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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양씨거제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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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소식 살아가는 얘기 스크랩 양 방수 황석두(루까) 성인의 천묘식 기록 영화를 제작하다.
兵部公派 30世孫 梁芳秀 추천 0 조회 139 13.10.22 02: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양 방수 황석두(루까) 성인의 천묘식 기록영화를 제작하다.    

 

 이는 당시 수안보 성당 주임 정 로벨토 신부(메리놀 전교회 소속)님의 부탁으로 이루어진 내 생애에 또하나의 잊을수가 없는 사건이라고 할수 있다. 

우리는 황 석두(루까) 성인의 행적을 알고 성인의 뜻을 따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기에 여기 남긴다.  황 석두 성인의 본관은 평해이시며, 세례명은 루까이시다.

본래 풍기에서 사시다가 한 굉 조부님이 연풍현 병방리로 이사를 오셨다고 한다.

 

한굉 조부님의 슬하에 주현, 주보, 주면, 주긍의 4형제를 두었고, 주면은 석규, 석기, 석두, 3형제와 따님 3형제로 모두 6남매를 두신 다복하고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고, 이 거룩한 행사를 위해서 후손들과 같이 수안보 온천장에서 같이 유숙하며 지낼때에 들은 이야기다.

 

황 석두 성인께서는 1813년 순조 13년에 태어나셨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부모님들의 기대가 컷다고 전한다. 20여세가 되어 과거를 보러 가다가 어느 선비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듣고 성리학에 깊은 회의를 느끼던 차에 과거를 포기하고 천주교 교리 책을 빌려 가지고 돌아와 심취하게 되니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고 전한다

가족들이 과거를 보지 않고 왜 돌아 왔느냐고 물으니, 천상 과거를 보기 위하여 공부를 한다고 하니 아버님께서는 아들의 믿음을 꺽기 위하여 마당에 작두를 내려 놓고, 네 목을 베어 후환이 없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는 작두 밑에 목을 드리밀고 오히려 태연하였다고 한다. 아버님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친 그는 가족들이 개종할 때 까지 입을 열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2년 동안 벙어리 노릇을 하다가 가족들이 개종을 하자 말문을 열었다고 한다.  1845년 김 대건 신부님께서 페레올 고주교님과 다블뤼 안 신부님을 모시고 입국을 하자 그는 안 신부님을 모시고 포교에 전념하는 한편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고 한다,

그는 일찍히 강씨 부인과 결혼을 하였으나, 신앙 생활을 하며 동정을 지켜왔고페레올 고 주교님께서는 신부로 승품시키려 하였으나 교황청에서 그의 부인이 몸담고 있을 수녀원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나와 1857년 패롱 권 신부님께서 입국하시자 서천 산막동에 자리잡고 홍산, 서천, 비인, 남포등지를 돌아 다니며 복사로서 전교활동을 하며 양자 기원, 조카 천일, 조카사위 이 용래, 한의원 강 명흠등을 입교 시켰다.   

1861년에는 죠안노 오신부님께서 입국하시자 그의 복사가 되었고, 베르뇌 장 주교님의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니 가산이 탕진되어 형이 진 빚을 갚아 주기 위하여 빌린돈을 갚지 못하게 되자 안 주교님께서는 10년 동안 같이 있던 황 루까 성인을 멀리 떠나라고 추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안 주교님께서는 1862년부터 1865년 사이에 [천주성교공과], [천주성교 예규], [신명초행], [회죄직지], [영세대의], [성찰기략], 등을 번역 저술하기 위해 곧 그를 다시 불러 드렸다. 이 책들은 비록 안 주교님의 명의로 간행되었으나 실은 황 석두 성인의 문장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예산 거더리에서 교리를 번역, 저술하시고, 있을 때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안주교님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 포청으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심문을 받을 때 배교를 강요하였으나 끝내 거부하고 국혼 때문에 보령 갈매못으로 압송되어 다블뤼 안 주교님과 위앵 민 신부님과 오 매트르 신부님과 장 주기 신부님과 함께 1866330일 참수되었다.

 

순교직전 관장은 그들에게 다담상을 드렸다. 그러나 모두들 두려워하여 먹지 못하고, 있었으나 황 석두 성인 만은 홀로 하느님께서 주신 음식이니 마지막 먹읍시다. 하고 술을 부어 권하였다. 이 마지막 한 마디는 죽음을 초월한 성인의 영성신앙의 깊이를 느끼게 하여 지금도 가슴을 찡하게 울린다.

