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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기구한 모녀의 상봉
이때였다. 등뒤로부터 돌연 변청교의 벽력같은 음성이 달려왔다.
"너희들 지금 천산 마귀할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니냐!"
내공이 강한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귀가 몇 배는 밝았다. 두 여인이 소곤거리는 말까지 그
는 듣고 있었던 것이다.
"뉘신데……?"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며 엽청청이 물었다. 얼른 매초풍이 대꾸했다.
"저분은 천하에 이름이 높은 탈명한추 변청교 나리시란다."
엽청청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그럼 변홍의의 형님이 되시는……."
순간 매초풍도 크게 놀랐다. 그녀는 탁자 밑으로 엽청청의 손등을 꼬집었다. 엽청청은 변홍
의가 매초풍의 구음백골조에 목숨을 잃은 사연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야, 왜 꼬집어요?"
엽청청이 인상을 쓰며 매초풍을 쏘아보았다.
변청교는 두 여인이 자신이 변홍의의 형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 이상하게 여겼다.
"어떻게 내 동생을 알지?"
엽청청은 그가 변홍의와 한 핏줄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왜 모르겠어요. 우린……."
순간 매초풍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벗이었죠. 아주 가까운 벗!"
엽청청이 한 동문의 제자간이라고 말할 것 같아 매초풍이 얼른 말을 바꾸었다. 엽청청은 그
런 매초풍의 반응에 눈치를 조금 차렸다. 그래서 입을 다물기는 했지만 무엇 때문에 매초풍
이 변홍의와 동문임을 숨기려고 하는지 궁금했다.
변청교가 이때서야 매초풍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과히 경국지색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아
름다웠지만 눈매에는 어딘가 모르게 여인으로서는 강한 살기가 묻어 있었다.
'음, 동생이 이러한 여인들과 벗으로 지내다니……. 혹 나쁜 물이라도 든 것은 아닐까?'
변청교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홍의는 오혈궁 제자이니 그럼 너희들은……?"
매초풍이 대답했다.
"우린 변홍의와는 가까운 벗이랍니다. 홍의는 영준하고 무공도 뛰어나고 그래서 우린 홍의
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지요."
매초풍이 다시 탁자 밑으로 엽청청의 손을 꼬집었다. 엽청청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
였다.
변청교는 매초풍과 엽청청이 모두 자기 동생의 정부인 줄로 오해하고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홍의가 이렇게 타락을 하다니……."
변청교가 머리를 저었다.
엽청청은 변청교의 언동을 보면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변홍의의 형은 정말 이상하군. 제 동생을 왜 타락했다고 말할까? 나와 언니가 홍의와 벗으
로 지냈기에 타락했다는 것일까?'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매초풍은 변청교의 말뜻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두 볼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는 변홍의와 함께 지
내던 나날들을 돌이켜보았다. 그러자 변홍의에게 약간 미안한 감이 들었다.
이때 변청교가 또 물었다.
"아까 너희들이 천산 마귀할멈에 대해 말을 주고받았는데 그 계집이 지금 어디에 출몰하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엽청청이 머리를 흔들었다.
"몰라요. 천산 마귀할멈이 한 번은 오혈궁에 쳐들어왔었어요. 하지만 그 후로는 누구도 본
적이 없어요."
"오혈궁의 일마저 알고 있구나."
"물론이지요. 뭐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요?"
"그게 무슨 말이더냐?"
매초풍이 다시 엽청청의 손등을 꼬집었다. 그리곤 대신 대꾸했다.
"변홍의가 우리의 벗인데 우리에게 그만한 일쯤이야 알려 줄수도 있잖아요."
변청교가 냉소를 터뜨렸다.
"그 놈 자식이 점점 나쁜 버릇만 키워 가는구나. 계집만 밝히면서 돌아다니더니……."
엽청청은 비로소 변청교가 자기를 천한 여인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지 마세요!"
엽청청은 눈물까지 보일 정도로 격해 있었다. 매초풍이 그녀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엽청청은 계속 흐느꼈다. 매초풍이 대신 변청교에게 말했다.
"달리 생각하지 마세요. 이 앤 수줍음을 잘 타서 그런답니다."
변청교는 곱지 않은 눈으로 두 여인을 응시했다.
'그 따위 너절한 짓거리를 하고서도……. 이런 더러운 계집들과 마주해서 무슨 소득이 있단
말인가!'
변청교가 입을 열었다.
"난 너희들에게 천산 마귀할멈의 행방을 물었을 뿐이다. 다른 건 결코 알고 싶지도 않아!"
매초풍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천산 마귀할멈의 행방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는데 그분과는 가까운 사이인가요?"
그 말에 엽청청이 화풀이처럼 한마디 내뱉었다.
