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미전 사랑방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스크랩 삼국지의 성지에서 제갈량과 유비를 만나다
미전 추천 0 조회 29 10.06.15 19: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3일간의 중국 도시기행 1] 청두(成都) 첫날 오전: 무후사
 

 

▲ 무후사 가장 깊숙한 곳에 모셔져 있는 제갈량상. 무후사는 제갈량의 시호를 따서 지어졌다.

 

▲ '삼국성지'로 불리는 무후사의 입구. 현판은 유비의 묘를 뜻하는 한소열묘라고 적혀져 있다.

 

쓰촨(四川)은 우리에게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이 활약한 무대로 잘 알려졌다. 청두(成都)는 유비가 세운 촉한(蜀漢)의 수도이자 쓰촨성의 성도(省都)다. 청두는 기원전 7~8세기 촉나라가 흥기하면서 중국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3세기 초 유비는 유장을 패퇴시키고 청두에 촉한을 건국하여 천하통일을 꿈꾸었지만, 대업을 이루지 못한 채 양쯔강(長江) 백제성에서 불귀의 객이 됐다.

촉한은 40여년 만에 멸망했지만 청두의 지명은 오늘날까지 변치 않고 남아있다. 유구한 중국 역사 속에서 옛 지명을 지키고 있는 곳은 청두, 뤄양(洛陽), 쉬창(許昌)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청두에 와서 먼저 가봐야 할 곳은 단연 무후사(武候祠, 우허우츠)다. 무후사에는 제갈량의 사당과 유비의 묘가 함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무후사 입구에 도착하면 한소열묘(漢昭烈廟)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한소열제(漢昭烈帝)는 유비 사후 추존된 시호로, 한소열묘는 곧 유비 묘를 가리킨다.

제갈량 사당인 무후사 입구 명칭이 어떻게 유비 묘로 불리는 것일까. 본래 청두의 제갈량 사당은 유비의 아들 유선에 의해 도시 외곽에 작은 봉분 형태로 조성됐었다.

5세기 초 남북조시대 청두에 성한(成漢)을 건국한 이웅은 제갈량의 사당이 도시 교외에 있어 백성들이 찾아 가기 힘든 것을 아쉬워 해 청두 시내로 무후사를 옮겼다. 이를 다시 명나라 초기에 오늘의 자리로 옮겨오면서 한소열묘와 합치게 됐다.

 

▲ 유비전 대문에 걸려 있는 '명랑천고' 현판. '명'자는 눈목 변의 밝을 명으로 쓰여 있다.

 

▲ 악비가 쓴 전출사표. 후출사표와 더불어 고금에 길이 남는 명문으로 꼽힌다.

 

재미있는 것은 세상에 한소열묘보다는 무후사로 더 알려진 현실이다. 사실 제갈량의 묘는 제갈량이 죽은 산시(陝西)성 한중(漢中)시 멘(勉)현 딩준산(定軍山)에 있다.

제갈량을 기르는 사당도 중국 각지에 수십 곳이나 된다. 유비의 묘보다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로 더 알려진 이유는 후대인들이 제갈량을 더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삼국지연의> 뿐만 아니라 중국의 전설과 설화에는 제갈량이 자주 등장한다. 전쟁터에서 식솔마저 여러 차례 내팽개친 유비보다 죽을 때까지 의리를 지키고 충심을 다한 제갈량을 민중들은 더욱 숭상하고 추모하고 있다. 지금도 대다수 중국인들은 무후사가 제갈량 사당인 것은 알아도 유비의 묘가 있다는 것은 모를 정도다.

'삼국성지'(三國聖地)라고 새겨진 커다란 돌과 사자 석상을 통과해 무후사 안으로 들어섰다. 빽빽하게 자라고 있는 교목들 사이로 난 좁은 길의 끝에 유비전이 보였다.

유비전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명랑천고'(明良千古)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명군양신, 유전천고'(明君良臣, 流傳千古)의 줄임말로, 명군과 어진 신하가 만나 오래도록 모범이 됐다는 뜻이다.

'명'자를 자세히 보면 눈목 변의 밝을 명으로 쓰여 있다. 날일 변의 명은 자연의 밝음이지만 눈목 변의 명은 인지의 밝음으로 유비의 인덕이 더욱 빛났음을 의미한다.

