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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통 북방연수 1일차 2016.4.19.]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고양시협의회 주최 5박6일의 북방연수-러시아 항일유적지 탐방-를 다녀오다.
08:00 고양시청 앞에 집결
13:05 인천공항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공항으로 출국,
16:00 (현지시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
도착하니 담양댁이라는 현지 가이드분이 나와 우리를 맞는다.
16:30 공항을 출발하여 한시간정도 걸려 '늪지대'라는 뜻의 우수리스크 도착
우스리스크는 북한, 중국과 연결된 TSR(시베리아 횡단열차) 물류수송망을 바탕으로 러시아 극동지역의 물류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는 곳
가는 도중 가이드가 러시아에서의 항일독립운동사에 대한 설명을 감동적으로 전하다.
중국의 (동, 서, 북)간도지방과 연해주, 사할린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은 주로 북한 (함경도, 평안도)에서 조선말, 일제시대에 천재지변과 일제탄압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항일투쟁을 위해 정치적으로 망명한 한인들이고 이들을 중국에서는 '조선족'이라 부르고 있고, 주로 남한(경상도)에서 연해주, 사할린으로 넘어간(최초의 한인마을 지신허) 한인들을 고려인, 카레이스키라고 부르며 현재 약 50만명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일제시대(1938~1945) 일본국가총동원령으로 강제징용을 당한 약15만명(주로 경상도인)이 탄광, 벌목,도로공사에 투입되어 넘어간 한인들을 사할린한인이라고 부르며,
특히나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전한 직후(1937.9.21~11.11) 고려인이 당시 연해주 주둔군인 일본군에게 첩보를 제공하지 못하도록하는 목적(실제로는 스탈린의 소수민족단결 차단 목적)으로 약 50일간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17만2,481명 (우즈베키스탄 7만6,526명, 카자흐스탄 9만5,256명) 강제이주시킨 참혹한 역사를 마주해야 했다.
여기에 당시 고려인들을 이동시킨 주요수단으로서의 극악한 열차환경 (나무로 얼기설기 짠 짐칸)은 혹한의 겨울에 급히 들고나온 옷과 이불, 음식으로 40여일을 연명하면서 이동했고, 그로인해 첫해 7천여명, 이듬해 1938년까지 총 4만여명이 사망하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강제이주를 거부하던 2,800여명의^ 엘리트군(인텔리, 학자, 군지휘관 등)들이 저항자로 인정되어 러시아군에게 재판없이 총살한 통분할 사건도 있었으나 러시아 한인들이 갖고 있는 끈질긴 인내와 개척정신으로 몇 십 년만에 황무지를 옥토로 가꾸다.
18:00 '최재형선생 생가터' 도착
1858년 함북 경원의 노비 자식으로 태어나 러시아연해주로 이주 후,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러시아 거부巨富의 양자로 들어가 군수업을 통해 막대한 부富를 축적하고,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당시 최고의 지성인으로 성장.
일제의 압박으로 만주에서 연해주로 밀려온 독립군들에게 전재산을 털어 군자금과 신무기 지원 뿐아니라 직접 나서 항일독립운동을 진두지휘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지내다가, 1920년 4월 5일, 일본군에 의해 총살을 당함.
공원길로 이동하여 전로한국중앙총회 결정장소였다는 곳(지금은 학교시설)에 들르다.
그리고 다시 공원길을 걸어서 고구려 또는 발해시대에 만들어진는 거북이공원으로 이동하다.
19:30 저녁 후 우수리스크 호텔로 가서 체크인하다.
[평통 북방연수 2일차, 2016.4.20.]
08:00 호텔 체크아웃!
가이드선생이 이상설선생의 우수리스크에서의 행적과 한인 최초의 여성사회주의 항일독립운동가였던 김 알렉산드리아 스탄케비치의 장대한 일생을 알려주다.
