앙이 따라서 패망케 하리이다” 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말 많은 사람’으로 이해하는데 그것은 너무 좁은 의미의 해석입니다.
또한 이 말은 단순히 책망하기를 말하며, 수다스럽고, 공허한 말만하며,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악의에 가득 찬 말을 하는 사람, 즉 거짓과 중상모략으로 은밀하게 싸움을 일으키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의미는 하 반절에 나타나는 “강포한 자” 라는 언급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다윗의 대적자들이 앞에서는 ‘뱀의 혀’ 와 입술 아래 있는 “독사의 독” 으로 표현되었던 것처럼 은밀하게 배반하고 교활할 뿐 아니라 노골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여우일 뿐 아니라 사자들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미래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구절을 기원문 혹은 기도문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의 미래 시제를 달리 해석하여 다윗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구원의 손길에 대해 기도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대적자들이 술수를 부리건, 노골적인 폭력을 획책하건 간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실 분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사냥의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사냥꾼은 짐승을 추격할 때 사방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그 짐승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불신자들도 아무리 핑계를 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조금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재앙이 따라서 패망케 하리이다”라는 말은 그들이 처벌받지 않고 도망치고자 할수록 자기 자신들을 더욱 분명하게 파멸로 돌아갈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8. 본문 12-13절은 “⑫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신원 하시며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리이다 ⑬ 진실로 의인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 입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은 자기의 생각을 옮겨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심판에 대해 말함으로써 자기의 기도를 분명히 확증시키고 있습니다. 의심이 섞인 기도는 전혀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고난 당하는 자를 구원하실 수밖에 없는 분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사역을 틀림없는 사실로써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가혹하게 시련을 당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묵인하시는 것처럼 생각되는 현실 사태에 관해서도 다윗은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토록 묵묵히 충고하시는 방법으로서 고난 당하는 자를 구원하시며 압제 당하는 자를 회복시키시기 위한 목적에서 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분명한 어조로 하나님께서는 ‘궁핍한 자와 고난 당하는 자의 재판관’ 이 되신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바로 이 방법으로 자신을 격려할 뿐 아니라 남들도 격려해 주고 있습니다.
즉 구원의 때가 이르기 전까지는 다윗 자신과 타인들 모두가 계속해서 고난을 받게 되는데, 그때까지는 고난을 받는 자들은 사악한 무리들의 진노에 맡겨진 세상의 가련한 존재일 따름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손길이 즉각적으로 그를 구원하지 않는 상황에서조차도 그는 절망 가운데 빠져 버리지 않는 채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가련한 자를 구원하시는 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 구절이 다윗이 단지 자기 자신의 개인적 경우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 구절의 의미를 약하게 만드는 해석이 됩니다.
시141:1-4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이러한 기도를 드리도록 압박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분명한 다윗의 의도는 부당한 피해를 당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자신의 영혼을 반성하고 제어하여 보복이나 복수 또는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을 하지 않으려는데 있습니다.
다윗은 인내하며 다만 하나님이 자기와 적들 사이에 심판 해 주심을 바라고 있습니다.
다윗의 시
1. 본문 1-2절은 “(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임하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대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2)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 입니다.
1) 1절에 이러한 서론 형식과 기도로 보아 분명한 사실은 다윗은 자신의 요구를 거듭 반복하고 있으며 도움받기를 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윗은 결코 사소한 시련 아래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명백히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울이 가한 박해에 관하여 이 시의 저자가 다윗이라는 추측을 인정할 수 없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하나님께 요청을 해야 하며 사악한 자들처럼 기도를 포기하는 유추를 받거나 다른 것을 신뢰해도 안 된다는 점을 가르쳐 줍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늘이나 지상 혹은 인간이나 운명, 그리고 기타 다른 것에 부르짖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서두에서 그러한 것들은 사악한 자들이나 사용하는 수단임을 언급했습니다.
사악한 자들이 하나님께 무엇인지를 아뢴다 해도 그것은 중얼거림과 불평이며 기도라기보다는 울부짖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2) 본문 2절은 율법적 의식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는 분향과 제사에 의해 성결케 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 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다윗은 바로 이 약속에 의지한 것입니다.
