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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6: 7 이백 데나리온의 떡 - 요 6: 15 다시 혼자 산으로
요 6: 7 이백 데나리온의 떡 -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
1]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1)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사람은 주어진 범위 안에서 나눌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시다.
* 시 23: 1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은 풍성하시고 풍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는 넉넉하고 많다는 뜻으로 '풍부하였더라'의 '카베드'의 원뜻은 '무겁다'로 미처 다 관리할 수 없을 만큼 차고 넘친 상태를 의미한다.
* 창 13: 2 -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이는 아브람이 하란에서 모은 소유(12: 5)에 바로에게서부터 받은 예물을 더하였기 때문이다.
* 창 12: 5-6, 16 –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굳이 이러한 사실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향방을 암시하기 위함이다(12: 6절).
창 1: 20의 '번성케 하라' 히브리어 '쇠라츠'는 '꿈틀거리다', 무수히 많아 우글거리는 것이 마치 꿈틀거리는 듯이 보인다는 점에서 '풍부하다, 무수히 생기다(출 8: 13)란 뜻으로 발전되었다.
* 창 1: 20 -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 출 8: 13 –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개구리가 집과 마당과 밭에서부터 나와서 죽은지라.
'여호와의 영광'(출 24: 16) '케보드 예호와'는 '영광, 존귀'라는 뜻을 지닌 '케보드'는 '풍부함, 장관'(壯觀)이라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구름, 불, 뇌성 등 백성이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했던 장엄한 광경(17절)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 출 24: 16-17 – 16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17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같이 보였고
* 창 19: 16, 18 – 16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18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바닷가의 모래'라는 표현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음과 풍부함을 표현하는 관용 어법이다.
* 창 22: 17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 수 11: 4 - 그들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으니 백성이 많아 해변의 수많은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으며
* 삿 7: 12 –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통용하고(행 4: 32)의'코이나'는 풍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주로 '친교, 교류, 분배'등으로 번역되며, 여기서는 특별히 재물을 소유하는 면보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면에서 통용(通用)했음을 시사한다.
* 행 4: 32 -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2) 이백 데나리온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다.
그러므로 200 데나리온이면 상당한 금액이다. 빌립의 이 계산은 다만 현실적이고 타산적인 것이다.
그에게는 건전한 이해력은 있었으나 신앙은 없었다(Godet). 그는 일찌기 예수님의 이적들을 보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때에 신앙적으로 생각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이렇게 주님의 권능에 대해서는 건망증이 많다. 빌립은 각 사람이 조금씩 받을지라도 2백 데나리온의 떡을 가지고도 부족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요 6: 8 안드레가 여짜오되 -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
1] 제자 중 하나
주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을 지목한 데는 깊은 의도가 있을 것이다. 여러 사람의 의중을 알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진실된 핵심을 아시고자 한 것이다.
2]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빌립과 안드레는 종종 함께 나타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같은 고향 사람인 사실과 그들이 제자 중 가장 먼저 선발된 까닭인 듯하다.
* 요 12: 20-22 –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 요 1: 41-44 –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안드레(Andrew. 뜻 : 남성적)는 요한의 아들이요 베드로의 형제이다. 갈릴리 해변 뱃새다의 어부로서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었다가 선생으로부터 예수의 일을 듣고 예수를 따랐다(요 1: 40-42).
12 사도에 참여하여 일생을 봉사하였다.
* 마 10: 2 -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알려졌다.
그의 출생은 예수님의 고향으로 유명한 나사렛(Nazaret)에서 동쪽으로 40Km(약 100리)정도 떨어져 있는 베세다(Beth-Saida)는 아주 아름다운 동네이다. 어부인 아버지 요나와 어머니 요안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의 뜻은 '남자다운' '용감한'이란 뜻을 가졌다.
베드로와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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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 드 로 | 안 드 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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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어부 | 작은 어부
대중적 복음전파 | 개인적인 복음전파
폭죽같이 큰 소리를 지르다가 금새 | 지조있는 재구꾼이며 조용한 마음을 소유한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가라앉는다 | 사람이다.
성격이 매우 급하다 | 신중하고 차분함. 심중하고 견실하며
| 온건한 믿음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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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기 형의 그늘에 늘 가리워 있었으나 자신의 허물을 시인하고 뒷전에서 힘써 일하였다.
(1) 주님의 부르심 (요 1: 38-39)
안드레는 세례 요한을 존경하며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세례받으러 오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Messiah)이라고 하자, 가장 먼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날 주님과 대화를 한 후, 그리스도로 확신하고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믿게 된, 주님의 선택을 받은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 뒤를 이어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이 믿게 된다.