"내가 보기에도 나리께서는 천산 마귀할멈과 가깝게 지낼 게 뻔해!"
변청교가 담담하게 웃었다.
"천산 마귀할멈은 천산 기슭에서 나쁜 짓들을 많이 했지. 이 몇 년 동안에는 심지어 중원에
까지 와서 행패를 부리고 있지. 난 그 년을 찾아다닌 지 석 달째가 되었어. 중원의 무림을
위해 그 요물을 없애지 않으면 안 돼. 그런데 어찌나 교활한지 두 번이나 마주쳤지만 번번
이 놓치고 말았지."
엽청청이 기분이 좋아져서 말했다.
"원래 천산 마귀할멈을 죽이려고 했었군요. 그러면 우리 아버님께서 이제 근심하지 않게 되
겠네요."
"천산 마귀할멈이 네 아버지도 괴롭혔다구?"
"그래요 그때……."
이번에도 매초풍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그때 우린 산에서 살고 있었어요. 그날 천산 마귀할멈이 대로하여 우리를 몽땅 잡아죽이려
고 달려들었어요. 다행히 우리는 그 전에 화적떼의 습격을 피할 수 있도록 땅굴을 파놓았었
지요. 그 굴에 숨지 않았더라면 모두 떼죽음을 당했을 거예요."
변청교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 년이 나타나기만 하면 내가 기필코 죽여 버릴 것이다!"
이때 문밖에서 누군가 조롱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떤 영웅 호걸이길래 그런 헛소리를 치는 거야!"
여인의 목소리였는데 소름이 돋을 정도로 살기가 어려있었다. 변청교가 탁자를 치면서 받아
쳤다.
"누구나! 냉큼 모습을 보여라!"
문소리가 나더니 중년의 여인이 들어섰다. 그녀가 변청교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대가 방금 전 천산 마귀할멈의 험담을 늘어놓은 자로군!"
"그렇다!"
중년의 여인이 손가락 끝으로 변청교를 가리켰다.
"원래 네 놈의 혓바닥만 잘라 버리려고 했지만 이젠 사정을 봐줄 수가 없다!"
그러더니 여인은 갑자기 변청교에게로 달려들었다. 주먹을 곧추 뻗더니 두 손가락을 칼처럼
세우고 변청교의 두 다리를 찌르려고 했다.
"지독한 년!"
변청교가 탁자를 밀었다. 탁자가 그녀의 손을 막아냈다. 여인이 공중으로 튀어오르며 탁자를
발로 쳐 박살을 냈다. 그녀가 다시 달려들며 변청교를 향해 주먹을 연달아 퍼부었다.
어느 순간 그녀는 두 자 남짓한 단검을 뽑아 들었다. 보기 드문 보검이었다. 그 단검을 제대
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동작으로 그어대며 변청교를 공격했다. 그러자 탁자와 의자들이
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주인이 옆에서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그는 싸움이 길어지기만을 비는 표정이었다. 그는 이
번에도 변청교가 파괴된 것들에 대해 배상을 해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인의 안색이 차츰 바뀌었다. 탁자와 의자들이 변청교의 무기로 변해 가고 있었다.
검이 번뜩일 때마다 탁자와 의자를 들어 변청교가 무기처럼 사용했다.
여인은 계속 공격을 퍼부었지만 민첩한 변청교를 따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오른손으로 장
을 날렸다. 그러자 폭풍이 몰아치 듯 괴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 안에 집기들을 부스러
뜨렸다.
변청교는 여전히 사뿐히 몸을 날려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면서 역으로 장을 퍼부어 그
녀의 기세를 꺾었다.
변청교에게서 조금의 허점을 찾을 길 없는 여인은 당황했다.
그러나 변청교 입장에서도 그녀의 검술에 놀라고 있었다. 장을 날리면서도 여전히 검을 앞
으로 내민 채 상대를 경계하고 있는 그녀의 빈틈없는 태도 때문이었다.
"훌륭한 검술이로군!"
변청교가 웃으며 그녀를 칭찬해 주었다.
"그대는 이런 검술을 본 적이 있나요?"
여인이 묻자 변청교가 솔직히 대답했다.
"처음이오."
변청교는 원래 정직한 사람이라 무공에 관해서는 절대 허튼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럼 그렇지. 그대가 천산 마검(魔劍)을 알 리가 없지."
그녀가 다시 검을 내밀며 달려들었다. 변청교가 슬쩍 몸을 틀면서 말했다.
"그럼 천산 마귀할멈의 천산 마검이란 말이오?"
"귀 한번 밝군!"
여인이 뇌까리자 변청교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이 여인은 천산 마귀할멈의 제자란 말인가?'
변청교가 다시 물었다.
