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端의 追憶 #147, "동방교에 뺏긴딸 찾아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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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ER 검색중에 눈에 띄는
기사(신문의 우측 중간부분) 하나가
얼른 시야에 잡혔다.
황당하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하고...
1974. 7. 5 중앙일보에 실린 기사다.
(지면확대)
(기사전문)
"東方敎에 뺏긴딸 찾아주오"
어머니가 탄원서
6년 전 세칭 동방교(동방교·공식명칭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의 유혹에 넘어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딸을 찾을 길이 없다는 어머니가 딸을 찾게 해 달라고 각계에 호소하고 있다. 박순옥 여인(54·서울 동대문구 면목2동)은 4일 6년 전인 지난 68년 3월 동방교의 유혹에 넘어가 뛰쳐나오지 못하고 구두닦이· 껌팔이· 신문팔이 등을 하고 있는 딸 우희주양(24·가명)을 동방교 간부들의 방해로 찾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생이별을 하고 있다는 탄원서를 청와대·서울지검 등 관계 요로에 제출했다. 박여인이 낸 진정서에 따르면 딸 희주양은 지난 67년 강릉간호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동방교 광신도인 기숙사 사감 이모여인의 꾐에 빠져 동방교에 끌려 들어가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다. 박여인은 그후 71년 5월 16일 수소문 끝에 딸이 서울에서 여고생 차림으로 껌팔이· 신문팔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동방교 본부 (서울 중구 도동)를 찾아갔으나 간부들로부터 갖은 폭언과 폭행까지 받고 쫓겨났다고 한다. 이 같은 일이 있은 뒤 5개월이 지난 후 딸 희주양은 갑자기 어머니 박여인을 찾아와 『동방교에 입교하면서 하느님께 몸을 바치기로 서약을 했다』고 말하고는 붙잡을 사이도 없이 뛰쳐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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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보도일자 : 중앙일보 1974. 7. 5 (금)
가출자명 : 우희주 (강릉간호고 2년생)
가출시기 : 1968년 3월
발견시점 : 1971. 5. 16
가출한 시점이 1968년 3월이고 행방을 추적하여 발견된 시점이 1971. 5. 16이라고 하면 약 3년이라는 이 기간 동안 세칭 동방교의 사정을 살펴보면,
이 시기는 자칭 하나님이라던 세칭 동방교의 창립교주 노광공이 1967. (음) 6.19 당뇨합병증으로 54세에 요절한 후, 어수선하면서도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점인데 '이단의 추억' 기록에는 이 시기의 동방교 내부 분위기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 교주 노광공이 당뇨합병증으로 세상을 하직한 후 그의 둘째아들인 노영구가 2대교주의 자리에 앉은 이후 대내외적으로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이래 조부님 (노광공)이 다시 부활해서 살아 돌아 올것만 같은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참으로 치료 불가능의 마약 증세요, 아편 중독이었다. 이래 할아버지(노광공)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는 어떤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할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손자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인 할아버지의 칭찬을 들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분위기를 그렇게 몰아가고 있었다. --
(이단의 추억 # 22, 주학교회 중에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확인해보면 세칭 동방교와 관련된 이런 무단가출(빈집초월)류의 보도는 60-70년대를 거치면서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당시는 전국의 세칭 동방교 지교회에 세상의 불심판이 곧 닥아왔노라 공포심과 불안감을 잔뜩 심어놓고는 세상을 청산한다고 하면서 빚을 내어서라도 은금패물을 바치게 하고 신도들을 부추켜 빈집초월(무단가출)시키고 있었다.
기사의 본문에서 동방교 본부(서울 중구 도동)를 찾아갔다고 하는 곳은 당시 서울역에서 후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삼거리에 있었던 장소의 건물을 말하는데 1층에 청해약국과 청해의원이 있었고, 그 위에 세칭 동방교(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의 사무실이 있었다. 동방교내에서는 속칭 '도동사무실'이라고 불리던 장소다. 근처에 '기도처'와 '청산루'라는 대기처도 두곳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하면 말도 되지 않는 미친 소리라고 치부할 '왕의 씨' 된다는 허무맹랑한 교리에 속아 학생들은 학업도 팽개치고 청장년들은 가정도 뿌리치고 대기처란 곳에 합동 숙식하며 연단사란 이름의 껌팔이, 대기자란 이름의 무임금 막노동에 내몰리고 있었다.
갑자기 사라진 아이들을 둔 부모의 심정은 어떠했겠으며 결혼날자 잡아놓고 패물챙겨 숨어버린 자식을 둔 부모의 비통함이야 어떠했으리... 학업중단과 가정파탄으로 난리법석이 난 집들이 전국적으로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이 시기는 세칭 동방교(기독교 대한 개혁장로회)가 이렇게 한창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던 시기였다. 70-80년대 이후에 태어나서 자란 지금의 세칭 동방교 신도들은 알턱이 없는 소설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는 되돌릴 수가 없으므로 미래에 견주어 중요하지 않다.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려면 과거의 역사를 숨기려 하지말고 공개적으로 밝혀서 사죄함으로 수치를 털어내야 한다.
세상을 청산한다며 긁어모은 은금패물과 껌팔이와 막노동으로 그렇게 모여진 더러운 똥무더기 같은 불의한 재물을 두고 서로 으러렁거리며 싸워서 먹어본들 죄악의 국물일터, 싸우지 말고 깨끗이 사회에 환원함으로 지난 과거의 죄악을 말끔하게 씻어내야 한다.
"동방교에 뺏긴딸 찾아주오" 억하심정으로 관계요로에 하소연 하던 보모님들과 무단가출(빈집초월)했던 우희주 양의 후일담을 알 수는 없으나 그녀가 무사히 귀가하여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회복하고 행복한 인생을 보냈기를 기원한다.
우희주 양도 지금은 벌써 칠순의 나이에 이르렀으리라...
첫댓글 내 친구 부인은 부산에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가출하여 결혼할 때까지 학생복을 입고 껌팔이를 했다고 합니다. 몸집이 작고 귀여운 인상의 여자의 몸으로 당시에 전국 3위 안에 들 정도로 막대한 자금을 벌어다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노영구가 정해 준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방 얻을 돈 300만원만 꿔달라고 하소연 했지만 누구든 관심을 쏟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일생을 부려먹고 결혼을 시키면서도 땡전 한 푼 주지 않는 냉정하고 비열한 인간들이 동방교 간부들이라는 겁니다. 지금은 김해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지요.
드러나지 않은 눈물겨운 사연은 숱하게도 많은데 지금은 세월속에 모두 묻혀들고 있으니 안타까운 심정 금할길 없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그녀의 모친 벨릭스장로는 생존해 계시는지 돌아가셨는지 궁금하네요.
내 친구 진기는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연락처라도 알면 쪽지나 비밀댓글로 좀 알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