고기잡이로 돌아가긴 하였으나 몇 달 후, 주님께서 '고기잡이를 그만 두고 나를 쫓으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하시며 제자 직분만 행하라는 부르심을 응답한다. (요 1: 40-42)
(2) 전달자 안드레
안드레는 베드로같은 훌륭한 설교자는 아니었지만, 하나씩 차근차근 잘 낚는 어부가 되었다. 그는 사람을 주님께로 소개하는 일을 잘해서 '전달자' '소개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① 자신이 깨달은 진리
예수님이 메시야(Messia)라는 것을 형 시몬(Simon)과 빌립에게 전달하였고, 시몬은 침착하고 믿을 만하고 견고한 행동을 하는 동생 안드레를 은근히 존경하고 있었다. 그가 밝고도 확신에 찬 어조로 '메시야를 만났다. 와서 보라"고 외쳤다.
이 전도로 요한까지 주님께 데리고 오는 역사를 이룬다. 물론 가족이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를 가지기 까지는 많은 기도와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② 오병이어의 기적 때 보여준 믿음
갈릴리 해변의 고향 옆 베세다 광야에는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였다가 3일동안 굶주린 무리들이 있었다. 안드레는 이들의 먹을 것을 염려하여 예수께 건의하는 사랑의 소유자이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줄 아는 고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예수께 갖고 가기만 하면 분명히 문제가 해결되라고 믿은 좋은 믿음의 소유자이다. 그래서 겨우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밖에 없는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믿음을 보인다.
③ 헬라 인을 주님께 인도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헬라 인이 예수를 만나고 싶어서 찾아왔다. 그는 예수께 소개해 주는 폭넓은 사람이었다. 유대인만이 위대하다는 당시인들처럼 편협한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다. 안드레는 예수가 세상을 구할 구주시요, 예수의 복음이 온 인류를 위한 것이요, 기독교는 세계적 종교임을 알았다.
이 위대한 진리를 깨달았을 때 그 진리를 열렬히 받아들였고, 다른 사람들도 이 진리를 알게 되길 원했다. 그래서 죽기까지 열심히 전도하고, 복음 전파하는 데서 기쁨을 찾고 살았다.
(3) 둘째 자리에 만족하는 안드레
주님의 산상 변화. 주님의 고뇌의 기도 현장,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에서 보면 베드로가 큰 인물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임을 알자. 그는 자기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를 주님께 인도해서 지도자가 되게 했다.
자신은 3대 제자 측에 못 들고, 뒤로 물러섰다. 자기가 인도한 형이나 동료가 주요 제자가 되고 자기는 소외되었어도 섭섭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 불평 없이 뒤로 물러나 둘째 자리에 앉는 겸손을 보였고, 단지 주님을 섬김으로 만족하고 충성되고 성실히 사는 사람이었다.
교회는 베드로같은 용감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더 필요한 사람은 눈에 뜨이지 않는 뒷전에서 일을 하는, 깊은 신앙을 가진 많은 안드레가 요구된다. 참으로 능력은 없으면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생각할 것을 던져주는 제자였다.
(4) 유대의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의 책 History)의 증언
① 에베소서(Ephesus) 지방에서 열심히 전도하였다.
② 맛디아가 식인종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를 구하려고 기적적인 항해를 하여 흑해 연안 코가스 산맥이 있는 스구디아(南Russia)에 도착한다. 기적으로 맏디아를 구출하고, 식인종도 거의다 신자로 구원시킨다. 그래서 스구디아와 비잔티움(터기의 수도 이스탄불)에 교회까지 세운다.
③ 그의 전도 공헌은 위경인 '안드레 행전'에 의해 알게 된다.
Greece에 와서(드레이스, 마케도니야, 고린도, 파트라스)에서 열심히 전도하여 총독인 '애기아테스의 부인'까지 예수를 믿게 한다. 총독은 그 분풀이로 안드레를 고문하고, 끝내 X형의 십자가에 밧줄로 묶여 A.D 69년 11월말에 이렇게 기도하며, 하늘나라로 갔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내가 뵈었고, 내가 사랑하고, 그안에 있는 나를 받으소서. 당신의 영원한 나라에 내 영혼을 받으소서 아멘" 이후 Catholic에서는 오늘날에도 11월 중에 하루를 {안드레의 날}로 지키며, 열심히 전도한다.
안드레의 일생은 자기를 바로 볼 줄 알았고,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을 천거하는 미덕을 보이며 살았다. 예수의 능력을 조금도 의심없이 믿는 큰 믿음과 사랑의 소유자로 살았다. 그리고 남을 인도하기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그는 폭넓으면서도 정열적이었고, 사랑과 믿음이 철철 넘쳐 흐르게 살다간 위대한 제자이다.
