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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聖書硏究)』 창간사(創刊辭) ― 원동력(原動力)으로서의 성서(聖書)
해방과 더불어 조선인(朝鮮人)은 지금 인류와 역사 앞에, 그리고 역사의 궁극적 섭리자인 신(神) 앞에 제출된 독립이란 위대한 문제로 그 실력을 시험받는 엄숙한 시간에 놓여 있습니다. 그 실력은 시시각각으로 엄연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부 수립, 좌우합작, 정치·경제 운동, 언론·교육 투쟁, 3백만 구령운동(救靈運動), 파업, 시위 등, 심지어 모리상(謀利商)의 지폐 위조, 정치 협박, 살인, 방화 등등으로 말입니다.
이런 중대한 시기에 처하여 교회에서는 강대상에나 장식하고, 고상·유식한 우리의 학사, 박사, 문사(文士), 정상배(政商輩)들은 무가치라 하여 일고(一顧)도 하지 않는 성서를 위해, 그것도 목사나 신학자면 또 몰라도 저 같은 일개 평민 신도로서 전문 지식도 없이, 사회의 냉소와 교회의 조롱도 번연히 알면서 자비(自費)로 본 잡지를 냄에는 한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서는 과거 6천 년의 수명을 가지고, 오늘날 9백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매년 수천만 권이 보급되고 있는 책이니만큼, 이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결코 유식이나 진보의 자격이 아니며, 구태여 자격이라면 무식과 암매(暗昧)의 자격밖에 못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서는 그 연구 방법에 있어서도 고전으로, 문학으로, 혹은 신학으로, 윤리·사상서로, 혹은 현대 과학의 쾌도(快刀)를 들어 고등비평적(高等批評的)으로도 연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선인으로서 오늘날 미의(微意)나마 애국적 심지(心志)로써 이를 행하려고 하는 것은, 성서는 실로 모든 국가, 민족, 사회, 그리고 모든 문화 현상의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류 역사상 성서는 기독교가 전파된 모든 국가·사회·민족 발전의, 그리고 모든 문화 현상의 원동력이 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이집트·바빌로니아·앗시리아·희랍·로마 등 거대한 고대 민족과 국가군(群)이 역사상에서 멸절된 오늘에도, 유대 민족만은 확고하게 독립된 일개 민족으로 아무런 국가적 배경과 권력의 보호도 없이, 오히려 2천 년 동안 무수한 민족적인 시련과 고난, 박해 가운데서도 뚜렷한 역사적 존재로서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들이 성서의 생명력을 파지(把持)한 때문입니다.
근세 문명의 2대 주역인 앵글로색슨과 게르만 민족도 7세기부터 8세기에 이른 소위 개종기(改宗期)를 거쳐 그들의 손에 성서가 종교 및 정신생활의 절대 신성한 경전으로, 또 사회생활의 유일한 법전으로 쥐어지기 전까지는, 역사가 타키투스가 지적한 바 “그들은 전쟁이 없는 때는 사냥이 아니면 먹고 자는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 만용(蠻勇)의 해적이었으며 사나운 야만족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구미세계(歐美世界)에서 기독교를 제하면 모든 고상하고 가치 있는 것이 제거된다는 것이 공정한 역사가의 발언입니다. 단테·밀턴·셰익스피어의 문학, 베토벤·바흐의 음악, 미켈란젤로·밀레의 회화, 케플러·뉴턴의 과학, 루터·칼뱅의 종교개혁, 링컨·크롬웰의 정치 등등, 사실 남는 것이 있다면 육욕적이고 동물적인 부분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직 성서가 미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고의로 이를 물리치는 터키·인도·중국·조선·일본 등 동양 문명에 어떤 적극적인 생명력이 있는지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실러의 이른바 ‘세계 역사는 세계 심판(Die Weltgeschichte ist das Weltgericht)’ ― 이는 엄숙한 세계사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영원부동(永遠不動)하는 성서의 진리만이 이에 견딜 수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조선을 이 성서의 진리 위에 세우려고 하는 바입니다. 동시에 모든 진리의 적에 대하여 싸움을 포고하는 바입니다. (1946년 11월 제1호)
『성서연구』 창간사의 사상사적 의미
이 창간사는 1945년 해방 직후 좌우 대립과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 무교회주의 평신도 사상가 노평구(1912~2003)가 스승 김교신의 『성서조선』(1927~1942) 정신을 계승하여 발표한 기념비적인 선언문이다. 본문의 핵심 의미는 크게 네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해방 정국에 대한 비판과 ‘내면적 실력’의 강조
해방 직후 조선 사회는 정부 수립과 좌우합작 등 외형적 정치 구호와 혼란으로 들끓었다. 종교계 역시 일제 말기 신사참배 강요 등으로 무너진 교세를 만회하고자 전 인구의 10분의 1을 전도하겠다는 ‘3백만 구령운동(救靈運動)’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으나, 노평구는 이를 내면적 회개나 윤리적 각성이 결여된 채 숫자와 교세 확장에만 매달리는 기성 교단의 ‘외형주의·물량주의’로 보았다. 신앙의 본질인 도덕적 실천이 빠진 종교 운동은 세속의 정치적 시위나 소요와 다를 바 없는 혼란에 불과하다는 일갈이었다.
