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단 선정바라밀
만일 위에서와 같이 수행하여도 깨달을 수가 없다면, 마땅히 스스로 이관의 도품에는 각각 八선정이 있다는 것을 사유하여야 한다. 이것은 선정바라밀에 포함되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깨달음의 마음인 것일뿐, 사실은 아직도 증득하지 않는 것이다. “根本定”[色界四禪과 無色界四禪을 말하는데 그 각각에 들어가기 전의 선정인 近分定의 반대말임]이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事定[事禪과 같음. 욕계의 有漏智에 의한 선정으로서 理禪의 반대말임]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나아가서는 無作定[의도적으로 이루는 선정이 아닌, 즉 작위가 없는 선정]을 말하더라도 수릉엄선정은 이루지 않는다. 만일 선정이 없다면 평지에서도 넘어져 떨어지는데 때로는 二世[현재와 미래]에 걸쳐 마음이 산란하고 요동하여서 삼매선정은 열리지 않는다. 이러한 뜻 때문에 일심으로 결정하고 果斷하여 초, 중, 후와 밤 동안[하루 종일] 몸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데, 피로와 고생과 그릇된 사념이 만일 일어난다면 빨리 없애야 한다. 스스로 선정에 들고 남을 교화하여 법을 찬양하고 사람을 찬양하여 대서원은 동요가 없고 목숨을 다하기까지 기약하여 나아가서는 후세에 증명하지 않고는 그치지 않는다. 시방불을 칭탄하고 밝게 하고 救護를 위한다면, 부처님의 선정의 광명을 감득하고 산란하게 동하는 장애를 파하여 事禪을 개발하여 四觀과 상응하는 것이다. 「대론」에서는 선정바라밀을 풀이하고, 먼저 모든 선정의 법을 나열하고 다음으로 무소득을 밝히고는 바라밀의 相을 나타낸 다음 나중에 널리 九想, 八念 등을 풀이하였는데, 모두가 다 선정 속에서 開出되는 것이다. 모든 선정의 법은 매우 많지만 지금은 다만 다섯 가지의 門을 취하여 助道로 할 것이다.
만약 선정에서 사유할 때 마음에 覺觀[尋伺]이 많아서 두루 三毒[貪瞋癡]을 緣한다면 마땅히 數息觀으로써 對治하여야 한다. 數息이 성취되지 않으면 바로 마음이 떠났음을 알아야 하고, 떠났다면 바로 계속 뒤따라서 처음부터 다시 수식하여야 한다. 마음이 산란함을 방지하고 마음을 단속하는 데는 이것이 훌륭한 對治이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住하는 까닭에 혹 欲界定이 일어나고 나아가서는 七依定[일곱 가지 의지처로서의 선정이라는 말임]에 모두 능히 들어갈 수가 있지만, 만일에 반야의 방편을 얻지 못한다면 범부의 법을 이루게 되고, 만약에 그 방편을 얻으면 마하연을 이룬다. 따라서 「請觀音經」에서 말하였다.
“만일에 數息法으로 마음이 안정되면 털구멍에 부처님을 보고서 수릉엄삼매에 주하여 불퇴전을 얻는 것이다.”
이것을 “數息이 해탈문을 연다”고 한다. 즉 삼장교의 八定과 상응하고 나아가서는 無作의 八定과 상응하니 이것을 “事行의 기름이 도와서 도의 밝음을 증장한 것”이라 한다.
*七依定 - 일곱 가지의 의지처의 선정이라는 말인데 색계와 무색계의 선정의 단계가 八선정이 있고, 그 색계의 초선에 의하여 욕계의 유루를 청산하고 무루를 얻어 第二선에 들어가지만, 이 제이선은 초선에서의 覺, 觀, 喜, 樂, 일심에 의지하여 들어가게 되므로 제이선은 초선을 의지처로 하는 것임. 第三선은 第二선의 內淨, 喜, 樂, 일심이 의지처이고, 第三선은 捨, 念, 慧, 樂, 일심의 五支가 그 정체이니 그것을 의지처로 하여 第四선에 들어가는 것임. 그리고 무색계의 第一선은 색계 第四선의 不苦不樂, 捨, 念, 일심의 四支를 의지처로 하여 들어가고, 第二선은 제일선의 空無邊處觀[즉 법계는 가없는 허공으로 있음을 관하는 일]에 의지하여 들어가고, 第二선의 識無邊處觀을 의지하여 第三선에 들어가고, 제삼선의 無所有處觀을 의지하여 有頂天에서의 非想非非想天觀으로 들어가는 것임. 따라서 팔선정 중의 아래의 일곱 선정은 모두 그 바로 위의 선정의 의지처이기에 그것을 七의지처선정이라 하는 것임. 별도로 八聖道의 八支 중의 처음의 正見부터 第七지의 正念까지가 모두 끝의 正定의 완성을 위한 연이라고 볼 수 있기에 이 七支를 正定의 七依定이라고 할 때도 있음. 물론 여기에서는 앞의 색계의 초선부터 무색계의 무소유처선까지를 칠의정이라 한 것임.