"그대는 천산 마귀할멈의 수하요?"
"내가 천산 마귀할멈은 아닌 것 같소?"
"하하하, 그대가 그 꼴로 천산 마귀할멈이라면 내가 뭣하러 찾아 다니겠소?"
말의 뜻은 여인의 무공이 아직은 미숙하여 자신의 적수가 못된다는 것이었다. 약이 바싹 오
른 여인은 검을 마구 휘둘러댔다. 그러나 단검 하나로는 변청교를 넘어뜨릴 수 없다고 판단
한 그녀는 애가 타기만 했다.
변청교가 내력을 모으더니 손바닥으로 그녀의 가슴을 쳤다. 그녀가 뒤로 미끄러졌다.
"대단하군!"
그녀가 몸을 추스리며 지껄였다. 변청교는 승기를 잡았다고 여겼는지 곧장 달려갔다. 여인이
뜨락으로 내려섰다. 변청교가 막 뜨락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
다.
검은 저고리에 검은 치마 차림의 여인이었다. 얼굴을 검은 면사포로 가린 그녀가 소리쳤다.
"쫓지 마세요. 내가 바로 여기 있으니까!"
뒤로 몇 걸음 물러선 변청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드디어 나타나셨군!"
그녀가 바로 천산 마귀할멈이었다. 그녀가 냉소를 했다.
"네 놈을 며칠 더 살게 놔두었을 뿐이다. 요즘 더 중요한 복수가 생겨서 네 놈과 맞서지 않
았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림도 없다! 지금까지 난 네 놈의 내력을 잠시 시험해 보았던
것이다."
"그 따위 방법으로 나의 절기를 엿보려고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난 네 놈의 탈명한추와 내공을 알아냈다. 승리의 절반은 이미 차지한 거나 마찬가
지지. 네가 심모홍을 죽일 때 뿌린 탈명한추는 참으로 멋있었다!"
"그렇다면 줄곧 나를 지켜보고 있었구나!"
천산 마귀할멈이 뒷짐을 진 채 득의양양해서 털어놓았다.
"어디 그뿐인 줄 아느냐? 심모홍과 모삼 그리고 정씨네 사형제는 모두 내가 보내 네 놈과
시비를 걸게 했던 것이다."
변청교의 눈동자가 긴장하기 시작했다.
"내 말 한마디면 죽는 한이 있어도 거역하지 못하지! 그들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
외에는 생각할 수도 없으니까……."
천산 마귀할멈이 차갑게 웃었다.
"정말 지독한 년이구나. 남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탈명한추 쓰는 것을 알아냈으니……."
천산 마귀할멈이 여전히 싸늘한 웃음을 던졌다.
"쓸데없는 입방아는 그만 찧고 어서 덤벼라!"
두 사람이 양손을 높이 쳐들었다. 마치 검이라도 되는 듯이 두 사람은 손을 휘어치며 연신
장을 퍼부었다. 땅 위로 흙먼지와 함께 돌들이 튀어올랐다.
천산 마귀할멈은 흙먼지 속으로 종횡무진 자리를 옮기며 변청교를 치려고 했다. 그녀는 변
청교의 허점을 찾기 위해 날카로운 눈빛을 부라렸다. 변청교의 장법의 묘미와 비결은 동작
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의 내력이 비밀이었다. 그 때문에 변청교의 장법에는 허점들
투성이인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 허점들을 이용하여 공격한다면 오히려 역으로 당할 수
가 있었다.
천산 마귀할멈은 변청교의 장법에서 허점들을 발견하긴 했지만 그의 내력을 생각해 섣불리
공격할 수가 없었다.
매초풍과 엽청청은 창문 뒤에 몸을 숨긴 채 싸움을 지켜보았다. 매초풍은 두 사람의 무공에
놀라움을 금하질 못했다.
천산 마귀할멈이 기회를 잡지 못하자 자정신침을 꺼내 변청교의 가슴을 겨누었다. 천산 마
귀할멈이 죽기 살기로 덤비는 것을 보고는 변청교는 정신을 더욱 바싹 차렸다. 변청교가 내
력을 이용해 그녀의 공격을 물리쳤다. 자정신침은 거대한 힘에 의해 방향이 뒤틀리곤 했다.
그녀는 변청교와 정면 충돌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가볍고도 민첩
한 동작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길을 따라 마치 한 마리의 독사처럼 자정신침이 꿈틀거
렸다.
그러면서 변청교의 허점을 찾아 공략할 태세를 취했다.
변청교도 자세를 바꾸었다. 자신의 장력으로 쉽게 자정신침을 물리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빠른 동작을 취하며 천산 마귀할멈 주위를 맴돌았다.