문 안쪽 바로 옆 벽면에는 출사표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제갈량이 위나라 정벌에 나서면서 후주(後主) 유선에 바친 출사표는 고금의 명문으로 통한다. 후대 수많은 문인들이 출사표를 되새겨 남겼지만, 무후사의 출사표는 남송의 장군 악비(岳飛)가 쓴 친필이다.

악비가 쓴 출사표는 처음에는 해서체로 단정하게 써나가다가 뒤로 가면 행서체로 바뀐다. 악비는 북방 유목민족에게 시달림을 당했던 남송의 현실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기에,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출사표를 써나갔다.
 

▲ 유비전 전각에는 중앙에는 유비상이, 왼쪽에는 유심상이 안치되어 있다. 유선상은 후대인들이 계속 파괴해 버려 지금은 아예 없애버렸다.

 

▲ 긴 귀와 수염에 후덕한 풍모가 느껴지는 유비상.

 

유비전(昭烈殿) 전각 안에는 황제의 면류관을 쓰고 황금색 곤룡포를 입은 유비 상이 안치되어 있다. 오늘날 현존하는 무후사 내 모든 인물상은 청나라 때 찰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인물상이 그러하듯 유비 상은 긴 귀와 수염을 강조하고 후덕한 얼굴 표정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유비상 왼쪽에는 유비의 손자인 유심(劉諶)의 상이 있다. 제갈량이 죽고 위나라 대군이 침범하자, 유선은 목숨이 아까워 옥새를 들고 나가 항복하려 했다. 유심은 이를 극렬히 반대하고 청두의 군사를 모두 모아 결사항전하려 했다.

유선과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유심은 유비묘를 찾아와 대성통곡했다. 집으로 돌아가서는 처자식을 모두 죽이고 자신도 자결함으로써 촉한 남아의 기개를 보여주었다.

특이한 점은 유비상 오른쪽이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원래 유비전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유선의 좌상이 놓여 있었다. 헌데 한 해가 채 넘어가기 전에 누군가 유선상을 훼손해 버렸다.

지방관청은 바로 유선상을 복원했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다시 파괴되었다. 한동안 새로 만들고 없애지기를 반복하다가, 청나라에 들어와 중건할 때 유선상을 아예 만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천신만고 끝에 이룬 왕업을 손쉽게 내다버린 유선에 대한 청두 사람들의 반감이 어떠한지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지금도 유선 상 자리에는 커다란 나무뿌리 하나만 쓸쓸히 놓여 있다. 유약하고 무능했던 유선을 꾸짖는 듯한 후대인의 회초리처럼 냉엄하다.

 

▲ 후리부리 한 두 눈과 검은 얼굴 피부가 특징인 장비상.

 

▲ 유비전 오른편 회랑에는 조자룡을 좌장으로 한 14명의 촉한 무신상이 전시되어 있다.

 
유비상이 있는 대청의 양 옆 방에는 관우와 장비의 상이 배치되어 있다.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에 모여 같은 장소, 같은 날에 죽을 것을 결의했다. 비록 삼형제는 한시에 죽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무후사 유비전 아래 모여 대업 성취를 위해 분투하는 듯하다. 관우와 장비 상 바로 앞에는 그들의 아들과 손자 상도 안치되어 있다.

유비전 대청과 이어진 좌우 긴 회랑에는 문신무장랑 28좌상도 있다. 문신상에는 염통을 위시하여 14명의 촉한 문신들이, 무장상에는 조자룡을 좌장으로 14명의 촉한 무신들이 줄지어 앉아있다.

각 좌상은 관직에 맞는 복장, 인물과 어울리는 얼굴 표정 등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실로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촉한의 기라성 같은 영웅호걸들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장소인 셈이다.

무후사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7세기 청나라 강희제 때이다. 명나라 말기 농민봉기로 폐허가 된 무후사를 강희제가 직접 명령하여 대대적으로 중건, 확장했다. 중건 후 무후사는 크게 유비전과 제갈량전으로 나누어졌는데, 이를 통해 군신 합장사당의 특색을 갖추게 됐다.

무후사의 명성과 달리 유비전에 앞에 배치된 것은 무후사가 뒤늦게 이전되어 제갈량전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본래 유비의 묘였던 장소였기에 유비전은 제갈량전보다 호화롭고 위엄이 넘친다.