 

1968106일 복자로 시복 되시고 198456일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여의도 기념식에 참석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이곳 연풍은 하느님의 진리를 증거하다가 순교한 순교지이다. 이곳에서 순교한 선조 신앙인들의 역사를

듣고 온 마음 온 정신을 다해 우리는 복음대로 살도록 정진해야 할 것이다.    

연풍은 1801년 경기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 박해를 피하여 충청도와 경상도로 은거지를 찾아 나선 교우들이 문경새재를 넘어 점촌, 상주, 진보, 청송등으로 난을 피해가는 요로가 되었다.

 

이는 1801년 입교한 김 병숙(1755-1815)이 신앙을 위해 연풍교우촌으로 이주해와 살았다는 기록으로 쉽게 알수가 있다.

 

연풍 태생 성인으로 성 루까 황 석두 성인과 요한 이 윤일과 순교자로는 1867년 공주에서 순교한 조 아우구스띠노(1840-1867) 병인년 청주 형장에서 순교하신 秋() 순옥(1832-1866)회장, 홍주 감옥에서 순교하신 簡() 그레고리오(1804-1866), 충주에서 처형되신 김 말딩(1804-1867)과 김 마두(1828-1867)등이 알려진다.

 

연풍 포도청에서 병인년 박해시 김 요셉(68)과 전 바오로(23)가 형구 돌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셨고, 사형장(현재 치명 순교지)에서도 많은 교우를 처형하기도 하였다. 또한 1801년 이 순이 루깔다가 순교하자 그의 어머님과 올케는 의지할데 없어 큰 오빠가 사는 연풍으로 이사와서 살았다고 한다. 병인년 박해시 기적적으로 살아 남은 깔레 장 신부님이 연풍 마을을 지나가다가 포졸에게 발각되어 뛰어 도망가는데, 돈이 흘러 떨이지자 포졸들은 강 신부를 쫓아가는 것을 멈추고 돈을 줍기에 여념이 없자 이를 틈타 몸을 숨길수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 진다.

    

1866년 봄에 일어난 박해로 말미암아 12명의 성직자 가운데 9분을 잃고 이 때 기적적으로 살아 남은 신부님은 리델 이신부님과 깔레 강신부님과 페롱 권 신부님이 셨는데 넓리 알려져 있지않아 잘 모르고 있지만새로 오신 강 신부님께서 문경 마을과 연풍 마을에서 위험한 처지에 있었던 일화를 자신이 쓴 수기에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나는(깔레 강신부님) 문경 마을에 숨어 있었는데 어느날 밤 내가 약간 기침을 하는 바람에 내가 숨어있던 그 집에 우연히 들렸던 외교인한테 그만 들키고 말았다. 그래서 밤중에 도망치게 되었는데 나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셨던 신자가 친절히 나를 위해 길 안내까지 해 주었다. 그런데 산중에서 길을 잃어 버렸다가 다행이 길을 다시 찾게되어 몇몇 신자들이 살고있는 부근까지 가게되었다. 거기서 나를 위해 길 안내를 해준 신자는 집으로 돌려 보냈다.

그 신자는 집에 가보니 자기 집은 외교인 한테 완전히 약탈당하였다고 했다나는 이틀전부터 아무것도 못 먹고 극도로 피곤해서 지쳐 있었다.

 

신자들이 사는 마을에서 다시 숨어서 신자들 두서너분이 고백 성사를 보길래 성사를 주고 일요일엔 영성체도 주었다. 그런데 포졸들이 곧 온다고 하는 바람에 신자인 유 토마와 함께 다른 마을로 가기 위해서 내가 머물고 있던 그 마을로 떠났다. 그때 우리는 연풍마을에서 어떤 주막 앞을 지나가야만 했다.