김알렉산드라는 연해주 우수리스크 근처에서 함경북도 출신 김두서의 딸로 태어났다. 아주 어릴 때 어머니를 잃은 그녀는 10살 때 아버지마저 여의고 아버지 친구인 폴란드인 스탄케비치에게 맡겨짐.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학교를 마치고 교사로 일하던 김알렉산드라는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 1914년 이혼한 김알렉산드라는 우랄산맥 벌목장 통역으로 일하게 됨. 한·중·러 노동자들의 체불임금을 받아주기도 하며 신망을 얻었고, 1917년 초 러시아사회민주당에 들어감. 그 해 7월 블라디보스토크로 온 김알렉산드라는 중국과 한국 출신 노동자, 1차대전 전쟁포로 등을 상대로 혁명을 선전하는 일을 전개. 이듬해에는 하바로프스크 시당 서기와 회계, 극동소비에트 외무위원직을 맡고 1918년 5월 한인사회당 결성 시 중앙위원으로 한인 사관학교 설립, 한국인 100여명으로 적위대 조직하였으나 연해주에 상륙한 일본군 등 외국간섭군의 지원에 힘입은 백군이 한인 적위대를 포함한 혁명세력과의 시가전 끝에 하바로프스크를 탈환. 1918년 9월10일 마지막까지 남았던 소비에트 간부들이 기선에 올라 아무르강 상류를 향해 탈출을 감행. 하지만 백군에 나포. 일제가 자국민임을 주장하며 백군에게 그녀의 체포 요구. 김알렉산드라는 심문에서 왜 여성으로서 러시아혁명에 참여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조선 인민은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혁명에 성공할 때에만 자유와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세계의 절반은 여성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09:00 수이푼(솔빈)강 도착.
이곳엔 독립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1917년에 돌아가시고 만 이상설선생의 추상같은 유언("독립된 조국이 아니면 그 곳에 내 시신도 들여놓지 않겠다.",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내 제사도 지내지말라")에 따라 시신을 화장하여 뿌렸다고 하는 수이푼 강가에,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에 의해 2001년 10월 18일 3m 높이로 유허비가 세워졌으며 비문은 한글과 러시아어로 새겨졌다.
09:30 수이푼강을 해자로 이용, 적의 침입을 막았다하는 발해절터 혹은 발해성터라 불리우는 곳으로 도착. 이 지역은 우수리스크의 중국식 옛 이름 '쌍성자(雙城子)'는 본디 방어를 위해 평지성과 산성을 나란히 배치했던 옛 고구려의 도읍 형태에서 따온 지명으로 여겨지며,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왕국의 5경 12부 중 '솔빈부'도 이곳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다고 한다.
조선인의 이주가 시작된 첫 번째 지역이 바로 이곳이다.
10:30 고려인강제이주 140주년기념관인 고려인문화관 방문.
이 곳은 고려학술문화재단 장치혁 회장이 기증한 연해주 고려인재생기금의 건물로 1층에는 고려인 역사관이 있어 러시아한인들의 러시아 이주, 항일독립운동,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 연해주로의 재이주 과정이 동영상과 사진, 여러가지 자료를 체계적으로 모아 정리한 곳으로 고려인문화관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구소련 스탈린시대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그리고 다시 돌아온 고려인들의 고난과 시련의 역사와 앞으로의 희망을 함께 보여주려고 만든 곳
11:30 마트에서 쇼핑
12:30 점심
14:00 미하일로프카에 세워진 고려인들의 정착지, 우정마을에 도착.
이곳은 대한주택건설협회의 도움을 받아 고려인 우정마을을 세우는데 기초가 되었던 건물을 게스트하우스로 사용.
소련 체제 당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던 고려인들이 소련체제가 무너지고 러시아 정부가 들어서면서 각 지역의 민족주의 성격이 강해지자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었던 고려인들이 이주 초기 지역인 연해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어, 1990년대 후반 대한주택건설협회에서 고려인들의 재이주를 지원하기 위해 이 지역에 약 1,000동의 주택을 지어 고려인들의 대규모 정착촌을 세우려 했으나 IMF 등 악재가 겹쳐서 지금은 33가구 정도만 정착하고 있다고 한다.
15:00 인근의 고향마을에 도착.
이곳 고향마을은 한국-고려인간 주택결연사업에 따라 2007년 조성되었으며(제2의 우정마을 성격), 현재 우즈베키스탄 출신 18가구가 정착, 축산(돈사), 비닐하우스 사업에 종사. 우정마을, 고향마을에 정착 고려인 지원사업을 실시 중인 현지 NGO(동북아평화연대) 관계자는 현재 고려인 일자리 창출사업으로 청국장, 된장 제조 작업장(3곳)을 운영 중이며, 약 30명의 고려인들이 종사하고 있다.
15:30 블라디보스톡 이동
16:30 잠수함박물관 옆 조그마한 광장에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에 헌화하고, 제2차세계대전 때 희생된 참전 러시아 군인들을 조각한 벽, 2천5백만명의 참전 희생자를 낳은 전쟁영웅들의 이름을 새겨 놓은 위령자의 벽,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4대의 적함을 침몰시킨 전설적인 잠수함 C-56 박물관 내부를 관람. 다시 '승리의 아치'라고 불리우는, 마치 파리의 개선문을 복사한 개선문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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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0 블라디보스톡 시민들의 휴식처로 유명한 젊음의 거리, 나베레즈나야거리와 이어진 아르바트거리에서 자유시간
18:30 공원 인근의 식당에서 식사
19:30 러시아 영사관 교육장으로 이동, 총영사님의 환영사와 평통의 자문위원이시고 전역해군대령님이신 백동일 자문위원님의 열띤 강의 - 연해주와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톡에 대하여 - 를 끝으로 호텔로 이동.
