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시 감상> 이순자 시집 6회 <둥근 가슴>
둥근 가슴
살인미수 혐의로 오빠가 잡혀갔다
혼자되신 어머니를 희롱하는 현장에서 벌벌 떨며 울고 선 여동생 앞을 전사처럼 돌진하던 오빠
골목마다 어머니 고무신 사흘 낮 밤 돌고 돌아 동네 어른들이 써준 진정서로 경찰서에서 무사히 돌아온 오빠 | 세상을 이길 수 없을 땐 등뼈를 둥글게, 둥글게 구부리던 어머니
직선을 돌리면 원이 되듯 어머니 둥근 가슴엔 무수한 화살 꽂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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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어 짐작하건대 아이들 데리고 혼자 사는 엄마에게 어떤 남자가 업신여기는 말을 하니 옆에 있던 시인이 울며 안절부절못하고 오빠가 화가 나서 대들었으니 사달이 난 모양이다. 적반하장격으로 그 남자가 오히려 피해자인 척 호소하니 경찰이 와서 잡혀갔다.
엄마가 현장 사정을 잘 아는 마을 사람들에게 사흘간 이집 저집 다니며 진정서를 부탁하여 제출하고 오빠가 돌아왔다는 이야기인데 엄마로서는 그 일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는 이야기.
언제나 자식 일에는 몸과 마음 다 굽히고 낮추어서라도 가정을 지키고 싶은 엄마의 마음을 쓴 시가 “세상을 이길 수 없을 땐 등뼈를 둥글게, 둥글게 구부리던 어머니”라고 읊고 있다.
우리 집도 3살 때 셋째 형이 고환암에 걸려 죽었단다. 어머니가 집 대문에 소금 주머니를 달아놓고 물 길으러 갔다 오실 때마다 물동이에 담갔었다는 이야기, 소금이 줄어들면 병세가 호전될 것이라는 미신 아닌 미신을 믿으시던 어머니, 지금 말이 안 되지만 집에 수도 시설이 되어있었는데도. 엄마의 심정은 그것밖에 방법이 없으니 정성을 들이고 싶으셨을 것이다.
41년생 형 부산 피난 시절 병약한 몸에 건강이 악화되어 복막염에 폐렴까지 걸렸던 형, 간신히 살아나 등교하니 수업일수 부족으로 학년말 낙제시키겠단다. 울며불며 떼를 쓰니 아버지가 학교에 부탁하여 간신히 진급시키고 결국 졸업하고 경복중에 합격한 형, 한양대 전기과 출신으로 군에서 민정 경찰로 DMZ에서 근무 중 북한군과 교전 중 전사, 마침 내가 군 휴가 중이라 어머니 아버지 모시고 전방으로 가서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조총(弔銃) 소리에 북받쳐 오르는 울음이 터지고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그 후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전사한 형의 위로 연금으로 노년에 조금씩 용돈 쓰시면서 언제나 마음 아파하셨다. 엄마는 매년 현충일에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내주었고 어느 처녀와 영혼결혼식까지 시키셨다.
또 사업을 하던 작은형이 술자리가 잦아지더니 간경변으로 쉰 살도 못 되어 하늘나라로 가셨을 때도 어머니는 통곡을 많이 하셨다. 아홉을 낳으시고 다 크도록 여덟을 키우셨지만 그래도 셋이나 앞세우셨다고
작은형 돌아가셨을 때 둘째 며느리와 손자들에게도 오히려 위로의 말을 아끼지 않으셨다.
병약했던 형이 건강을 회복하고 중고교를 마치고 대학까지 졸업했으니 많이 대견해하셨다.
형들이 집 마당에 운동기구 수평을 세우고 아령을 사다 놓고 시멘트로 역기 알을 만들어 파이프를 끼고 운동하는 것 따라 중학생인 나도 따라 했더니 정말 팔심이 세졌다. 고등학교에서 등산반으로 암벽 등반할 때 도움이 많이 되었다.
형님 돌아가신 지 55년이나 되었다.
가는 것이 있고 오는 것이 있어야 현상 유지가 된다.
한쪽으로 기울면 많아지거나 줄어든다.
태어난 사람이 아이를 낳고 기르고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어떨까?
어머니 아버지 세대는 다 가시고
남은 우리들이 이렇게 저렇게 모여서 하루,
가신지 40주년을 기념했습니다.
나와 동생 둘이 1세대가 되어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조카와 아이들까지 합하니 스물일곱 명이나 되는군요.
이것이 다 복(福)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