 

그런데 갑짜기 누구요? 어딜가는 거요? 하고 어떤 사람이 소리쳤다. 우리는 깜짝 놀라 막 걸음을 재촉했지만 그 사람들은 우리를 수상히 여겨 다섯 포졸들 한테 붙잡히고 말았다유 토마가 내 앞에 걸어갔는데 도마가 강력히 항의 하는 바람에 바로 내앞에 있던 포졸들이 동료를 지원해 주기 위해서 동료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 기회를 틈타서 나는 도망치니 포졸들은 한놈이 도망 간다” 4-5명이 나를 추격하기 시작하였다나는 죽어라 도망 치는데 허리띠가 끊어지는 바람에 내가 가지고 있던 돈이 몽땅 땅에 떨어지니 포졸들은 나를 추적하는 것도 잊고, 돈을 주을려고 야단법석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뛰느라고 내 돈을 주을 생각은 감히 못하고,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쳐서 부근에 있는 언덕에 숨어 잤다. 나중에야 유 도마는 연풍 포도청에 끌려갔다는 것을 알았다. 유 토마가 라틴말로 된 신약성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발견한 포도대장은 나를 놓친 것이 분해서 포졸들을 보고, 굉장히 화를 내더랍니다. 유 토마는 심한 심문을 받으면서 두 서너번 고문을 당했지만 유 토마 한테서는 나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얻을수 없다는 것을 알고 유 토마를 풀어 주었다고 한다.

    

이 토록 신앙을 지키는데 어려움이 따랏던 우리 선조님들의 과거사를 들어다 보면서 오늘날 우리들은 자유로이 신앙을 지키는데는 문제가 없다고 하나 나름데로 신앙을 지키는데는 세상사 하나도 어렵지 않는 것이 없다. 가족관계로 부터 부모자식 관계와 친인척과 교우관계 사업상 만나는 개개인 인과 관계가 만만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진실이 외면 당하고, 어쩌면 남을 이용할까하는 파렴치한 인간들을 볼 때 마다 정의감 때문에 마음이 아픈적이 어디 한두번이더냐? 자존감을 일깨워 자존심을 상실하지 않겠다고 굳게 굳게 다짐해 보건만 참으로 분하고 분할때는 마음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중심이 서지 않는 현실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嗚咽(오열)할때가 어디 한두번이더냐? 매일 매일 아침 미사 시간에 내탓이요 내 탓이요 하고 가슴을 치건만 어디 세상사 모두가 내탓이란 말이냐?

    

이 모두가 부정적인 탓일까? 아니면 세상사 모두가 내 탓으로 돌리기엔 너무나 험악하고 살벌한 세상에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세상 살이가 만만치 않은 현실이다. 弱肉强食(약육강식)이란 생존의 법칙이 이 지구상에는 엄연히 존재하니 힘 없고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 험한 꼴을 보면서 살면서 분하고 한심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사는 것이 현실이다.

    

人間(인간)이 죽어 심판 받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다간 사람들에겐 너무나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수시로 나는 것 또한 矛盾(모순)일까?  

 

도리켜 보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님처럼 살겠다고 영세때 이미 서약 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 마저 돌려 대어 주고,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 주어라.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여라." 세상에서는 이렇게 사는것은 하나같이 손해보는 삶이며 바보같은 삶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음 선포를 위해 12사도를 뽑으신다.  이 사도들은 세상속에서는 바보같은 삶을 살았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바보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세상을 밝게 하는 지혜로운 삶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세상을 즐겁고 재미나게 하고, 세상의 심장에 불을 지피는 것으로 이것이 신자로서의 부름을 받은 우리의 소명일진데,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데,  분명 문제가 있다. 예수님께서도 아무 죄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도록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당신을 시기하고 모함하는 군중들을 용서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 세상은 나의 나라가 아닌 하늘나라 낙원에서 받을 영광을 말씀하셨듯이 저희도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을 생각하며, 이 세상의 온갖 고초을 참고 견디어  내고 생을 마감하는 당신의 훌륭한 제자가 되어 천국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도록 도와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리면서 주어진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나약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이 세상에 태어나 알게 모르게 지은 죄와 모든 잘못을 용서 해 주시도록 하느님께 엎드려 기도 합니다    

 

또한 인생의 밑 바닥에서 고뇌하는 이 현실에서 머나먼 타국에서의 수 많은 障碍(장애)는 한시도 나를 그냥 놓아 주지 않지만 이 또한 모든것 無血(무혈)의 순교정신으로 받아 드리고 살아 가면서 틈틈이 이 자료를 정리 한다.          

                                                  20111219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정리한다.    