20:30 블라디보스톡의 아무르스키 잘리브호텔에 체크인
[평통북방연수 3일차, 2016.4.21]
8:30 호텔에서 버스출발, 루스키 섬으로 가다.
루스키 섬은 2012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 APEC 개최지로 확정된 뒤 행사이후 활용방안을 고심하던 푸틴의 명령으로,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대학을 이 섬 안으로 모두 모아 극동연방대학 캠퍼스로 이용하고 있다.
10:00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종점이자 시발점인 블라디보스톡역. 여기서 시베리아횡단열차 기차표(10:40)를 끊고 우골라야라는 곳까지 한시간 동안 열차여행, 도착 후 이미 와있던 버스로 돌아옴.
12:30 중식
13:30 블라디보스톡 시내와 금각만, 아무르만, 루스키 섬과 시내 전역을 조망할 수 있는 독수리 전망대(독수이의 둥지란 뜻의 언덕) 관광 후 탑 밑 숍에서 쇼핑 뒤, 블라디보스톡의 한인 거주지였던 신개척리로 출발
14:30 1911년 중엽 블라디보스톡의 북서쪽 이곳 아무르만 연안 산기슭에 새로이 신한촌이 건설되어 한인들은 통나무식과 석조식 형태로 약 200여동의 러시아식 주택을 지어 거주.
연해주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였던 이곳은 1999년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위원회 주관으로 남.북한.해외동포 상징기념탐 건립운동을 펼쳐 2016.3.11에 와서야 신한촌역사 재건을 위한 기념공원, 기념비 기공식 행사를 개최함.
그리고 우리는 이곳을 평생 지켜오신 지킴이 선생님을 뵙고 기념비 앞에서 헌화와 묵념(몇년 전 중풍을 앓은 뒤 몸을 제대로 건사하지도 못하시면서도 이곳을 계속 지키고 계신다고 한다.)
16:00 러시아정교회 성당 관람
17:00 극동지방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아르세니예프 향토박물관 관람.
이곳은 여행가이자 현지 조사가였던 아르세니예프의 이름을 따서 1890년 설립, 자연과 생태환경, 동식물과 광물 표본, 민속학, 고고학, 역사, 예술, 전쟁사 등에 관한 사료 40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프리모르스키(Primorsky) 지역의 고대부터 현대까지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곳
18:00 블라디보스톡 해변 젊음의 거리 나르베즈나야, 아르바트 거리 옆에 있는 식당으로 다시가서 특식으로 냉동? 왕게요리 식사 후 호텔로 돌아옴
[평통 북방연수 4일차, 4.22]
08:00 공항으로 출발. 가이드선생과 아쉬운 이별
10:10 블라디보스톡 공항 출발
11:50 사할린 공항 도착. 입국하니 북한 말투의 가이드선생이 나와 우리를 맞는다.
12:30 점심
14:30 사할린 호텔에 우선 체크인,
16:30 버스 이동
17:00 사할린주 전승기념광장 도착.
꺼지지 않는 용사의 불꽃과 전사들의 동상 그리고 전사자의 이름이 새겨진 벽 관광.
17:30 문학박물관 도착.
입구 오른쪽에는 커다란 나무 몇그루 사이에 안톤 체홉의 두상이 세워져 있다. 이 박물관은 바로 이 안톤체홉의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담은 곳이다.
안톤 체홉이 1890년 모스크바 야로슬라블역에서 머나먼 '지옥으로 가는 수행' 길에 홀홀단신으로 올라 러시아의 젖줄인 볼가강을 지나 기차와 마차로 광활한 시베리아를 거쳐서 극동의 타타르해협을 넘어 그해 한여름 7월 중순 석달간의 여정 뒤에 사할린 섬 북부에 도착, 석달 이틀간 '지옥의 섬'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그해 겨울 12월 8일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그 장대한 여행에 대해 단 한편의 문학작품과 회상기도 남기지 않고 '사할린 섬'이라는 위대한 '사회학적 보고서'만을 남긴다.
18:30 영화배우 율부린너의 생가터와 동상에 가다.
19:00 사할린문화센터 도착. 블라디보스톡 시 영사관의 사할린주 출장소와 한인단체, 관계기관들과의 리셉션.