당시 다윗이 도피하는 상태에 있었고 종교적 집회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이 박탈되어 있었다는 사람들의 추측에 따르면 이 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 구절에 은밀한 대조가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141 편
즉 다윗은 하나님의 예배자들과 함께 성소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혹은 분향이나 희생제물도 드리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해도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열납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적 의미를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으므로 우리는 일반적 진리를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곧 이러한 상징들로부터 주의 백성들은 기도가 가장 향내 나는 분향이나 가장 탁월한 제사와 똑같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기에 다윗은 이러한 주변상황으로부터 자신의 신앙을 확고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열조들의 이러한 견해가 전적으로 외적의식에 제한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이러한 도움을 이용하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향이 매일 제단에서 살라지고 저녁에 봉헌제가 드려지는 것이 결코 무익한 일이 아니라고 다윗은 생각했기에 이 의식적 예배와의 관련 속에서 자신의 기도에 관해 언급하는 것입니다.
“나의 손 드는 것이” 는 분명히 기도를 의미합니다.
משאת (마샤트)를 ‘선물’ 로 번역한 사람들은 시인의 의미를 모호하게 왜곡합니다.
נשא (나샤)에서 유래된 이 말이 히브리어로 ‘들어올린다’를 의미하기에 기도에서 실행되는 외적 행동에 대해 언급하면서 기도를 의미한다는 자연적인 추론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동일한 것을 두 번 반복한 것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민족들이 기도할 때 손을 드는 이유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우리가 주목해서 살펴보았습니다.
2. 본문 3-4절은 “(3)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 서 (4)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와 함께 악을 행치 말게 하시며 저희 진수를 먹지 말게 하소서” 입니다.
다윗은 자기 원수들의 난폭하고 무절제한 공격에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행동할 유혹을 느낄 정도로 상해를 입기가 쉬웠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단지 육체적인 폭력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견책이나 불평의 말을 쏟아 내지 않도록 자신의 혀를 제어하기 위해 하나님의 진노를 기원합니다.
자기가 받은 상해가 부당한 경우 자신의 성격을 가장 잘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일지라도 원수들의 있을 수 없는 행동에는 분노를 표하면서 때로 복수를 하려 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주님께 자기의 혀를 제어하사 나쁜 말을 발하지 않도록 해주십사는 기도는 아주 적절한 것입니다.
시편 141 편
다윗은 자신의 심장이 복수심을 유발하는 일체의 해로운 생각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희 진수를 먹지 말게 하소서” 라고 첨가된 문장은 사악한 자들이 죄 가운데 즐긴 복에 의해 유혹을 받아 사악한 자들처럼 행동하지 않게 해주십사 라는 간구라고 비유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본문이 언급하고 있는 세 가지는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 보다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부당한 박해를 받은 피해자가 자신들의 입을 열지 않고 침묵으로 불평없이 모욕에 복종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는 점에서 다윗은 자신의 입이 닫혀지고 억제되기를 기도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출입구를 지키시는 자처럼 자기 입을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여기에서 쓰인 נצרה (니츠라)는 명사라기보다는 동사의 명령형입니다.
다윗은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지지 않게 하소서’ 라고 덧붙입니다.
여기서 דבר(다바르)는 다른 여러 경우에서처럼 ‘사물’을 나타내는데 쓰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윗은 설명을 통하여 자기가 악한 자들과 사악하게 투쟁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점과 그의 원수들처럼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냈습니다.
만약 유세비우스가 언급한 바 있는 수도승이 이러한 다윗의 결심에 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었다면 그는 7년 동안 침묵을 준수함으로 자기가 완전한 학자임을 보여주었다는 거짓되고 허황된 착각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혀를 제어한다는 것이 매우 드문 덕목임을 들은 그는 멀리 은둔의 장소를 찾아 떠난 뒤 7년 동안을 자기 스승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왜 잠적해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 구절이 가르쳐 준 바에 관해 묵상을 했었노라고 대답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에게 그 기간 동안 말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조차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이 적절합니다. 양자는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침묵을 지킨다는 것과 악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사람이 침묵을 지켰을지라도 생각은 불경건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 생각은 무익한 말보다 더욱 악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의 단어를 문맥에서 떼어 내 멋대로 생각한다든지 저자의 의도를 간과할 수 있다는 어리석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고와 말을 포함하여 자기를 하나님의 지도에 위탁함으로서 원수들의 무례함에 격분케 되는 경우 성령 하나님께서 자기의 혀와 자기의 마음을 지켜 주실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시편 141 편
한편 만약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지키고 보호해 주시지 않으면 혀는 미끄러지며 쉽사리 말을 내뱉게 됩니다.
다른 한편 제어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내적인 무질서한 감정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얼마나 바쁜 작업장인가?