그녀가 자정신침을 길게 뽑더니 칼처럼 휘둘러댔다. 사방에서 정신없이 휘어치는 자정신침
을 막으며 변청교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자정신침은 칼보다 더 날카롭게 허공을 그어댔다.
변청교가 주먹과 손바닥 등을 이용하여 자정신침의 공격을 막아냈다. 동시에 장을 그녀의
가슴을 향해 날렸다. 천산 마귀할멈이 급히 몸을 돌리며 장을 피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변청
교의 혈도를 찌르려고 집요하게 공격해 왔다.
소리를 지르며 허공으로 떠오른 그녀가 변청교의 숨통을 겨눈 채 내리꽂혔다. 변청교가 보
법을 달리 하며 얼른 옆으로 물러섰다. 천산 마귀할멈이 다시 내려왔다.
차츰 천산 마귀할멈이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다. 처음에는 그녀가 밀리는 듯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변청교는 하는 수 없이 후퇴할 생각을 했다.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다시 내려온 천산 마귀할멈이 코웃음을 쳤다.
"세상에서 그토록 소문이 난 탈명한추도 별볼일 없군. 이제부터는 내가 신공으로 너를 묶어
두겠다!"
그녀가 다시 몸을 새처럼 띄우며 날아들었다. 허공으로 높이 오른 그녀가 자정신침을 앞세
우며 들이닥쳤다. 마치 거대한 폭풍이 날아드는 것만 같았다.
변청교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곧 그녀가 마공을 부리고 있음을 알
아차렸다. 그는 뒤로 물러서며 양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에서 돌연 강한 빛을 발하
는 서른 여섯 개의 별빛이 쏟아졌다. 그 빛은 일제히 천산 마귀할멈의 몸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천산 마귀할멈도 마공을 부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별빛들을 떨쳤다. 그중 여섯 줄기의 빛
이 흩어졌다. 그러나 나머지 빛들이 다섯 개의 방위로 돌면서 여전히 그녀를 감쌌다.
변청교가 비로소 탈명한추를 사용한 것이었다. 천산 마귀할멈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당황
하고 있었다. 서른 개의 탈명한추가 각 방향에서 달려드니 그녀는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조심해요!"
이때 아까 그 중년의 여인이 천산 마귀할멈을 향해 소리쳤다.
창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매초풍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천산 마귀할멈이 탈명한추에 당한다면 여혈의의 복수도 할 수 없게 되어 좋겠군. 비록 천
산 마귀할멈의 마공은 배울 수 없게 되어도 대신 변청교를 구슬려 그 탈명한추의 절기를 배
울 수 있지 않을까?'
매초풍은 어여쁜 여인을 싫어하는 사내는 없을 거라 여겼다. 그를 여색으로 홀린다면 문제
없이 자기 쪽으로 기울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했다.
천산 마귀할멈이 허공에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바로 그 찰나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입으로
자줏빛 혈전(血箭)을 무수히 뿜어냈다. 그러면서 몸을 팽이처럼 돌리기 시작했다.
탈명한추가 그녀의 몸에서 튕겨져 나왔다. 이윽고 천산 마귀할멈은 흙과 먼지가 가득한 땅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중년의 여인이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천산 마귀할멈이 몸을 가볍게 떨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변청교, 또 다른 수가 있더냐? 어디 한번 부려 봐라!"
그녀가 여전히 눈을 부라리며 변청교를 윽박질렀다. 이때 그녀는 힘이 거의 빠져 몹시 무기
력했지만 큰소리만은 잊지 않았다.
변청교는 함부로 다가서지 못했다. 그는 놀라운 눈길로 천산 마귀할멈을 바라보면서 머리를
저었다.
"탈명한추는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대에게 큰 실수를 했어. 그대의 무
공이 나보다 높다고 생각하네. 그러니 싸움을 그만두기로 하지."
천산 마귀할멈은 공력을 차츰 회복해 갔다. 일어나 다시 변청교와 싸운다면 이길 수는 없겠
지만 자신을 방어할 수는 있었다.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 나를 찾아 다닌다면 각오해라!"
"패한 장수가 어찌 용맹에 대해 떠벌릴 수 있겠소. 난 오늘부터 절대로 그대에게 도전하지
않겠소."
말은 그렇게 했으나 그는 마음 한구석에 체증처럼 걸리는 게 있어 물었다.
"그런데 한 가지 모를 일이 있소. 마귀할멈이 가르쳐 주기 바라오."
"말을 해보시오."
"내 탈명한추는 누구도 당해낸 사람이 없었소. 그런데 그대는 탈명한추를 물리쳤는데 대관
절 어떤 방법을 썼소?"
"방금 내가 쓴 것은 천마해체대법(天魔解體大法)이라고 하오."