현재 2층 짜리 건물의 1층엔 우리나라 교육부 산하의 한글학교인 한국교육원이 월세를 주고 입주해 있고, 한인회와 한국교육원, 도서관이 있으며, 식당, 숙박시설도 운영되고 있음.
또한 한인문화센터 입구에는 ‘사할린 희생사망동포 위령탑’과 ‘이중징용광부 피해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한인문화센터 안으로 들어오니 바로 옆에 있는 한국관 식당에서 미리 차려놓은 푸짐한 한식으로 먼저 배부른 만찬을 한 뒤 이어서 사할린주 관계자들과 한국 고양시평통 관계자들이 상견례를 갖고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듣다.
오늘 이곳 사할린주 쪽에서는 블라디보스톡 영사관 소속 사할린주 사공장택 출장소장, 사할린주 한인협회 임영균 대표와 한인회 임종환 회장, 이산가족협회 박순옥 대표, 노인회 김홍지 회장, 한국교육원 장원창 원장, 우리말방송국 김춘자 대표, 새고려신문 배위토리아 사장, 아시아나사할린지점 홍정환점장, 조선한민족 콩글레스 이규률 대표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사할린주 한인사회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짧지만 절절한 이야기를 진중히 듣다.
우신구 전회장님의 감사소견 후 선물 증정식과 단체사진 촬영으로 리셉션을 마치다.
20:00 백동일 자문위원의 통일교육2- 사할린에 대하여-를 진행.
20:30 호텔로 들어가 체크인
[평통 북방연수 5일차, 2016.4.23.]
09:00 호텔 출발
코르사코프시 '망향의 언덕' 위에는 한강포럼과 대우건설이 제작한 '사할린 희생동포 위령기념조각'이 세워져 있다. 한강포럼이 2005년에 포럼 1,000회를 기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사할린
우리말방송국과 사할린한인회의 협조와 현지파견기업인 대우건설과 협력하여 우여곡절 끝에 2007년 10월 15일 이곳에 세운 것이다.
1945.8.15 일본패망 시 일본인 27(35? )만명을 급거 귀국시킬 때, 당시 2만3,498명의 한인들에게는 유즈노 사할린스크 최남단 항구인 "코르사코프에 집결해 있으라, 곧 귀국시켜주겠다." 고 속인 뒤 바로 다른 항구로 극비철수하면서, 그 말을 믿은 한인들만이 기약없이 귀국선만 기다리고, 결국 사할린에 방치되어 국적마저 상실되었으나 끈질긴 '국적확인소송'으로 결국 승소함으로써 1992년부터 추진된 영구귀국사업결과 2007년까지 2,221명(한인1세)이 영구귀국했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사할린 고려인은 약 2만5천명이라고 한다.
11:30 마트 쇼핑
12:30 중식
13:30 고르늬 보즈두흐 전망대 관광 실패!
14:00 재래시장 쇼핑, 건물 안에 들어서보니 치즈와 소시지, 보드카, 고기와 채소, 의류와 각종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진열된 동네 대형마트 축소판이다.
15:00 사할린주 향토박물관 관람.
이 건물은 1937년(쇼와12년)에 준공한 것으로 당시엔 가라후토청박물관으로 불리웠고 콘크리트 구조의 건물에 기왓장을 조합한 1930년대 유행한 '제관 양식'이라 불리우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 중의 하나.
꼭 오사카성을 닮은 박물관 입구에서 결혼식 사진촬영 해프닝
16:30 러시아정교회 성당
이곳에서는 운좋게도 처음보는 러시아정교회 예배 경험
17:30 사할린 미술관 관람
사할린 미술관은 일본인 건축가에 의해서 1930년에 지어진 아르누보 건축스타일의 건물.
현재 미술관은 11,000점 이상의 전시물들을 보유하고있으며 미술관의 컬렉션은 여덟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형 홀과 1층 로비에 일반 전시물, 영구 전시물들은 2층에 전시됨.
18:00 관람을 마치고 버스로 레닌광장, 레닌동상을 관광하고 다시 한국관에서 저녁.
20:00 호텔 체크인
[평통 북방연수 6일차, 2016.4.24]
08:00 사할린 공항으로 출발.
10:15 서울 출발.
12:25(한국시간) 인천공항에 도착!
새로 취임하신 박호영회장님과 이번 여행을 총괄하신 우신구전회장님과 여정팔단장님, 기획총괄해주신 주철기위원장님과 실무총괄해주신 박춘상사무국장님과 이혜민행정실장님 그리고 이번 여행을 담당하신 정기한 여행사대표이자 자문위원님 그리고 42명의 자문위원님들, 현지에서 수고해주신 여행사와 가이드선생님 모든 분들에게 감사와 행복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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