요 6: 9 한 어린아이의 보리떡 -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
안드레의 말은, 이 부분 기사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 곧, 그 때에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음식물이라고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으므로 이적으로만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주었다.
이 부분 기사가 이적이 아니고 단지 각 사람에게 있었던 음식물을 먹도록 하였다는 합리주의 해석은 안드레의 말에 반하는 것이니, 그것은 그릇된 해석이다.
1] 여기 한 아이가 있어
‘아이’라는 원어(파이다리온)는 ‘어린아이’라는 뜻이다.
2]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한 어린아이가 안드레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주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그 떡이 ‘보리로 만든’(크리디노스) 떡이라고 표현하였고 또 물고기도 다른 복음서들처럼 그냥 물고기(이크뒤스)가 아니고 ‘작은 물고기’(옵사리온)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좀 더 생생한 증언이다. 그 어린아이는 자기도 배가 고팠을 터인데 그것을 기꺼이 주님께 드렸을 것이다. 하나님의 기적은 이런 큰 믿음의 행위에서 일어났다.
(1) 보리떡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다.
(2) 물고기
"물고기"라고 한 것은 멸치와 같이 작은 고기라고 한다.
3]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안드레도 여기서 그리스도의 권능을 믿지 못하고 현실주의 견지에서 낙심하고 만 것이다.
요 6: 10 사람들로 앉게 하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
1]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무리를 앉힌 것은 그리스도의 긍휼의 표현이며, 그들이 앉은 것은 그들의 순종이다.
그들은, 그저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권위 있는 지도를 받으려고 감심으로 순종하였다. 언제나 신앙의 태도는 이런 것이다.
사람들은 마땅히 자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권위(權威)를 믿고 순종하며 기다려야 한다.
2]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마가복음 6: 39는 그곳에 ‘푸른 잔디’(클로로스 코르토스)가 있었다고 표현하였다.
* 막 6: 39 -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3]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여기 5,000명이란 것은, 여자와 아이들 외에 남자들만을 계수한 것이다.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5천명쯤 되었다. 마태복음 14: 21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명’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 무리의 전체 수는 약 2만여 명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 마 14: 21 -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이 때에 남자들만 계수한 것은, 여자들과 아이들의 인권을 무시한 것이 아니고, 남자들의 대표적 지위를 염두에 둔 것이다.
요 6: 11 축사하신 후에 -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
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1) "예수께서 떡을 가져"란 말씀은,
그 제공한 다섯 개의 보리떡을 받으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여기서 전연 없는 데서 창조하심이 아니고, 조금이라도 있는 것을 가지시고 많게 하셨다.
(2) "축사"하셨다는 말은
감사하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적은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감사하셨다.
* 마 14: 19 -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 마 15: 36 -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 고전 11: 24 -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감사하는 자리에 더 많은 축복이 임한다.
2]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떼어주시는 떡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 떡을 바친 어린아이가 만일 예수님 곁에 가까이 있었다면 그는 무릎을 치면서 놀라움과 감탄의 소리를 연발하였을 것이다.
“아! 내가 바친 그 떡과 물고기가 줄어들지 않고 예수님의 손에서 자꾸 나누어져 나온다!” 그는 집에 돌아간 후에도 그 놀라운 사건으로 인해 뛰는 가슴을 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 저녁 그 기적의 떡을 먹은 많은 사람이 그러했을 것이다.
3]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출애굽의 만나를 먹인 것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일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먹이셨다. 그래서 이 출애굽은 다시 종말에 있을 메시야의 오심을 나타낸다.
종말에 있을 메시야의 오심은 출애굽의 되풀이면서 태초의 낙원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보았다. 원래 낙원에서 포도 한 송이를 장정 수명이 들어도 못들 정도로 크다.
그러나 낙원에서의 모든 것을 죄로 다 잃어버렸다. 그런데 이 잃어버렸던 것들이 종말에 다 회복이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신학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오천 명을 기적적으로 먹이시니까 이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학적인 배경으로 즉각 판단했다.
이것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타났다. 그래서 모세와 같은 출애굽의 구원역사를 되풀이 할 것으로 보았다. 그중에 한 가지를 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진짜로 선지자로 판단했다.
그것도 언제 했느냐? 유월절에 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에 예수가 오천 명 군중을 먹이니까 그렇게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우리보다 신학적으로 더 상당히 깊은 깨달음인 것 같은데 예수는 그것이 틀렸다고 한다.