그것은 천산 마귀할멈 엽첩비의 가전마공(家傳魔功)으로 평소에는 웬만해서 쓰지 않는 거였
다. 강한 적수와 대결할 때나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만 사용해 왔었다.
천마해체대법을 쓸 때에는 반드시 자기 몸의 피를 뿜어냄으로써 온몸의 진기를 방사해야 했
다. 뿜어낸 피가 많을수록 내력이 더 강해지는데 이는 몸의 원기를 크게 상하게 하고 쉽게
회복도 되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 극에 이르면 온몸의 피가 모두 뿜어져 나오는데 이때 방
사된 내력으로는 무쇠나 바위도 가루로 만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피가 마르고 나면 이것을
사용한 사람마저도 얼마 못 가 죽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천산 마귀할멈의 지금 공력은 대부분 소모되었던 것이다. 만일 변청교가
이런 사실을 알고 손을 쓴다면 천산 마귀할멈을 죽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탈명한추가 천산 마귀할멈에게 패하자 오히려 충격을 받고는 전의를 상실해 버린 것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린 변청교가 중얼거렸다.
"천마해체대법……? 참으로 어마어마한 초수로군!"
그는 탄식을 하며 뜨락 밖으로 걸어 나가려고 했다.
천산 마귀할멈은 감히 그를 잡지 못했다. 그녀는 중년의 여인과 함께 길을 내주며 그가 나
가도록 옆으로 물러섰다.
"변청교, 그대의 탈명한추가 누구도 당해내지 못한다고 했는데 무슨 낯으로 강호에서 영웅
호걸들을 대하겠나?"
변청교가 걸음을 멈춰 섰다.
"그 말이 옳소. 내 탈명한추는 대단한 게 아니오. 내가 무슨 면목으로 나돌아 다니겠소. 심
산의 사찰이나 찾아가 삭발하고 중이 될까 하오."
그리곤 멀리 사라졌다.
매초풍은 곰곰이 머리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그녀는 천산 마귀할멈을 스승으로 모시고 무공을 배우기로 최종 결심을 했다. 그녀는 엽청
청에게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는 천산 마귀할멈 앞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그녀를 알아보고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매초풍 아닌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지?"
계속 두 번 머리를 조아린 매초풍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소녀는 오래 전부터 세상에 비길 자가 없는 신공을 우러러 봐 왔습니다. 이 소녀를 제자로
받아주신다면 더없는 행복으로 알겠습니다."
"그 따위 소리는 나중에 하고 내 딸을 어디에 두었느냐? 어서 내 딸을 데려오너라!"
천산 마귀할멈은 아직 기력을 다 회복하지 못해 비틀거렸다.
그녀는 매초풍을 보자 딸 엽청청이 생각나 혼란스러워졌다. 중년의 여인이 급히 천산 마귀
할멈의 맥을 짚어 보더니 당황했다.
"어서 숨을 조절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천산 마귀할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초풍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내 딸을 내놓아라!"
매초풍은 그녀가 지금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판단했다.
'자기 딸을 내놓으라고 하지만 내가 어찌 알 수 있겠어?'
천산 마귀할멈이 매초풍에게 부릅뜬 눈빛을 쏘아대며 외쳤다.
"어서!"
그녀가 매초풍의 목덜미를 거머쥐었다. 겁에 질린 매초풍이 뒷걸음질을 치려고 했다. 중년의
여인이 달려와 천산 마귀할멈을 말렸다.
"전 정말로 노마님의 딸이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협박을 해도 소용없어요!"
천산 마귀할멈이 계속 다그쳤다.
"네 년이 모른다고? 여혈의가 내게 알려 줬다. 철시 매초풍이 내 딸을 오혈궁에서 데리고
도망쳤다고 말이야!"
매초풍은 눈을 꿈벅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오혈궁에서 도망을 치기 전에 엽청청을 빼돌리긴 했지만 마귀할멈의 딸은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딸을 찾아내라니……?'
순간 매초풍의 눈동자가 크게 열렸다.
'그렇다면 엽청청이 묘상과 천산 마귀할멈 사이에서 태어난 그……! 천산 마귀할멈의 이름
이 엽첩비인 걸 보면 제 어미의 성을 따라……?'
갑자기 매초풍이 안색이 밝아졌다.
"따님의 성이 엽씨입니까?"
"그렇다. 성은 엽씨이고 이름은 청청이다."
매초풍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알겠어요. 그럼 제가 엽청청을 데리고 오면 저를 제자로 받아주시겠어요?"
"그렇게만 된다면 네 소원을 들어주마!"
매초풍이 얼른 엽청청을 끌고 왔다.
"바로 이 처녀가 스승님의 따님이 아닙니까?"
