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의 잠언- 북한산 진관사/차용국
*문학인신문-기행에세이 3
북한산 준봉峻峯 능선을 넘어온 햇살이 일주문을 지나 진관사 경내에 가을빛을 풀어놓았다. 가을빛에 젖은 대웅전 앞마당은 바람을 다독이며 아늑하고, 범종각은 그 옆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고요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독경 소리와 목탁 두드리는 후렴구 리듬 가득한 산사는, 먼 길을 걸어온 산객의 나른한 발길에 아련한 풍경을 가지런히 펼쳐낸다.
고려 목종 때, 이곳에 신혈사神穴寺라는 절이 있었다. 진관津寬 스님이 수행하는 조그만 암자였다. 어느 날 이 사찰에 머리를 깎은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이 찾아왔다. 물론 불교를 숭상하는 고려에서, 황제가 되지 못한 황족이 스스로 승려가 되는 관례가 많았고, 승려 또한 존경받는 신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왕순은 스스로 출가하여 승려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경종(제5대)의 황비(헌애황후)였으며 목종의 모후(천추태후)에 의해서 사실상 대궐에서 쫓겨난 신세였다.
왕순은 태조 왕건의 아들인 왕욱과 경종의 황비인 헌정황후(천추태후의 동생) 사이에서 태어났다. 엄연히 태조 왕건의 직계 황손으로 성종(제6대, 천추태후의 오빠)과 사촌 형 개령군 왕송(천추태후의 아들, 훗날 제7대 목종)의 보살핌을 받으며 황실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성종이 병사하고 목종이 황제에 오른 후 천추태후는 외척인 김치양과 사이에서 낳은 아들에게 황위를 잇게 하려고 모의했다. 동성애에 빠진 목종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천추태후에게 대량원군 왕순의 존재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궁에서 내보낸 후에도 집요하게 시해하려고 했다. 거처하는 신혈사에 독이 든 음식을 보내기도 하고, 심지어 자객을 보내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진관 대사는 이러한 대량원군의 비참한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진관 대사는 대량원군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적절한 조치로 그를 보호했다. 진관 대사는 예기치 못한 자객의 기습을 예상하고 암자의 수미당 아래에 굴을 파서 대량원군을 숨겨놓기까지 했다.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하고 천추태후는 실각하여 쫓겨났다. 용손龍孫의 씨가 마른 고려 황실에서 대량원군은 유일한 황위 계승자였다. 마침내 대량원군은 황제(제8대 현종)에 올랐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진관 대사의 고마운 은혜에 보답하여 사찰을 크게 증축하고, 절 이름에 ‘진관’을 붙여 하사했다. 이 일대의 마을 이름인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도 현종이 진관 대사의 은혜에 보답하여 하사한 ‘진관’에서 유래한다.
향로봉과 비봉 사이에서 각자의 물길을 만들며 내려온 계곡은 진관사 앞에서 하나로 포개진다. 두 물줄기가 합류한 계곡은 제법 넓고 풍요로운 수량으로 수면의 크고 작은 바위를 스치며 흘러내린다.
봄이면 향로봉과 비봉 언저리에 숨어 움츠렸던 작은 샘들이 햇빛의 신호를 받아 일제히 틈을 벌려 샘을 일으켜 세운다. 여름이면 바위 틈새를 비집고 솟아 나온 샘물이 푸른 초목을 흔들며 신난다. 가을이면 수면에 비친 아늑한 풍경이 돌을 스쳐 흐른다. 그 소리는 노랗고 빨간 단풍에 내재內在된 새 시대의 잠언箴言처럼 맑다. 만남의 인연마저 시류의 득실을 따져가며 관계 맺는 인간사의 던적스러움이 진관사 계곡의 물빛에는 없다.
[차용국의 기행에세이] 새 시대의 잠언 - 북한산 진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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