매순간 그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명멸하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혀와 우리의 마음을 살피지 않으신다면 죄악 된 언어와 생각은 무제한적이 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지 않는다면 사단은 속히 그리고 쉽사리 그들의 요구를 내놓고 따르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어를 제어하는 성령의 선물이야말로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
우리의 마음이란, 하나님의 손 안에 놓여 있기에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악에 기울게 하신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마음을 돌려 놓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우리들의 마음을 악한 욕망으로 부추기지 않고 자신의 심판의 비밀에 따라 사악한 자들을 사단의 학정 아래로 몰아넣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어둡고 강퍅하게 하신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적절합니다.
우리들의 죄에 대한 비난은 자기 자신에게 책임이 있으며 욕망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본성상의 욕구에 의해 선, 혹은 악을 행하기에 사람들이 악으로 기울어버리는 것은 외적 충동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부패성에 의해 자발적으로 움직인 것입니다.
우리는 ‘비행을 행하고’로 읽으나 어떤 사람들은 ‘비행에 관해 생각하고’로 읽습니다.
그래도 의미는 동일하기에 무엇 하나를 택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수”로 번역된 מנעמים (마남밈)은 그들의 죄가 하나님의 인내에 의해 묵과됨으로서 악한 사람들이 느끼는 일종의 만족감입니다.
악한 자들의 방자함이 점점 무례해지는 반면 주의 백성들조차 악한 자들이 누리는 쾌락에 속아 쾌락을 즐기려 하고 방종에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성령께서 은밀히 자기를 제어하사 그들의 “진수를 먹지 말게”해주십사고 기도할 이유를 가졌던 것입니다.
즉 다윗은 타락과 아첨을 통하여 추악하고 죄악스러운 쾌락에 빠지거나 외부적 조건에 타협하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편 141 편
시141:5-7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난관을 당한 다윗의 처세 방침이 여기 또 한 가지 기록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말과 행동을 옳게 파수하는데 있어서 평시보다 더욱 강력하게 함입니다(3-5상).
다윗이 자신의 “입에 파숫군”을 세운다는 것은 말을 극력 조심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지지 않도록 힘쓰는 것도 악을 극도로 멀리하는 태도이며, 또 의인의 책망을 감심으로 받는 것도 비상하게 의(義)를 사모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역경과 난관의 해결책이 비상한 경건을 파수함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이 역경을 당하면 타협주의로 떨어지기 쉬우니 만큼, 평시보다 더욱 힘써서 신앙 생활을 파수해야 됩니다.
1. 본문 5절은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라 저희의 재난 중에라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입니다.
1) 본문 5절 상반은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라” 입니다.
사단은 미끼로 악인들을 유혹하는 반면 악인들은 동시에 아첨함으로 서로 기만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거짓 쾌락에 말려들기보다는 혹독한 견책의 지팡이에 의하여 자신의 의무가 일깨워지게 해주십사고 토로합니다.
종교를 경멸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견책을 한다 해도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자신의 안전을 염려한다면 우리는 선한 자들과 친분을 맺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올바른 충고로 타락한 것을 회복하며 실수를 저지른 자들을 바른 길로 되돌려 놓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죄를 지어 본성을 부패시켰을 때 책망을 받게 된다는 사실에 이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죄에 빠질 때 책망을 받는다는 것은 타락한 본성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윗은 견책이야말로 사람의 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시편 141 편
이 구절은 애매함이 있기에 바른 의미가 무엇인지 확인해 보는 게 좋습니다.
명사 חסד (헤세드)를 부사로 볼 때 가장 해결이 잘 됩니다.
‘의인들이 나를 자비롭게(전치사를 붙이는 경우에는 ‘자비 안에’) 칠 것입니다.’
대부분 주석가들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다윗은 자비와 친절만큼이나 이런 견책을 가장 좋은 치료제로 간주해 친절하고 공평한 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다윗은 견책이 가해지는 외부적 모습보다는 마음의 구조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선한 사람들이 아무리 뜨겁게 달아올라서 실수를 저지른 자를 권고하여 제아무리 혹독한 말을 사용한다 해도 그들은 강권적인 형제애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엄격한 가혹성은 사실상 그들의 성스러운 염려가 그들 형제의 안전에 대한 염려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악한 자들은 비난은 부드럽게 하나 행동은 잔인합니다.
이에 반해 의인들은 이렇듯 날카롭고 가혹하지만 자비롭게 행동합니다.
견책의 이러한 모습에 주목함으로서 다윗은 솔로몬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잠10:12) 진지한 애정에서 출발한 견책을 증오나 사적 원한에서 출발한 견책과 분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취한 다른 번역도 그에 못지않게 적당합니다.