유비전의 전체적인 배치도 임금인 유비를 중심으로 관우, 장비와 녹을 받는 신하들이 도열해 있어 중요한 의식을 집전하는 듯하다.
 

 ▲ 무후사 대문의 현판은 쓰촨 출신 역사학자이자 문인인 궈모뤄가 썼다.

 

▲ 제갈량전에는 중앙에 제갈량이 있고, 오른쪽에 아들, 왼쪽에 손자를 거느리고 있다.

 

무후사는 유비전 바로 뒤에 있다. 화려하고 위엄 있는 유비전과 달리 무후사는 상대적으로 고아하고 수수하다. 기백이 넘치는 무후사의 현판은 20세기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자 문인인 궈모뤄(郭沫若)가 썼다. 궈는 쓰촨 출신으로 청소년기를 청두에서 보내 틈만 나면 무후사를 찾았다고 한다.

무후사의 제갈량전 안에 들어가면 제갈량상이 중앙에 앉아 있다. 제갈량상은 온후한 표정에 제갈건을 쓰고 제갈선을 들고 있어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눈에 띄는 것은 제갈량상 곁에 있는 쇠북이다.

'제갈고'라 불리는 이 북은 제갈량이 직접 발명했다. 전시에는 군대의 사기를 북돋우는데 쓰고 평시에는 엎어서 솥으로 쓰거나 잠 잘 때 베고 자서 멀리서 달려오는 말발굽소리를 감지했다고 한다.

오늘날도 제갈량이 만인의 존경을 받는 것은 유비를 위한 무한한 충성심만이 아니다. 제갈고를 발명한 것처럼 정치와 평소 생활에서 실리적이고 미래를 꿰드는 안목을 지녔으며 백성들을 아꼈기 때문이다.

윈난(雲南)의 만족을 정벌할 때 맹획을 일곱 번 잡아 일곱 번 놓아준 '칠금칠종' 고사는 앞날을 내다보는 제갈량의 혜안을 잘 보여준다.

전투를 벌여 적의 성을 함락하는 것보다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스스로 성문을 열게 하는 위민(爲民)정책은 제갈량의 기본 통치철학이었다.

제갈량은 전쟁 포로를 인간적으로 처우하고 점령지 주민을 우대하여 짧은 시일에 촉한의 영역을 넓혀갔다. 후대인들이 제갈량전 안에 남긴 편액과 현판은 이런 제갈량의 애민(愛民)사상을 기리고 찬양하는 내용이다.

 

▲ 무후사는 육열식 배열구조로 된 청나라식 전통 정원이다. 무후사에는 쉴 곳이 도처에 있어 편안히 감상할 수 있다.

 

▲ 1997년 무후사로 자리를 옮긴 삼의묘에는 언제나 향냄새가 진동한다.

 

무후사는 남북을 가로 질러 대문과 이(二)문, 전각, 유비전, 제갈량전 등 육열식 배열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양조사합의 건축구조로 청나라 때 유행했었다. 전각은 갈산식 지붕에 처마에 종고(鐘鼓)를 달고 좌우 회랑에 진귀한 금수(禽獸)가 석조로 장식되어 있다.

무후사는 역대 문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다. 760년 안사의 난을 피해 청두에 정착한 시성 두보도 무후사를 자주 찾았다. 그는 제갈량을 기리며 주옥같은 시 한 편을 남겼다.

세 번 다시 찾은 번거로운 일도 천하 위한 계책이요, (三顧頻煩天下計)
두 임금을 섬겨 나라를 구하려는 노신의 마음을 보여주셨네. (兩朝開濟老臣心)
전쟁에 나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出師未捷身先死)
후세의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을 옷깃에 적시게 하는구나. (長使英雄淚滿襟)
- '촉상'(蜀相) 중에서

제갈량전 뒤에는 삼의묘(三義廟)가 있다. 삼의묘는 유비, 관우, 장비를 추모하는 사당이다. 삼의묘 내에는 유비, 관우, 장비의 좌상이 함께 모셔져 있다. 묘당 마당에는 도원결의부터 유비의 죽음까지 삼형제와 관련된 다양한 고사를 벽화로 전시하여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본래 삼의묘는 청나라 강희제 때 티두제(提督街)에 조성됐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의 파괴로 폐허가 된 것을 1997년 무후사 내로 이전하여 복원했다. 유비전이나 제갈량전과 달리 절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 있어 언제나 관광객이 절하면서 꼽은 향냄새로 진동한다.

