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삶
‘시간이 흐르는 대로/ 시간을 따르며 살아가리라// 시간의 흐름을 겪고/ 시간의 입김을 마시고/ 시간이 던져 주는 벽을 대하고/ 시간의 여신이 주는 물을 마시리라// 봄과 함께 파릇파릇해지고/ 여름과 함께 초록불로 타오르고/ 가을과 함께 고개 숙여 익어가고/ 겨울과 함께 하얗게 떨리라// 내가 발 딛고 선 대지의/ 세월 속으로 걸어 들어가리라// 가난의 세월에는 꿈을 꾸고/ 독재의 세월에는 온몸으로 저항하고/ 풍요의 세월에는 적은 소유로 충만하고/ 민주의 세월에는 국경 넘어 눈물이 되고/ 탐욕의 세월에는 다시 광야의 목소리가 되리라//오 나는 세월이 지나가는 대로/ 세월 따라 한결같이 살고 죽으리라’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 ‘시간이 흐르는 대로’를 조용히 낭송하며 음미해본다. ‘유유자적’하라는 말과 유사하다가도 결코 주저하거나 멈추라는 뜻은 아닌 것 같다. 자연 예찬론자나 환경운동가로 여겨지는 소로는 실제로 인생을 자유롭게 살고자 갈망했던 사람이다. 자유롭게 사는 것이 그의 소중한 가치였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고립을 자초했고 사회와 싸웠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에서 남쪽으로 월든(Walden)이라는 작은 호수가 있다. 물이 들어온 내력과 나가는 길을 파악하기 힘든 신비의 호수이다. 1845년 27세의 젊은 시인이 호숫가 숲속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정착한다. 처음 집을 지을 때 자신의 힘과 최소 비용으로 땅을 파고 돌을 나르고 도끼질하는 등 쉽지 않은 모험을 감행했다. 그는 사람이 집과 재산의 노예라고 여겨 작은 집을 짓고 농사지어 자급자족하면서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노예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그것이 바로 소로가 생각하는 자유인의 길이다. 그는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서의 삶을 낱낱이 기록했다. 그 기록이 명작 ‘월든’이다.
소로는 뼛속까지 혁명적인 인물이다. 그는 일과 명예와 돈과 통념의 노예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숲속에 혼자서 둥지를 튼 것이 혁명과는 도통 상관이 없이 보이지만, 그것은 사회 통념의 뿌리를 흔드는 혁명이었다. 사회 속에서 부지런히 일해 경쟁에서 이기고 성공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일반적인 상식을 송두리째 부정했기 때문이다.
소로의 부모는 허세 부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문학과 학식을 중히 여겼다. 그들은 또 산책하면서 자연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부모의 성격과 취미가 자식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소로는 열두 살 무렵부터 홀로 엽총이나 낚싯대를 메고 인적 없는 후미진 숲과 강 주위를 휘젓고 다녔다. 어린 시절에 월든 호수를 방문하기도 했다.
1833년 열여섯 살의 소로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뒤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그의 대학 시절이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는 “나의 육신은 하버드 대학의 일원이었지만, 내 마음과 혼은 소년 시절의 정경으로 멀리 떠나 있었다. 공부하는 데 헌신해야 할 시간들이 내 고향 마을의 숲을 찾아 헤매고 호수와 시내를 탐험하는 데 소비되었다.”라고 말했다.
소로에게 일생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37년 에머슨과 만남이었다. 소로의 여동생이 에머슨의 강연을 들었는데, 강연 내용이 오빠가 쓴 글과 같다고 생각했다. 이에 동생의 글이 에머슨에게 전해진다. 어느 날 에머슨은 첫 만남에 소로가 예사로운 젊은이가 아님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에머슨은 소로의 사회와 종교에 대한 탁월한 견해,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두 사람의 우정은 시작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소로는 생계를 위해 교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콩코드의 마을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체벌해야만 하는 현실을 견딜 수 없어 2주 만에 그만두었다. 형과 함께 사설 학교를 몇 년 운영하지만 형이 몸이 아프게 되자 그것마저 벗어던지고 만다. 소로는 이제 시인이자 박물학자로서 식물표본상자와 쌍안경을 들고 새로운 길을 걷는다. 이 무렵 소로는 에머슨이 주도하고 있는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 운동에 매료하고 있었다.
소로는 3년간 에머슨의 집에서 기거하는 동안 콩코드의 초월주의 그룹이 만드는 잡지에 시와 산문을 실의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했다. 소로는 대중보다는 개인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인간보다는 자연을 중시했는데, 이러한 사상적 성격은 초월주의와 일치되었다.
소로는 원래가 모험가적 성향이 강했다. 형 존과 함께 카누를 타고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을 탐험했고, 안정된 교사의 길을 접고 시인의 길을 택했다.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생활한 것은 모험의 정점이었다. 그의 위대한 모험도 그에게 안락한 생활을 제공해주지는 못했다. 뉴욕에서의 작가생활은 실패했다. 그는 오직 모험을 통해 인생을 즐긴 사람이었다.
소로는 잘못된 것을 그냥 두지 못했다. 그는 월든 숲에서 살던 1846년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 납부를 거절한 죄로 투옥당한 적이 있으며, 1859년에는 노예제도 폐지 운동가 존 브라운을 위해 탄원서를 의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로의 근본적인 저항은 ‘월든’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소로의 저항이 잘못된 제도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든 인간의 그릇된 사고방식과의 투쟁이었다.
소로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된다. 소로의 장례식에서 에머슨은 조사를 통해 25년 동안 우정을 나눴던 친구를 회고했다. 에머슨은 소로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작가로서의 업적은 적극적으로 칭찬하지 않았고, 시인으로서 소로는 자연스러운 서정과 기교가 모자라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말은 큰 울림이 있었다. “가장 숭고한 사귐으로 자신의 영혼을 만들고, 짧은 생을 통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지식이 있는 그곳, 덕이 있는 그곳, 아름다움이 있는 그곳이 바로 그의 영혼의 집입니다.”
겉으로 보면 소로의 삶은 결코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소로는 ‘문학적인 혁명가’였다. 정치적 혁명가나 종교적 혁명가가 주로 한 방향으로의 전환을 꿈꾼다면, 문학적이나 예술적 혁명가는 맹목적으로 한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끊임없이 진정 원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소로는 평생 추구하고 탐색했던 ‘자유로운 삶’을 위해 자신을 바친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인생을 끌고 나가는 전사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알고, 그걸 위해 자기 삶 전체를 던질 수 있는 욕망이 있는 한 그자는 생명이 살아 있고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죽기 전까지 삶을 치열하게 사랑한다. 소로의 자유의지가 ‘자유로운 삶’이라면 나의 자유의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나의 자유의지를 위해 무슨 일을 해 왔으며, 현재 하고 있는가, 라고 내 자신에게 질문해 본다. 나의 현재의 삶은 얼마나 나의 자유의지를 불태우고 있는지 깊이 고민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