‘의인으로 나를 견책케 하소서 나는 그것을 자비로 여기겠나이다. 혹은 나는 그것을 복으로 여기겠나이다. 그로 하여금 나를 견책케 하소서’ 가 그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머리를 상치 않게 하는 값진 기름이 될 것이나이다’ 입니다.
마지막 소절은 이렇게도 번역됩니다. ‘머리의 기름이 나의 머리를 깨뜨리지 않게 하소서’ 즉 ‘사악한 자들이 나를 유혹하여 그들의 듣기 좋은 아첨으로 나를 파괴치 않게 하소서’ 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기름은 사악한 자들이 우리를 파멸시키는데 사용하는 치명적인 아첨으로 이해됩니다.
그들의 아첨은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듯하지만, 반면에 그 아첨은 우리들을 점점 깊은 파국으로 몰아넣습니다.
다윗이 견책의 방법에는 유순하게 복종한 반면 아첨에 대해서는 마치 사이렌 소리라도 들은 양 멀리 도망쳤다는 것은 이 구절의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해 줍니다,
찬사라는 것은 처음에는 달콤하기 그지없지만 아첨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모두 심장까지 독약에 젖어 들고 맙니다.
이제 다윗의 경우를 통하여 본성상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는 모든 아첨을 배제하는 법을 배웁시다.
또 우리의 악을 치유해 주는 약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고집과 완악함을 포기합시다.
시편 141 편
사람들은 이와 같이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자애심을 갖고 있어서 스스로 정죄받아 마땅할 때에도 세상의 찬사를 들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찬사를 경계해야 합니까?
그것은 양심이 마비됨으로서 자발적으로 그들은 자신을 파괴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본문 5절 하반은 “저희의 재난 중에라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입니다.
이 구절을 해명하기 위하여 세 가지가 제안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의 의미를 ‘우리는 사악한 예에 의하여 타락할 소지가 항상 있기에 다윗은 여기에서 자신이 그들의 악에 휘말리지 않게 해 주십사 하고 기도하고 있다’ 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해석은 ‘그들의 사악한 생각을 인지한 다윗은 그들의 악이 자기를 행하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해석은 다윗은 ‘그들이 절망적인 재난에 떨어질 것을 알고 그들이 행한 바에 따라 하나님의 공정한 복수가 시행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반대 의미가 보다 적합한 듯 한데, 그것은 그들의 사악한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들의 복을 위하여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본 절에는 ‘그럼에도’ 라는 부사가 삽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들이 불행하게 끝장나기를 예언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어떻게 될까?
말하자면 악한 사람들이 지금은 극도로 기승을 피우지만 곧 사로잡힐 것이요, 이어 자기는 그들에게 곧 동정을 보낼 것이라는 암시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그들의 파국적인 종말을 예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을까?
단어의 연결 상태로 보아 선택되는 견해는 이것입니다.
다윗은 ‘그럼에도 나의 기도가 그들의 재난으로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다’ 라고 기도하지 않고 단독적으로 떼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나의 기도가 그들의 재난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헛된 진로에 빠져들 위험이 있기에 그들이 전적으로 파멸하여 그와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동정을 받게 될 때까지 왜 그가 자신의 진실을 감추고 있어야 하는지를 자신의 영혼에 적절하게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2. 본문 6절은 “저희의 관장들이 바위 곁에 내려 던지웠도다 내 말이 달므로 무리가 들으리로다” 입니다.
동사의 시제가 과거에서 미래로 바뀌었다는 점은 대부분 주석가들이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기원문으로 ‘그들을 내려 던지소서’ 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시편 141 편
또한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다윗의 의도를 분명하게 나타낸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들의 관장들이 바위로부터 내려 던져질 때 혹은 돌무더기 위에 던져질 때 그들은 나의 말을 들을 것이로다.’
실수나 오전(誤傳)으로 인해 일반 백성들이 자기를 향해 분노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다윗은 그들의 지도자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그들의 권세가 탈취당할 때 오도되었던 서민들은 올바른 마음을 갖게 될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바위 곁에 내려 던지웠도다”는 그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높고 지엄했던 위치를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부당하게도 선하고 경건한 자들을 박해한 악한 방백들에게 저주가 뒤따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다윗은 그들이 회개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우두머리에게 보응하실 때 돌이켜 생각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백성들이 숙고보다는 충동에 의해 쉽사리 결정해 버리며 맹목적인 편견에 의해 서둘러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충고를 받으면 같은 속도로 자신들의 못된 길을 반성하고 돌이킵니다.