아쉬운 점은 최근에 만들어진 삼형제의 좌상이 유비전과 제갈량전 내에 있는 찰흙상보다 예술적 가치가 훨씬 떨어진다는 것이다. 얼굴 표정이나 인물 묘사가 단조롭고 조악하여 청나라 때 만들어진 찰흙상과는 대조된다.

 

▲ 삼의묘에서 한소열묘로 가는 붉은 벽담 길. 청두를 소개하는 TV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명소다.

 

▲ 능원으로 들어가는 전돌 안에 있는 비석은 청나라 강희제가 친히 쓴 비문이다.

 

삼의묘를 나와 걸음을 유비의 묘로 옮겼다. 도중 지나는 붉은 벽담 사이의 길은 무후사의 숨은 진주다. 수백 년 된 대나무 숲 사이에 닦여진 길은 1980년대 초반에 건설됐다.

그리 길지 않은 연륜을 지녔지만 회색 돌바닥, 붉은 벽, 푸른 대나무 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걷는 이의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이 길은 청두를 소개하는 선전 광고에도 자주 등장하는 명소이기도 하다.

'한소열황제지릉'이라 새겨진 비석이 박힌 전돌 안에는 유비의 묘가 있다. 비석은 강희제가 직접 쓴 친필로 새겨진 것이다. 유비묘는 본래 둘레 180m, 높이 12m의 웅장한 능원이었다. 지금은 벽돌담에 둘러싸여 볼품없이 변했지만, 한때 중국 서남부에서 가장 큰 황제릉이었다.

무덤을 조성한 지 1700여년이 지났지만 유비묘는 한 번도 도굴되지 않은 황제릉으로 유명하다. 그 이유로 재미있는 두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첫째는 서민적이었던 유비의 평소 생활에 비추어 무덤에 금은보화를 묻을 리가 없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다. 실제 위나라나 오나라에 비해 국력이 뒤쳐졌던 촉한은 유비 사후에 화려한 능원 건설을 엄두내지 못 냈다.

둘째는 묘를 도굴하려다 비명횡사한 도굴꾼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도굴을 꺼려했다는 것이다. 청두 민중들 사이에는 유비묘 위에 자란 나무를 꺾었다고 해서 후손이 팔 병신이 됐거나 무덤 풀을 뜯어먹은 양이 돌연 죽었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유비묘를 둘러싼 무서운 전설은 도굴꾼으로 하여금 의욕을 상실케 하여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전되어 왔다.

 

▲ 삼국문물박물관에는 쓰촨 뿐만 아니라 중국 각지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희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 중국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설창용. 오직 쓰촨에서만 볼 수 있는 한나라 유물이다.

 

유비릉 앞에는 삼국문물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안에는 청두뿐만 아니라 중국 각지에서 출토된 한나라 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후한의 멸망부터 삼국의 주요 전투, 당시의 문화풍속 등을 다양한 사진과 그래픽으로 정리하여 보는 이의 이해를 돕고 있다. 북벌을 위해 절벽에 찍어 만든 나무로 된 삭도 모형은 제갈량이 얼마나 힘들게 위나라를 치러 갔는지 잘 보여준다.

박물관 내 유물 중 으뜸은 '설창용'(說唱俑)이다. 설창용은 청두 근교 톈후이산(天回山)의 한 후한시대 묘소에서 발굴됐는데, 중국 국보 문화재 중 하나다. 높이 55㎝에 채색된 토용이었지만, 발견 당시에는 이미 탈색된 상태였다.

오른 발을 치켜들고 왼손에 든 북을 치며 파안대소 하는 설창용의 모습은 너무나 생생하고 유쾌하다. 고대 중국인의 해학과 유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오직 쓰촨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 여행Tip 1
 
무후사는 청두(成都)시 서남쪽 우허우다제(武侯大街) 231호에 위치하고 있다. 무후사의 개방시간은 매일 8:00~18:00이다. 입장료는 60위안(한화 약 1만800원)으로 단일 유적으로는 좀 비싼 편이다.

