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것과 가른 지혜(1-14)
클린스의 주석에서 28장을 엘리후의 말로 취급하며 이 장의 위치를 37장 이후에 배치합니다. 엘리후의 말로 보는 이유를 첫째, 친구나 청중에게 하는 말이 없고, 둘째, 고통에 대한 호소나 괴로움의 감정이 표출되지 않았다는 점을 듭니다. 하지만 그의 접근법은 28장에서 결여된 것, 즉 ‘무엇이 아닌가’에 초점을 맞춘 방식입니다.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28장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그리고 28장을 욥의 말로 이해했을 때 어떤 의미가 도출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칠십인역(LXX)과 사해문서에서 발견된 아람어역 욥기(11QtgJob)도 마소라 본문(MT)과 동일한 배치를 하고 있습니다. 즉, 28장을 엘리후의 말로 볼 수 있는 외적 증거는 없습니다. 따라서 28장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28장이 누구의 말이냐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의 틀 안에서 어떻게 이해되는가입니다.
1은이 나는 곳이 있고 금을 제련하는 곳이 있으며 2철은 흙에서 캐내고 동은 돌에서 녹여 얻느니라 3사람은 어둠을 뚫고 모든 것을 끝까지 탐지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있는 광석도 탐지하되 4그는 사람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떠나 갱도를 깊이 뚫고 발길이 닿지 않는 곳 사람이 없는 곳에 매달려 흔들리느니라 5음식은 땅으로부터 나오나 그 밑은 불처럼 변하였도다 6그 돌에는 청옥이 있고 사금도 있으며 7그 길은 솔개도 알지 못하고 매의 눈도 보지 못하며 8용맹스러운 짐승도 밟지 못하였고 사나운 사자도 그리로 지나가지 못하였느니라 9사람이 굳은 바위에 손을 대고 산을 뿌리까지 뒤엎으며 10반석에 수로를 터서 각종 보물을 눈으로 발견하고 11누수를 막아 스며 나가지 않게 하고 감추어져 있던 것을 밝은 데로 끌어내느니라 12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13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 14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1-14)
본문은 동물들과는 다른 인간의 탁월함에 대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 주제는 규범적 지혜에 속합니다. 규범적 지혜는 피조물 중 인간의 특별함과 위대함에 주목합니다. 지혜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구문의 단위를 1-11절이 아니라 1-14절로 보면 완전히 다른 관점과 해석이 나타납니다. 특히 12절은 20절에서도 반복되며 그 뒤 이어지는 두 절(13-14절과 21-22절)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집니다. 이것을 일종의 후렴구로 본다면, 1-11절을 마무리하며 지금까지 언급된 주제들을 반대로 뒤집는 수사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1-2절은 은과 금, 철과 구리 등 귀한 광석들은 모두 저마다의 출처와 기원이 있다는 주제를 다룹니다. 이것은 5-6절에서 음식과 불, 그리고 청옥과 사금의 기원과 출처에 대해 언급하는 것에서 반복됩니다. 3-4절은 사람의 탁월한 능력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캄캄한 굴을 헤매거나 아주 위험한 골짜기의 벼랑에 매달려서라도 그 귀한 광석을 찾아내고야 맙니다. 3-4절의 인간은 7-8절의 동물들과 대비됩니다. 독수리와 매는 하늘을 높이 날고 멀리 보는 대단한 눈을 가졌지만 그 능력으로도 광석을 찾지는 못합니다. 사자처럼 매우 용맹한 동물들도 보석이 있는 험한 길로 다니지 않고 다닐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광석이 얼마나 귀한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압니다. 그래서 바위를 부수고 돌을 깨고, 물의 흐름을 막고 어둔 곳에 빛을 비추고, 심지어 산을 거꾸로 뒤집어서라도 그 귀한 보물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고야 맙니다(9-11). 귀한 것을 귀하게 여기고 어떠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찾고야 마는 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규범적 지혜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에 12절의 말을 덧붙입니다. 이렇게 보석이 귀하다는 것을 알고 찾아다니는 인간이 왜 지혜가 어디 있는지 모르며 보석보다 귀한 지혜를 찾아다니지 않습니까? 지혜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점에서 인간과 동물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은 반성적 지혜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대단하고 탁월한 피조물이라 해도 지혜의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13절의 ‘에레크’를 개역개정은 “길”로 번역했는데, 이 히브리어 단어는가치(value)를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레위기와 민수기에서는 은의 무게를 정하는 기준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레 5:15, 18, 25; 27:2-17; 민 18:16 등). 왕하 23:35에서는 각 사람의 가치에 따라 세금을 부과할 때 이 단어가 쓰이며, 시편 55:13에서는 동등한 가치가 있는 동료를 지칭할 때 ‘에레크’가 사용됩니다. 따라서 13a절은 ‘사람은 지혜의 가치를 알지 못하며’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또한 이 지혜는 인간의 영역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입니다(13b). “사람 사는 땅”에서 지혜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는 표현입니다. 규범적 지혜의 개념과는 상충 됩니다. 지혜는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가르쳐주듯이 하나님께서 ‘환상’ 등의 직접 계시를 통해서나 조상들의 축적된 지식을 통해, 혹은 자연의 패턴을 관찰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의 어휘들은 인간과 인간의 생활 영역 안에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28장은 이러한 규범적 지혜와는 전혀 다른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지혜를 알수 없으며 인간의 영역 안에서는 지혜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확히 반성적 지혜의 가르침이며, 욥이 계속 지적한 ‘인간 인식의 한계’와 동일한 이야기입니다(참고로, 욥 38-41장의 하나님의 언설에서 사람이 살지 않고 살 수 없는 야생의 세계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28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생활 영역을 벗어난 피조세계, 즉 인간이 살 수 없는 “깊은 물”과 “바다”조차 지혜를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14).