만일에 女色을 연하여 탐면(眈湎; 탐닉과 같음, 湎은 빠질 면)이 마음속에 있으면 미혹, 집착이 떨어지지 않으니 마땅히 不淨觀으로써 대치하여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으로 그 죽음의 상으로 관하건대, 언어로는 여전하지만, 갑자기 곧 어딘가로 사라지고 몸은 차게 되어 색이 변하여 벌레와 고름이 흘러나와 깨끗하지 못하고 냄새나는 곳에, 더럽고 사나움이 충만하여 무덤들 사이에 던져버려져서 썩어버린 나무와도 같다. 옛날에 사랑하고 귀중히 여겼던 것은 지금 어떻게 보여지고 있는가? 이것은 싫어하는 물체로 되어 나를 근심스럽게 하고 괴롭히고 있다. 이미 욕망의 잘못을 분별하니 淫心이 바로 끝나지만 나머지 八想[시체의 변하는 아홉 가지 상, 즉 九想 중 변해가는 상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가지 想]도 또한 음욕을 대치하는 것이다. 「대론」에서 말하였다.
“多淫하는 자는 九想을 관하게 하고, 緣[대상 즉 九想觀]에 의지함이 자재롭지 않다면 八背捨를 관하게 한다. 연이 두루 넓지 않다면 八勝處를 관하게 한다. 轉變할 수가 없다면 열 가지 一切處[삼계의 번뇌를 멀리 여의케 하는 하나의 관법임. 삼계가 地, 水, 火, 風, 靑, 黃, 赤, 白, 空, 識의 열 가지 중의 어느 하나로써만 완전히 충만되어 있음을 그 순서대로 관하는 관법임]를 관하게 한다. 만일 무서움이나 두려움이 있으면 八念을 수행하게 한다.”
모두가 다 부정관을 初門으로 하며, 모두가 다 婬의 불길을 대치시켜 해탈문을 열고 四種의 八定과 상응하여서 助道의 기름이 밝음을 증장시킨다.
만일 瞋恚를 攀緣하면 마땅히 자비심으로써 對治하여야 한다. 上의 인욕바라밀이 공통의 대치가 되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따로 慈의 무량심에 관련시킨다. 나머지 三心[四無量心 중의 慈 이외의 세 가지]은 요욕樂欲과 같은 것이다. 悲의 무량심으로 대치한다는 것은, 중생의 苦를 연하여 깊이 가엾음과 애상을 일으켜서 그 苦를 빼버리려고 한다. [이러기에 요욕과 같은 것이라는 것임] 이 마음을 연하여서 선정에 들면 悲心과 상응한다. “慈”라는 것은 중생이 樂을 얻을 것을 생각하는 것이니, 이 마음을 연하여 들어가면 慈의 선정과 상응한다. 喜心이라는 것은 중생들이 낙을 얻는 것을 생각하고 대환희가 생기는 것이다. 이 마음을 연하여 들어가면 喜의 선정과 상응한다. 捨心이라는 것은 愛憎의 상념을 버리고 평등관에 住하는 것이다. 이 마음을 연하여 들어가면 捨의 선정과 상응한다. 이 네 가지 선정을 얻기만 하면 모든 중생에 대해 진에는 從生[종속적으로 생기는 일. 다른 것이 원인이 되어 그에 따라서 종속적으로 일어나는 일임]함이 없다. 이것에 대해선 아래에서 다시 널리 설할 것이다.
만일 그릇된 顚倒가 攀緣되어지면 마땅히 因緣觀으로써 이것을 대치하여야 한다. 「비담론」에서는 三界의 방편으로 我相을 破하는데, 지금 여기에서도 인연관으로 아상을 파한다. 구체적으로는 三世觀이 斷相과 常相을 파하고[과거라는 것은 常相을 파하는 것이고 미래라는 것은 斷相을 파하는 것이며, 현재의 인과를 생각하면 단상, 상상 모두 파하여진다는 것을 즉각 알 수 있음] 二世觀은 我相을 파하며[현재나 미래가 모두 십이인연을 갖추고 있으니 그것은 벌써 我의 無를 증명하는 것임] 一念은 自性을 파한다. [念이 空理 내지 평등관과 상응하는 찰나 일체가 무자성임을 증득하는 것임] 이 선정이 만일 성취되면 바로 理觀과 상응하여 열반문을 助開하는 것이다.
만일 수면이 수도를 장애하는 죄를 일으킨다면 바로 念佛觀으로써 대치한다. 應身佛의 無相의 相을 연하여 [應身佛身이란 중생의 염원에 감응하여 그 기연에 상응하여 나투시는 불신이기 때문임. 실상이 없는 상인 것임] 그 상을 연하고 있음이 분명하여지면 그대로 도를 장애하는 죄가 파하여지는 것이며 시방의 부처님을 보고 理觀과 상응하여 열반문을 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