요 6: 12 남은 조각을 거두고 -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
예수님은 선물을 관대하게 주시지만 낭비하는 것을 금하신다. 물질이 헛되이 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1] 그들이 배부른 후에
허기진 무리에게 허기를 메꾸는 정도가 아니라 풍족하게 먹고 난 후에 몸이 나른하도록 부족함이 없이 먹었다는 의미이다.
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예수는 먹고 남은 음식물을 수거하는 데 무리에게 명령하지 않으셨다. 그들에게 명령하였다면 온갖 추태가 일어날 것이다.
사람은 허세가 강하여 남에게 보이기를 원한다.
3]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예수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먹는 음식이 남았다고 그냥 버리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과 또 음식을 먹은 후에는 앉았던 장소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 같다.
믿는 이들은 생활의 모든 면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요 6: 13 먹고 남은 조각 -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
주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남은 조각들을 거두었는데,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
1]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제자에게 남은 음식물을 수거하도록 명령하신 깊은 의도는 주님께 드리기 전의 음식과 드린 후의 변화를 그의 제자들에게 절실히 깨닫게 하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2]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저녁에 주께서 행하신 떡 기적은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먹게 한 풍성한 기적이었다. 유대 풍속에, 식사에 봉사하고 남은 음식은 그 봉사자들의 분깃이 되었다고 한다(Lightfoot, Hor., 3,302).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봉사한 12사도들은 저렇게 필경 받은 상급이 컸다.
요 6: 14 세상에 오실 선지자 -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
오병이어를 맛본 무리들의 증언을 통하여 무엇을 취하게 하심인가?
1]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예수께서 행하신 떡과 물고기 기적은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것은 네 권의 복음서들에 다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의심해서는 안 되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었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었을 뿐 아니라, 풍성한 기적이었다. 주께서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들이 열두 바구니에 차게 하셨다.
떡 기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사람으로서 이런 기적을 행한 자가 없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이러한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기적은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굳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우리는 이 기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육신적, 물질적 차원이 아니고 영혼의 구원에 있었다. 그는 그를 붙들어 임금을 삼으려는 무리들을 피하셨다.
그는 단지 정치적, 경제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셨고 그보다 더 근원적 문제인 인간의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셨다. 교회는 단지 세상적 유익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고 구원받은 자들을 진리의 교훈 안에서 양육하기 위해 존재한다.
2]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 선지자"에 대하여는 신 18: 15에 예언되었으니 곧, 메시아를 가리킨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았기 때문에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였다(15절 참조). 그 무리들이 예수를 ‘그 선지자’라고 말한 것은 그의 기적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그러니까 선지자로서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았다.
예수 당시에나 신약시대 이후까지도 유대에 스스로를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이 나온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모세의 이적들을 되풀이한다고 주장하며 바로 그를 통해서 자기들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고 주장을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 사람들은 예수의 하신 일을 표적으로 보았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의 표적으로 보았다. 그런데 왜 예수는 너희가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느냐? 제 2의 모세로서 제2의 출애굽의 구원을 하는 그 정도의 표적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의미로 예수가 구원자임을 생명을 가져다줌을 나타내주는 표적이다.
떡은 무엇인가? 떡의 기능은 생명이다. 떡은 살기 위한 것이다. 떡의 상징성은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떡을 먹이게 했다는 사건은 예수가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육신적인 충분한 양식을 가져다주는 제2의 출애굽을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그런 구원자가 아니라 그보다 더 훨씬 깊고 근본적인 구원자라는 말이다.
요 6: 15 다시 혼자 산으로 -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
예수께서는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들을 피하여 혼자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다.
1]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 제국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과 가난으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였던 것 같다. 사회적 평안과 물질적 유여함은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의 관심사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보다 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것은 죄 문제이다.
죄는 불행의 근본 원인이다. 죄 문제의 해결 없이는 참 평안과 행복이 없다. 예수께서는 바로 우리의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셨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셨다.
2]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았으나, 진리대로 바로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저희의 물질 문제나 해결하여 주실 메시아로 알았던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니, 그가 거기 응하시지 않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그 떡 먹이신 이적이 얼마나 위대하였던 것을 증명해 준다.
그들이 그 권능을 본 뒤에는, 로마 정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막바로 예수님을 유대의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3] 다시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께서 거기에 응하시지 않은 것은, 그가 군중의 메시아 관념이 육적인 것을 합당치 않게 보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리를 떠나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다. 다른 복음서들은 그가 거기에서 기도하셨다고 증언한다.
* 마 14: 23 -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 막 6: 46 -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