 

           44년만에 청주교구 떠나는 메리놀회 마지막 선교사 정안빈 신부
     연풍성지 조성 등 순교자 현양에 헌신...복자진료실 운영, 황석두 성인 묘 이장 
 
"45년간 청주교구에서 선교활동을 할수 있었던 게 참으로 감사하고 기쁘다"며 "새 선교지를 향해 떠나지만 사제품 50주년 금경축은 못할 것 같다"고 웃으며 말하는 정안빈 신부.
  
된장찌개와 김치, 순두부를 버터나 치즈보다 더 좋아한 외국인, 10년 넘게 쓴 안경테가 부러져도 접착제로 붙여 쓰며 검소하게 살아온 선교사, 고 오기선(1907~90년) 신부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한국 순교자 현양에 헌신한 이방 사제….
 
1960년 6월 사제품을 받고 2개월 만에 메리놀외방전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 44년째 청주교구에서 사목해온 정안빈(미국명 Robert M. Lilly, 연풍성지 주임)신부가 2월 12일 오전 11시 충주 교현동성당에서 교구장 장봉훈 주교 주례로 은퇴미사를 봉헌하고 청주교구를 떠난다. 청주교구에서 활동한 마지막 메리놀외방전교회 회원이다.  
축복처럼 눈발이 흩날리는 1월 17일 연풍성지에서 정 신부를 만났다.
 
"40여년간 저는 물론 메리놀회는 청주교구에서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청주교구는 이제 서울이나 대구대교구에 비해 결코 부끄럽지 않습니다. 교구민 여러분도 계속해서 열심한 마음을 갖길 바랍니다. 또 교황님 말씀처럼 중국이나 북녘 형제들을 위해 기도를 아끼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전 이제 새로운 선교지를 향해 떠납니다. 청주교구에서는 은퇴하지만 건강이 허락되는 한, 계속 한국에 남아 사목할 생각입니다."
 
은발에 회색눈, 올해로 세수 77세를 맞는 노 사제는 여전히 정정하고 눈가에는 열정이 흘러넘쳐 보였다.
 
정 신부는 한국생활 대부분을 충주 교현동본당과 수안보본당, 연풍성지 등 충북 동북부권 일대에서 사목하면서 보냈다. 특히 수안보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62년 이후에는 미국 부모(야고보 · 헬레나씨 부부)에게서 사재를 가져다 연풍 형방건물(460평)와 성지 대지(719평)를 매입해 오늘의 연풍성지 주초를 세웠다. 성지에서 병인박해 당시 형구돌 3점을 발견한 데 이어 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서 성 황석두 루가 성인 묘를 확인, 82년 성지로 이장하고 성지에 대형십자가와 원죄없이 잉태되신 모후상, 황석두 성인 동상, 소성당과 성지회관을 세우는 등 성지 조성에 평생을 바쳤다.
 
또 99년부터 5년간에 걸쳐 메리놀외방전교회 한국지부 역사(1923년~) 중 1942년부터 60년간 역사를 다룬 415쪽 분량 '한국 선교(원제 Mission in the South)'를 집필, 발간하기도 했다.
 
"연풍을 떠나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은 고향인 미국 메사추세츠 노스아담스가 오히려 낯설어요. 차가 없서 공소에도 걸어다녔지만 주님 공경 잘하고 인정 많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60~70년대 교우들이 무척 그립네요. 하지만 한국에 들어온 지 40년을 훌쩍 념겼는데도 한국말이 부족해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숙명이겠지요. 영원히 한국 사람이 될 수야 없겠지만, 한국사람을 너무 너무 사랑했던 미국 사람으로 남을 것입니다."
 
미국 벨몬트주 성 미카엘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덕에 80년대엔 12년간 건국대 충주캠퍼스 영어영문학과 조교수직을 겸직하며 월급으로 성당 살림을 하기도 한 정신부는 "특히 수안보에서 한국순교복자수녀회와 함께 복자진료실을 운영하며 가난한 환자만 3만여명을 무료 진료한 것과 황석두 성인 묘지를 이장한 것 등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했다.
 