무엇보다 귀한 지혜의 가치(15-22)
세상의 지식과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자들을 택하여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고전 1:27). 지혜와 명철의 정체를 깨닫고 하나님께 구함으로 은혜의 선물을 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15순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리니 16오빌의 금이나 귀한 청옥수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겠고 17황금이나 수정이라도 비교할 수 없고 정금 장식품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18진주와 벽옥으로도 비길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산호보다 귀하구나 19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헤아리지 못하리라 20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고 21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려졌으며 22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15-22)
지혜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는 그 가치에 관한 것입니다. 그 어떤 값비싼 금이나 제아무리 많은 양의 은이라도 지혜에 견줄 수는 없습니다(15). 오피르의 금, 루비나 사파이어, 황금과 유리, 산호와 수정, 에티오피아의 토파즈와 순금조차 지혜의 값어치를 감당하지 못합니다(16-19). 이 귀한 것을 대체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묻고(20),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뒤따릅니다. 지혜는 모든 피조물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을 날고 먼 곳까지 내다볼 수 있는 새들조차 지혜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13절의 “사람 사는 땅”과 대비되는 죽음의 공간마저 지혜가 발견할 수 있는 장소를 모릅니다(22).
지혜란 무엇인가(23-28)
성도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성령의 지혜와 명철을 따라 행하며, 세상의 모든 죄악을 멀리함으로 지혜와 명철이 충만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성도가 탐욕을 추구하면 지혜와 명철을 상실한 것임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23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24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살피시며 25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26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 27그 때에 그가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탐구하셨고 28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23-28)
‘지혜의 찬가’ 마지막은 12절과 20절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마무리합니다. 지혜는 어디 있으며 어디에서 발견됩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23). 온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온 세계의 구석구석을 다 알고 계시며(24), 그분의 주권 하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25). 모든 것을 결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바람을 얼마나 약하게 불게 할까 얼마나 세게 불게 할까, 바다와 강의 물의 양을 정하시고 매번 내리는 비의 양을 정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26a). 언제 어디서 천둥번개가 칠지 그 세밀한 것 하나하나까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 심지어 인간의 활동 반경을 벗어난 지역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습니다(25). 지혜의 출처가 바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바로 지혜라는 것은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가 모두 공유하는 것입니다(잠 1:7; 9:10).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주권자라는 점도 욥과 친구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점은 우선 지혜의 범위를 인간 생활에 중점을 두느냐의 문제와 인간의 인식 가능성에 관한 것입니다. 욥기 28장은 이 두 가지 지점에서 규범적 지혜보다는 반성적 지혜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장을 세 친구들이나 아직 등장하지 않은 엘리후의 말로 보는 것은 28장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범을 아는 것이 지혜이자 하나님에 대한 경외라는 것이 규범적 지혜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28장은 지혜에 다다르는 길을 인간은 모르며 오직 하나님만 아시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란 인간은 지혜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겸손이며, 인간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두려워)할 수밖에 없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지식을 무시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짧은 지식을 의지하며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오만한 태도를 보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그리스도인의 사명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담대히 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지혜를 따라 사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