여기에 더해 1946년 5월 조선공산당 인쇄소에서 벌어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처럼, 이념 투쟁과 사리사욕을 위해 경제 질서를 교란하고 도덕을 내팽개치는 모리배들의 범죄는 당대 사회의 도덕적 파탄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저자는 이처럼 정치·경제적 혼란과 종교적 기만상이 극에 달한 현실을 두고, 조선인이 독립을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을 신과 역사 앞에서 시험당하고 있는 엄숙한 순간이라고 보았다. 껍데기뿐인 외형적 정치 구호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도덕적·영적 자각이 동반되지 않는 독립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예언자적 경고다.
둘째, 기성 교회와 지식인 사회에 대한 양면 비판 (무교회주의적 평신도 각성)
성서를 강대상 장식물로 전락시키고 권력화된 기성 교단, 그리고 성서를 서구 종교의 유물이나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쳐다보지도 않는 세속 지식인(학사·박사·문사·정상배) 양자를 동시에 통렬히 비판했다. 당시 기성 개신교계는 일제 말기 신사참배에 적극 협력했던 교권주의자들이 진정한 참회 없이 교권을 다시 장악하려 하면서 출옥 성도들과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었고, 교파 분열과 기득권 다툼에 매몰되어 영적 지도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다른 한편으로 해방 직후 지식인 사회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과 좌익 혁명 담론에 급격히 경도되어 종교를 단순한 ‘민중의 아편’이나 봉건적 유물로 취급하며 성서의 도덕적·인문학적 가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목사나 신학자가 아닌 ‘일개 평민 신도’가 이러한 냉소와 조롱을 무릅쓰고 자비로 잡지를 내는 행위는, 직업 성직자 제도를 거부하고 성서 그 자체의 생명력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전형적인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신앙고백이다.
셋째, ‘문명 형성의 원동력’으로서의 성서관과 도덕입국론(道德立國論)
노평구에게 성서는 단순한 개인 구원의 책이 아니라 문명을 형성하고 지탱하는 ‘역사의 원동력’이었다. 유대 민족이 나라 없이도 2천 년을 버틴 힘, 그리고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가 『게르마니아(De Origine et situ Germanorum)』(서기 98년경) 제15장에서 묘사했듯이, 전쟁이 없을 때는 사냥과 나태, 폭음과 폭식에만 빠져 있던 야만 상태의 게르만·앵글로색슨 민족이 근대 서구 문명(문학, 음악, 미술, 과학, 정치)을 꽃피운 힘이 모두 성서의 도덕적·영적 생명력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노평구는 훗날 세계 문명을 선도한 영미와 독일 민족 역시 선천적으로 우월했던 것이 아니라, 성서가 그들의 정신과 사회를 지배하는 절대적 규범이자 법전으로 자리 잡기 전까지는 미개한 해적과 야만에 불과했음을 환기한다. 즉, 문명의 진정한 추동력은 정치나 무력이 아니라 성서에 기초한 ‘종교적 도덕성’에 있다는 논증이다. 나아가 그는 참된 기독교 신앙을 배제한 문명은 동물적이고 육욕적인 잔재에 불과하다는 급진적인 문화 신학을 펼쳤다.
