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박정희 3선 마지막” 유세…그때는 유신 상상도 못 했다 (49)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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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3선개헌(三選改憲)으로 가는 길목에서 박정희와 김종필(JP)은 충돌했다.
68년 봄 JP는 ‘자기 자리를 넘본다’는 박정희의 의심 속에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야인이 된 JP는 박 대통령에게 ‘내가 나세르냐’며 대들기도 했다(47회 참조). 69년 여름 박정희는 ‘혁명 의리론’과 눈물로 JP를 설득했다(48회 참조). JP는 그의 손을 다시 잡았다.
개헌 반대에서 개헌 지지로 선회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3선개헌을 지지하기로 한 뒤 나는 어제까지 개헌 반대에 뜻을 모았던 동지들을 설득해야 했다.
박 대통령을 모시고 혁명을 한 업보(業報)로 조국 근대화라는 혁명의 목적을 기어코 이루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개헌을 하려면 재적의원(171명)의 3분의 2(114명)가 찬성해야 한다. 그런데 당 내 개헌 추진 세력인 4인체제와 이후락 비서실장, 김형욱 정보부장이 총동원돼 찬성 서명을 받은 의원은 90명에 불과했다.
25명 정도가 부족했다. 당 내 개헌 반대 의원들을 찬성으로 돌려놓지 않으면 박 대통령의 뜻이 꺾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DJ 뭘 했다고 95만 표 차냐” 박정희, 그날 유신 작심했다 (50)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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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는 박정희 대통령이 634만여 표를 얻어 김대중 후보에게 95만 표 차이로 승리했다. 95만 표는 상식적으론 많은 차이지만 박 대통령의 기대치에 미흡했다. 그의 생각이 깊어졌다.
다음 날 중앙선관위의 대선 결과를 통해 박 대통령의 당선을 확인한 나는 충남 서산농장으로 내려가 있었다.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박 대통령이 아산 현충사에서 열리는 충무공 탄신 기념행사에 참석하니 오라는 주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매년 4월 충무공 탄신일(4월 28일)이 되면 육영수 여사와 함께 현충사에 들러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행사를 마치면 으레 경내의 활터를 찾았다. 박 대통령은 평소 활 쏘는 것을 좋아했다. 오른손잡이지만 가끔 왼손으로 활을 잡기도 할 정도였다. 145m 거리의 먼 과녁에 열 발을 쏘면 서너 개는 맞혔다.
그런데 그날은 하나도 안 맞았다. 박 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쓴웃음만 지었다. 그땐 짐작을 못했다. 뭔가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혀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요동을 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