정 신부는 "제가 청주교구에 왔을 때 한국인 교구 사제는 단 한분도 없었지만 지금은 120명이 넘고 꽃동네와 양업고교, 성지만 3곳이 생겨나는 등 얼마나 큰 발전이 이뤄졌느냐"고 반문하고 "그래서 감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떠난다"고 말했다.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루가 22,42)라는 말씀 한마디를 기억하면서. [평화신문, 2004년 2월 1일] 
 
메리놀회 정안빈 신부 은퇴식 
44년간 선교사제로서 헌신 
 
- 정안빈 신부가 아들 신부인 청주교구 이동식 신부(왼쪽)와 미리내 천주성삼성직수도회 유승경 신부와 기념 촬영했다.

 

청주교구 마지막 메리놀외방전교회 선교사제인 정안빈(로벨또) 신부의 은퇴식이 2월 12일 오전 11시 정신부의 첫 본당사목 임지였던 충주 교현동성당에서 열렸다.
 
감사미사와 환송식, 환송연으로 이어진 이날 은퇴식에는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와 청주교구 사제단, 메리놀회 한국지부장 함제도 신부를 비롯한 수도회 관계자, 수도자, 신자 등 700여명이 참석해 44년간 선교사제로서 희생과 봉헌의 삶을 산 벽안(碧眼)의 노(老)사제에게 뜨거운 감사의 정을 전하고 하느님의 축복을 기원했다.
 
이날 은퇴식은 특히 메리놀회가 50여년에 걸친 충북지역에서의 선교활동을 공식 마감하는 자리. 메리놀회와 청주교구의 인연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9월, 서울대목구가 당시 충북감목대리구에 대한 사목을 메리놀회에 위탁하면서 시작됐다. 따라서 정신부의 은퇴로 50년 5개월에 걸친 메리놀회의 선교활동도 공식 막을 내리게 됐다.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는 이날 감사미사에 이어 열린 환송식에서 『메리놀회의 노고는 청주교구 발전의 밑거름이자 기초가 되었으며, 잊을 수 없는 은인들』이라며 감사를 표했다. 장주교는 또 내년부터 초대 청주교구장인 메리놀회 파야고보 주교 선종일(1월)을 메리놀회 선교사제들을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겠다고 밝히고 『메리놀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북방선교와 아시아 선교에 우리 교구가 더욱 매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인산 총대리 신부는 감사미사 강론에서 『한국땅에서, 청주교구에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느라 고생하신 정신부님은 마치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 사도와 같은 분이시다』면서 『그 정신을 이어 더 가난하고 필요한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정신부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선교생활 마감하는 정안빈 신부 
한국은 제게 고향입니다.  
『청주교구와 신자들을 사랑합니다』 
44년간 선교사제로서 혼신을 다했던 노사제의 눈가엔 눈물이 비쳤다. 정안빈(미국명 Robert. M Lilly.77)신부. 떠나야 하는 안타까움과 그 속내를 어찌 헤아릴까 마는 문득 문득 먼곳을 바라보는 그 눈길이 대답을 대신해준다. 
고(故) 오기선 신부를 「아버지」라 불렀던 정신부. 한국인 못지않게 순교성인들의 신앙에 탄복했던 그다. 물려받은 사재를 털어 연풍성지를 가꾸고 오늘날까지 보살핀 것도 하느님의 인도라고 생각한다.
 
1954년 미국 메리놀회에 입회, 60년 6월 사제품을 받은 정신부는 그해 8월 29일 한국에 들어왔다. 61년 4월 충주 교현동본당 보좌로 선교활동을 시작해 62년 6월부터 92년까지 30년간 수안보본당 주임으로 있는 동안 2037명에게 세례를 줬다.
 
『복자수녀회 수녀님들과 수안보 복자진료실을 운영하며 3만여명에게 무료진료를 하던 일과 황석두 루가 성인의 묘를 이장해 연풍성지에 모신 일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정신부는 최근 노틀담수녀회 종신서원식에 초청됐다. 30년전 수안보성당 마당에서 뛰어놀던 꼬마들이 자라서 종신서원을 했던 것.
 
『한국은 제게 고향입니다. 제가 아는 이들도 한국에 있고 가족들도 한국에 있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한국에서 살다가 이곳에 묻히고 싶습니다』

 

『청주교구에 파견된 것을 감사하고 다행으로 생각한다』는 정신부는 동료 사제들에게도 마음을 담은 한마디를 남겼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겸손한 사제가 되도록 하십시오』             [가톨릭신문, 2004년 2월 22일, 전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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