매초풍의 말에 천산 마귀할멈이 화들짝 놀라며 엽청청의 팔을 잡았다. 그런데 엽청청이 있
는 힘을 다해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이 마귀년아, 네 년은 우리 아버지를 죽이고도 어머니로 가장해 나까지 희롱하려 드는구
나!"
엽청청의 입에서 다짜고짜 욕설이 터졌다. 천산 마귀할멈은 크게 놀랐다.
"아니다. 내가 너의 어머니다!"
매초풍이 보다못해 나섰다.
"청청아, 이분이 바로 네 어머니란다."
"언니도 한패로군요!"
엽청청은 끝까지 외면하였다. 매초풍이 그동안 있었던 묘상과의 곡절을 들려주었다.
"그러니 어서 어머니라고 불러!"
천산 마귀할멈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엽청청이 달려와 자신의 품에 안기기를 원했
다. 엽청청은 그 자리에 붙박힌 듯이 서서 눈물을 흘렸다.
"아니야, 모두들 날 속이고 있어!"
천산 마귀할멈이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정말 내가 네 어머니란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널 찾았는지 아느냐?"
"그렇다면 그땐 왜 나를 버렸어요. 난 오혈궁에서 외톨이로 누구 하나 관심을 두지 않았어
요. 아버지마저 날 딸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난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고아라고
생각하며 이제껏 자라왔어요."
"청청아, 이 어미가 죄를 지었구나. 나를 용서해 주렴."
"해검계 옆에서 아버지가 절정공자와 싸움을 벌일 때 아버지가 제게 말씀해 주셨어요. 나는
비로소 궁주인 아버지가 왜 줄곧 나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대해 주셨는지 알게 되었어요.
원래 나는 아버지의 딸이었으니까……. 아버지에게도 고충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아버진 나
를 키워 주셨어요. 그래서 난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거예요."
그녀는 천산 마귀할멈을 외면한 채 눈물을 닦으며 말을 계속 했다.
"어머니라고 하지만 그동안 나를 찾아온 적이 있나요? 아버지를 죽이지 못해 날뛴 게 어머
니라면 난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모두가 내 잘못이다. 나를 용서해 다오. 지난 십여 년 동안 난 밤마다 네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을 보상할 테니 어서 내 품에 안겨 다오."
"나에겐 어머니가 없어요!"
엽청청이 몸을 돌려 뜨락문 쪽으로 달려갔다.
"청청아, 나를 두고 어딜 가니?"
천산 마귀할멈은 그녀를 애절하게 부르다가 그만 혼절을 하고 말았다. 매초풍과 중년 여인
이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정신을 겨우 차린 천산 마귀할멈은 딸을 소리쳐 불렀다.
"청청아!"
"그 앤 갔어요."
매초풍이 대신 대꾸하자 천산 마귀할멈이 일어서며 매초풍을 노려보았다.
"그 앤 내 딸이다. 그 애를 꼭 찾아오너라. 그렇지 못하면 너도 죽을 것이다!"
매초풍은 살기 어린 그녀의 눈을 보며 대답했다.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매초풍은 길을 떠났다. 그녀는 어떻게 엽청청을 찾을 수 있을까 고심을 했다. 그리고 무사히
그녀를 찾게 되기를, 그래서 천산 마귀할멈의 제자가 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칠팔십 리를 뒤쫓아간 매초풍은 생각보다 쉽게 엽청청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그녀는 엽청
청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쥐고는 간절하게 말했다.
"청청아, 이제 그만 고집을 부리고 나를 따라 어머니에게로 가자."
그러나 엽청청은 발을 구르며 고집을 부렸다.
"그 사람은 나쁜 짓들만 골라 해왔어요. 난 절대 그런 마귀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겠어요.
사람 냄새도 나지 않는 그 마귀를 어떻게 어머니라고 불러요."
"그럼 넌 네 아버지가 완벽했다고 생각하니?"
"하지만 아버지는……."
악명이 높은 것으로 치면 아버지 역시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엽청청이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묘상의 보호를 받아 왔기에 그녀는 아버지를 좋게만 여겨 왔었다. 아버
지가 악행을 저질러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매초풍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사실 두 사람은 피차 일반이야. 강호의 협객들의 눈에는 한결같이 악인으로 보인단 말이
지."
"아무튼 난 그 마귀에게 어머니란 소리를 할 수 없어요. 오혈궁으로 돌아가 어버지의 뜻을
따르겠어요. 그리고 아버지에게 천산 마귀할멈을 막아야 한다고 알려야겠어요."
엽청청은 막무가내로 떠나려 했다. 그러자 매초풍이 두 팔을 벌려 그녀를 제지했다.