그러므로 잔인성은 언제나 죄악임에 틀림없으며 또 단순성이 결코 변명할 여지가 못 된다 해도 우리는 다윗의 예를 통해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로 끈질기게 진리와 정직에 대해 들을 수 있도록 사려깊은 충고를 보내 주십사고 기도하는 법을 배웁니다.
3. 본문 7절은 “사람이 밭 갈아 흙을 부스러뜨림같이 우리의 해골이 음부 문에 흩어졌도다” 입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원수들이 자기 하나를 파멸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먼저 자기를 짓부수고, 다음에 자기와 관련된 자들을 토벌하여 모두 무덤 속으로 던져 넣어버리려 한다는 사실을 탄식합니다.
일반적으로 노상의 강도는 자기가 살해한 희생자의 시체를 도랑에 처넣어 버립니다.
다윗은 그나 그의 동료들은 사람들이 돌이나 나무를 조각하는 것처럼, 땅을 후벼파는 것처럼 자기들의 뼈가 흩어질 정도의 야만적인 대접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처럼(고후1:9) 다윗은 죽음에서부터 종종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우리의 뼈가 부서지고 흩어지는 경우를 당하게 될 때라도 삶과 구원의 희망을 끊임없이 북돋워야 한다는 의무를 배우게 됩니다.
시편 141 편
시141:8-10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다윗은 난관을 당했을 때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서 시종일관하였습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기만을 바라보았습니다(1, 2, 5하, 8-10).
사람은 흔히 난관을 당하면 낙심하거나 원망하는 자리에 떨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런 때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이겨나가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1. 본문 8절은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 입니다.
만약 우리가 앞 절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뼈가 부서진 그들의 모습하에서 이해된 내용들을 숙고한다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의 다윗의 기도란 그야말로 “생의 파산자”, 곧 찢겨진 조각들이 하나님께 울부짖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로 하여금 다윗의 영웅적인 신앙의 용기에 관해 생각하게 해줍니다
다윗은 그러한 역경 하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눈을 하나님께 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은 신앙이 수행해야 할 당연한 것으로 있어서 그야말로 우리의 마음이 당황해서 요동할 때 우리 마음을 정리 정돈하여 편안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뼈가 부서져 나갈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기적이기에 자신들은 절대 망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그들의 마음 속에 불어넣어 견고케 하시는 것은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기적에 기적을 더하심과 같습니다.
2. 본문 9-10절은 “(9) 나를 지키사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행악자의 함정 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10)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나는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 입니다.
1) 다윗은 하늘의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자기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 한 원수들의 올무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궁핍을 겪으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죽음의 결과가 자기에게 속한다(시68:20) 해도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의 결과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를 입증합니다.
하나님은 종종 구원을 보다 현저하게 드러내시기 위해 개입을 늦추십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오히려 악한 자의 생각이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게 만드십니다.
시편 141 편
2) 본문 10절에서 “자기”라는 대명사가 사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은 도액과 여러 사람들이 마치 사울의 올무에 떨어졌다는 의미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불합리한 듯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가 가리키는 바는 오히려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봅니다,
첫째로 다윗은 주께서 악한 자들의 모사에서 자신을 보존해 주셨음을 언급하였습니다.
둘째로 이제 다윗은 사악한 자들이 의로운 자들을 잡으려고 펼쳐 놓은 올무에 그는 하나님께서 간사한 자들을 그들 자신들의 꾀로 잡으려 펴놓으신 올무로 대항합니다.
또 다윗은 자신의 적들의 숫자가 많기에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에서 ‘그들로 하여금 함께 멸망케 하소서’ 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세력과 술수를 쉽사리 격파하신다는 확신을 다윗이 갖지 않았더라면 그의 탈출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다음의 구절, 곧 10절 하반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나는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 라고 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어의 순서를 변경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면하게 되기까지는’ 이라고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 10절에서 다윗은 자기가 안전하게 빠져 나오기까지 자기 원수들은 올무에 사로잡혀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4) 여기서 우리는 박윤선의 해설을 잠깐 살펴보면서 마칩니다.
다윗은 자기가 당면한 비참한 처지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봅니다(7-10).
그런 점에서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란 말씀은 귀합니다.
이것은 난관을 당한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하나님만 고대하고 다른 데는 도무지 한눈을 팔지 않는 사실로 굳어진 신앙 태도를 말합니다.
다윗은 핍박자들이 극도로 악하기에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결국 남을 잡으려 하는 자가 제 스스로를 잡는 일이 되고 말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 원수들의 장래가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대언자의 자격으로 기도한 것인 만큼, 잔인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다윗의 기도는 권위 있는 예언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의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만 머무르는 기도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신자들이 드리는 기도의 귀결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