넷째, 김교신의 『성서조선』 계승과 ‘성서 위에 세우는 조선’
스승 김교신이 “조선에 성서를 주어 조선을 구원하자”고 외쳤듯, 노평구 역시 “사랑하는 조선을 이 성서의 진리 위에 세우겠다”고 다짐했다. 두 창간사는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를 한국적 토양에 심고자 했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사상적 혈통을 공유한다. 제도화된 교회의 교파주의와 성직자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성서 본문으로 돌아가고자 한 점,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단순한 외래 종교가 아니라 민족의 운명과 뼈아프게 결합하여 ‘도덕입국(道德立國)’을 지향한 점은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나 식민지 치하와 해방 정국이라는 시대적 조건의 차이는 두 글의 어조와 성격에서 뚜렷한 변주를 낳았다. 1927년의 김교신이 국권을 상실한 시대에 “조선 산천과 조선 혼을 품은 조선 청년”을 향해 소박하고 시적인 어조로 조용히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심령을 소생시키는 ‘생명수’로서 성서를 건넸다면, 1946년의 노평구는 독립의 문전에서 윤리적 붕괴와 정치적 광란을 목도하고 구약의 예언자처럼 격렬한 파열음을 내며 전면에 나섰다. 그에게 성서는 단순한 위로의 샘물이 아니라, “인류와 역사, 그리고 신의 심판대” 앞에서 국가와 문명, 법과 도덕을 기초하는 ‘역사의 원동력’이어야 했다. “조선에 성서를 주어 조용히 열매 맺기를 기다리겠다”던 스승의 온유한 기다림은, 해방 정국의 제자에게 이르러 “모든 진리의 적에 대하여 싸움을 포고한다”는 단호하고 투쟁적인 선언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그는 독일의 시인이자 역사가인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의 시 「체념(Resignation)」(1786)에 나오는 유명한 명제이자, 훗날 헤겔(G. W. F. Hegel)이 『법철학 강요』와 『역사철학 강의』에서 역사철학의 핵심 원리로 수용한 “세계 역사는 세계 심판(Die Weltgeschichte ist das Weltgericht)”이라는 구절을 인용한다. 인류 역사는 단순한 권력 투쟁이나 물리적 힘의 각축장이 아니라, 역사 자체가 거대한 법정이 되어 각 민족과 국가의 도덕적 정당성을 엄정하게 판결한다는 통찰이다.
이 역사관은 일찍이 그의 스승 김교신이 1933년 「시험제(試驗濟)의 법칙」에서 천명했던 신앙적 역사철학과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김교신은 자연계와 인간 사회에 약육강식과 우승열패(優勝劣敗)라는 눈앞의 ‘소법칙(小法則)’이 작용하지만, 역사의 이면에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약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 곧 ‘열승우패(劣勝優敗)’라는 ‘대법칙(大法則)’이 이미 검증이 완료된(시험제) 철칙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역설했다. 군사력과 부귀를 과시하던 이집트 파라오,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진시황의 만리장성, 독일 카이저의 제국주의가 결국 자멸의 길을 걸었듯이, 하나님은 역사의 법정에서 ‘교만한 눈’을 반드시 꺾으신다는 통찰이었다.
노평구는 스승이 남긴 이 ‘시험제의 대법칙’을 실러와 헤겔의 근대 역사철학적 명제와 접속시키며 한층 더 엄정한 결론으로 밀고 나아간다. 고대 제국들의 멸절을 초래했던 그 역사의 법정이 이제 해방을 맞은 한반도 위에서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열리고 있다는 자각이다. 그는 도덕적 기반이 없는 민족과 국가는 역사의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고대 제국들처럼 소멸할 것임을 경고하고, 눈앞의 권력과 무력이라는 소법칙에 취하지 않고 어떠한 역사의 심판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영원한 성서의 진리 위에 새 나라의 초석을 놓겠다는 ‘도덕입국’의 결의를 천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