"청청아, 궁주님께서 널 여혈의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는 게 두렵지 않느냐?"
"더 이상 절 막지 말아요. 난 이미 결심했어요. 어떤 억울함을 당하더라도 먼저 아버지를 보
호해야겠어요. 내가 싫다고 잘 말씀드리면 아버지는 여혈의에게 강제로 시집을 보내시지는
않을 거에요."
매초풍이 코웃음을 날렸다.
"흥, 왜 네 생각만 하지? 궁주님은 지금 심한 내상을 입어 병상에 누워 계시지 않느냐. 또
현재 여혈의가 오혈궁의 모든 일을 관장하고 있어. 궁주님은 오혈궁의 기틀이 흔들리지 않
게 하기 위해서라도 절대 네 말을 듣지 않을 게다. 꼭 여혈의에게 시집을 가라고 할걸."
엽청청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내가 마땅히 희생을 해야지요."
고개를 푹 숙이며 엽청청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매초풍은 엽청청이 이토록 고집을 부리자 난처해졌다. 강제로 손을 써서 엽청청을 제어하지
않으면 천산 마귀할멈의 제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매초풍은 갑자기 손을 써서 엽청청의 혈도를 눌렀다. 움직일 수 없게
된 엽청청을 자기 옆구리에 낀 매초풍이 부드럽게 말했다.
"청청아, 난 너희들 모녀간이 생이별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 이 언니를 원망하지는 말아
라."
매초풍은 엽창청을 끼고 정안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엽청청은 자기의 손과 발이 차츰 마비되는 것을 느끼고 매초풍을 졸랐다.
"언니, 날 빨리 놓아주세요. 난 그 마귀를 결코 어머니라 부를 수 없어요!"
매초풍이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타일렀다.
"천산 마귀할멈은 무공이 천하에서 으뜸이지. 네가 그분을 따르면 네게도 좋은 일이 많을
것이다. 너를 협박하여 시집을 보내려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생각을 좀 해보렴. 여혈의
같은 놈팽이에게 시집가기만 하면 넌 평생 마음 고생을 하며 살게 될거야."
엽청청은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언니는 왜 내가 싫어하는 노릇을 억지로 시키려는 거예요? 그래서는 안 돼요. 날 놓아주세
요. 그렇지 않으면 소리치겠어요."
천산 마귀할멈의 제자가 되라는 일념밖에 없는 매초풍에게는 엽청청의 성난 음성도, 또 간
절한 애원의 말도 아예 들리지가 않았다. 그녀는 숫제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달리기만 했다.
"사람 살려요!"
엽청청이 소리를 질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협객이라도 만나
면 큰 낭패를 보기 십상인 상황이었다. 매초풍은 얼른 그녀의 아혈을 눌렀다.
엽청청이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되자 매초풍이 여유를 찾으며 말했다.
"언니가 너를 해치자고 이러는 게 아니다. 너희 모녀를 상봉시켜 주자고 하는 짓이지. 오혈
궁에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이런단다."
매초풍은 엽청청의 속마음을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자기 어머니라는 것
을 알았고, 게다가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란 것도 확인했는데 오히려 외면하려고만 드니 매
초풍으로서는 의아스럽기만 했다.
매초풍은 뒤를 이어 자신의 신세를 되짚어 보았다.
'만약 내게 천산 마귀할멈과 같은 어머니만 있었더라면 여원외에게 겁탈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집 역시 무너지지 않았을 거야. 지금 우리 매씨 가문에는 나 혼자 외롭
게 남아서 강호를 헤매고 있다.'
매초풍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그들은 정안성에 이르렀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매초풍의 모습을 보고는 경이로운 표정을 지었다. 워낙 외진 산속에
사는 사람들이라 한 여인을 옆구리에 끼고 걸어가는 매초풍의 모습에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취붕객점 뜨락에는 천산 마귀할멈과 중년 여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주인과 심
부름꾼이 두 구의 시체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관청에서 나온 사람인 듯한 두
사내가 시체를 살피고 있었다.
매초풍은 심부름꾼을 불러 물었다.
"천산 마귀할멈은 어디에 있지?"
엽청청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것을 발견한 심부름꾼이 눈을 왕방울만하게 떴다.
"난 몰라요!"
매초풍이 그의 뺨을 한차례 갈기려고 했으나 꾹 참으며 다시 물었다.
"방금 전 얼굴을 면사포로 가렸던 여인 말이야!"
심부름꾼이 바들바들 손을 떨면서 대답했다.
"그 여인은 이미 옆에 있던 중년 부인이 데리고 갔어요. 그런데…… 어디로 갔는지는……."
이때 주인이 걸어오면서 물었다.
"소저는 그 얼굴을 가린 여인과 한패시오?"