최근에는 무후사를 찾는 한국인이 늘고 있어 한국어가 가능한 가이드까지 경내에서 활동하고 있다. 가이드비는 100위안(1만8000원)이다.

무후사는 둘러보는 시간은 넉넉히 잡으면 2시간 반 정도가 소요된다. 경내 곳곳에는 그늘지고 쉴 곳이 많고 찻집도 있어 찾는 이의 편의를 돕고 있다.

무후사로 가는 교통편은 다양하다. 버스는 시내 각지에서 출발하는 26, 53, 57, 59, 82, 213, 304, 306번 등의 버스가 우허우츠 정거장에 도착하거나 지난다. 택시를 탈 경우 도심에서는 10위안(1800원), 청두기차역에서는 20위안이면 도착할 수 있다.
 


▲ 홍등을 걸어놓고 여행객을 유혹하는 진리의 식당과 카페. 밤에는 홍등에 불을 켜서 낭만스런 운치를 연출한다.



▲ 민족거리에는 티베트 관련 기념품과 라마불교 제기를 파는 상점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 여행Tip 2

무후사에서 진한 역사의 향기를 맛보고 나오면, 또 다른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여행객의 발목을 잡는다. 무후사 바로 옆에는 진리(錦里)는 옛 청두의 전통 저잣거리를 복원한 장소다.

진리는 2004년에 문을 열었는데, 입구에는 붉은 색 도포를 입은 점쟁이가 찾는 이를 맞는다. 대문을 들어서면 식당, 찻집, 상점, 술집, 객잔, 노천무대 등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노천가게에는 쓰촨과 청두에서만 볼 수 있는 먹거리와 기념품이 판매되고 있다. 먹거리 음식점 중 산다파오(三大?)라 불리는 떡집은 진리에서 시작되어 전국 각지에 분점을 늘려가고 있다.

진리의 상점 중 그림자 인형극에 쓰이는 인형과 천극(川劇) 관련 캐릭터 상품을 파는 가게는 놓쳐서는 안 될 장소다. 밤에는 가게 입구마다 걸어놓은 홍등에 불이 들어와 낭만 넘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무후사 맞은편에는 민족거리(民族街)가 있다. 이곳이 민족거리로 불리게 된 것은 티베트(西藏)자치구정부의 쓰촨사무소와 쓰촨성 내 티베트자치주나 자치현정부 청두사무소가 몰려 있기 때문이다.

민족거리는 중국에서 세 번째로 큰 소수민족대학인 시난(西南)민족대학 후문과 접해 있어 티베트인, 강(羌)족, 이(彛)족 등이 몰려 살고 있다.

2006년 7월 칭짱(靑藏)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청두는 티베트로 들어가는 주요 관문이었다. 민족거리에는 라싸로 들어가려는 티베트인으로 언제나 붐볐다. 촨장(川藏)공로로 출발하는 사람들은 무사평원을 비는 라마불교 제기를 사러 민족거리로 왔다.

하지만 칭짱철도의 개통은 민족거리의 상권을 몰락시켰다. 특히 작년 3월에 일어난 티베트 독립시위 이후 중국정부의 감시와 통제가 장기간 계속되면서 몇 안 되던 티베트식 식당들마저 문을 닫았다. 민족거리의 쇠락이 몰락하는 티베트의 현실을 보여 주는 듯 해 마음이 짠해진다.

* 덧붙이는 말:
1) 중국 내 꼭 가볼만한 도시나 지역 18곳을 선정하여 소개합니다. 선정된 곳은 한국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거나 한국인이 쉽게 가볼 수 없는 중국 내륙지역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2) 한 도시에 머무는 시간을 3일로 한정해서 그 도시의 역사, 문화, 풍속 등을 살펴보고, 현지인의 인간적 향취를 느낄 수 있는 장소만을 꼽았습니다. 단순한 여행기가 아닌 약간은 무거운 도시 비평기이자, 한 도시의 인문지리, 역사문화, 사회풍습 등을 담은 기행문입니다.
3) 필자는 1996년부터 중국에 거주하면서 경영법률 컨설턴트로 일하며, 지난 8년간 르포 라이터와 취재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 쓰촨성', EBS '세계테마기행: 윈난성', 경인OBS '사진 한 장 속의 세계: 중국·인도' 등을 기획, 취재했습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