매초풍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분은 바로 제 사부님이시죠."
근심에 싸여 있던 주인이 그 말에 매우 기뻐했다. 그는 서둘러 관청에서 나온 사내들을 불
러왔다.
"이 소저가 방금 싸움판을 벌였던 여인의 제자라고 합니다. 하하하, 이제야 내가 혐의를 벗
었군!"
관청의 사내가 매초풍을 노려보며 호령했다.
"넌 이 살인 사건과 관련이 있다. 우리를 따라 관청으로 가야겠다!"
그들이 쇠고랑을 꺼내 들고 매초풍의 손에 채우려 했다. 매초풍이 쇠고랑을 빼앗아 대문 밖
으로 멀리 내던졌다. 사내들이 눈을 부라렸다.
"이 년이 거역하려고 하다니……! 그야말로 큰 사건이 되겠는걸. 우리 정안성에서는 지금껏
죄를 지은 자가 그 벌을 피한 적이 없다!"
"얼굴이 반반하니 잡아가면 나리께서 입을 다물지 못하겠는걸."
두 사내가 히히덕거리더니 매초풍에게로 덮쳐들었다. 매초풍이 두 사내를 향해 구음백골조
를 썼다. 사내들은 가슴에 일격을 맞고는 그 자리에 그대로 늘어졌다.
이 광경을 목격한 주인이 도망치려고 했지만 다리가 떨려서 옴쭉달싹을 하지 못했다.
"관청의 아전들이 죽었다!"
주인이 소리를 질렀다. 화가 난 매초풍이 발로 주인을 차버렸다. 주인이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는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
매초풍은 그 자리에 좀더 있다가는 시끄러워질 것만 같아 다시 엽청청을 단단히 추스리고는
정안성 밖으로 달렸다.
수림 속으로 들어간 그녀는 엽청청을 내려놓고 혈도를 풀어 주었다. 엽청청이 날뛰면서 욕
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왜 아까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어요?"
"다 죽일 놈들이야!"
매초풍이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었다.
"매초풍, 난 지금부터 너를 벗으로, 그리고 언니로도 생각하지 않겠어!"
엽청청은 단호하게 한마디 던지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걸어갔다. 매초풍이 얼른 달려가
그녀를 붙잡자 엽청청이 소리쳤다.
"간섭하지 마. 내가 어딜 가든지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난 천산 따귀할멈에게 약속을 했다. 너를 그분에게로 꼭 데려 가겠다고 말이야."
그러나 천산 마귀할멈의 제자가 되는 조건이라는 사실은 말할 수가 없었다. 엽청청이 힘껏
매초풍의 손을 뿌리쳤다.
"다시 한 번 말하겠어. 이제부터 넌 나를 간섭하지 마. 자꾸만 귀찮게 굴면 아버지께 일러바
칠테다!"
묘상은 이미 황천객이 된 지 오랜데 엽청청이 그런 말을 하자 매초풍은 속으로 웃음이 나왔
다. 하지만 그녀는 짐짓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엽청청을 달래기 시작했다.
"문제는 내가 이미 네 어머니 앞에서 큰소리를 쳤다는 데 있어. 장차 두 사람이 상봉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겠니? 청청아, 넌 이 언니가 난처해지는 걸 원하지는 않겠지?"
엽청청이 조금 수그러졌다.
"언니의 호의는 이해해요. 하지만 난 가야만 해요. 아버지 곁으로 가야겠어요. 가서 아버지
의 착한 딸이 되겠어요."
하는 수 없이 매초풍은 다시 그녀의 혈도를 건드렸다. 그리곤 아까처럼 강제로 끌고 가려고
했다.
"네 어머니를 만나고 안 만나고는 이제 네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야!"
엽청청은 화가 났다. 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매초풍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
다.
엽청청은 결국 매초풍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엽청청은 그녀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수림을 벗어나자 엽청청이 입을 열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이미 떠나 버린 것을 봐서는 날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아요. 우
리 함께 오혈궁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요?"
"호호호, 보통이 아닌걸. 이 언니를 꼬드길려고?"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매초풍 역시 속으로는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 어디로 가서 천산
마귀할멈을 찾는단 말인가. 그녀는 천산 마귀할멈이 변청교와 싸우다가 내상을 입었고, 그래
서 어디론가 치료를 받기 위해 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는 알 길이 없었다.
매초풍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엽청청을 데리고 도처를 돌아다니면 자연히 자신들의
소문이 날 것이다. 그 소문은 분명 천산 마귀할멈에게도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쉽게
무공을 전수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추측이었다.
매초풍은 엽청청을 데리고 가급적 사람들이 많은 곳을 골라 다녔다. 그리고 자신들이 매초
풍과 엽청청이라는 말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