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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전야
최덕성 교수의 <종교개혁전야>(2003)을 읽으면서/ 최재호
최덕성 박사와 만남
1. 내가 본 최덕성 박사
최덕성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2000년대 초반 고려신학대학원에서였다. 높은 콧날과 금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강렬한 눈빛은 그가 매우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보기에 따라서 차가워 보이기까지 한 그는 시종일관 자신 있는 제스처와 열정적인 대화법을 구사하며, 처음 만난 필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당시 최 박사를 만난 이유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들 간의 불화의 실체를 알아내고 취재할 목적이었다. 그때 그 학교 안에는 최 박사와 대척점에 선 교수들이 있었다. 이유는 양측의 신학적, 교회 정치적 견해 차이였다.
당시 최 박사는 자신이 속한 예장고신 교단의 정체성에 대해 교단 내외부의 일단의 신학자 그룹과 논쟁 중에 있었다. 고신교단의 태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고(故) 한상동 목사가 분리주의자였는가 하는 것과, 한국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고신교단이 이른바 완전주의적 분리주의 성향을 가졌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최 박사는 교회사 학자로서 글로 자신의 말을 했다.
<한국교회 친일파전통>(2000)이라는 두툼한 분량의 날카로운 필봉(筆鋒)의 책을 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자신이 속한 고신교단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한국기독교장로회, 예장통합, 예장합동, 감리교 등 굵직한 대형교단들의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행적과 배교행위의 치부를 제대로 드러낸 책이었다. 책을 통해서 그는 ‘신앙고백교회사관’이란 그의 신학적 틀과 학문적 소신 속에서 실로 껄끄러운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한국교회 대다수 지도자들이 일제치하에서 교회를 지키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로서 넘지 말아야 할, 아니 넘어서는 안 될 일들을 행했으며 해방 후 이를 공적(公的)으로 참회하고 청산하는 과정도 없이 교권(敎權)을 잡았다는 뼈아픈 지적을 쏟아낸 것이다. 반대로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의 공적 회개와 자숙을 요구하다 축출되어 교단을 이룬 고신교단은 신앙고백교회사관으로 볼 때 분리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정당하고 순수한 신앙을 가진 보편교회이며, 적통(嫡統)이라고 강조했다.
이 책의 출간으로 한국교회의 공적(公敵)이 된 그가 책을 통해 펼친 논지는 16, 17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정당성과 옳음은, 성경의 권위와 이에 입각한 정통교회가 고백해온 신앙고백 그리고 교회의 역사에 의해 증명되었던 것이지 결코 무리의 중다(衆多)나, 세력이나 규모나, 오랜 역사적 전통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었다.
같은 논리로 그는 해방 전 일제치하의 대다수의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와 일본 천황 곧 천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실, 일본 왕과 침략전쟁,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미화하고, 성경이 계시한 바른 예배와 참 신앙을 저버린 일들은 성경과 신앙고백에 비추어볼 때 명백한 배교이며 죄악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오히려 한국교회 변두리 소수의 순교자와 출옥성도들이 취했던 행동과 태도가 정당했음을 변론했다. 그런 그에게 있어 한상동 목사는 교회의 거룩과 순결을 위해 희생한 수난성도요, 순수하고 바른 교회를 재건하고자 했던 교회 지도자였으며 그에 의해 세워진 고신교단은 보편교회와 한국교회의 적통(嫡統)이었다.
당연히 이런 그의 역사관은 책속에서 대척점에 서 있던 기장, 통합, 감리교, 성결교 등은 물론 고신교단과 합동과 분리의 역사를 공유한 예장합동 교단으로서도 못마땅한 시각이었다. <한국교회 친일파전통>(2000)은 2001년에 한국복음주의신학회로부터 신학자대상(학술상)을 받았다. 그러나 출판된 이후 수많은 논란 속에 있었다. 특이하게도 고신 교단 안에 있는 신학자, 목사들 가운데도 그의 책을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타 교단에 대한 배려 없는 사고를 가진 책으로 보면서 못마땅해 하는 분들이 있었다. 특히 교회연합운동에 앞장선 분들에게는 매우 껄끄럽고 곤란한 내용의 책이 아닐 수 없었다.
뒤이어 최 박사는 구약학을 가르치던 동료교수 이성구 박사와 격렬한 대립각을 세웠다. 최 박사의 신학적 이해로 볼 때 이 박사의 사상은 자유주의 신학 경향이 뚜렷하고 성경관과 교회연합일치 사상, 특히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자유주의적이란 것이었다. 오랜 교수회 내의 불화와 논쟁 뒤에 총회에 상정된 이 문제에 대해서 고신총회는 최 박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그 뒤 입시부정이라는 이름의 업무방해 사건이 터졌고 이번엔 최 박사가 그 일에 휘말려 신학대학원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거듭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법정도 교단도 그의 변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학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교단(敎壇)을 제시한 곳은 부산의 브니엘신학교였다. 그는 고신교단에 대한 안타까움, 애정, 서운함을 가지고 부산으로 자리를 옮겨 신학교 총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은퇴를 앞둔 지금, 여전히 최 박사는 당시 사건을 자신을 겨냥한 정치적 권력형 음모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다.
최 박사는 신학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분명히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종종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고신 교단 내 신학적 위상을 위해, 혹은 감정적으로 신학교의 동료 교수들을 음해하거나 정치적으로 공격하는 등 무리수를 두는 것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고신출신 학자들의 모임인 고려신학회를 만들고 주도적 역할을 했던 그였지만 정작 어려움을 겪을 때 그를 돕는 사람은 없었다.
최 박사는 이른바 ‘신앙고백교회사관’이라는 독특한 신학적 입장을 가졌다. 이것은 개혁신학의 눈으로 역사를 파악하는 사관이다. 관용과 포용, 화합의 포스트모던 시대에 개혁파 신학, 개혁파 신앙고백을 이야기하는 것은 편협해 보이기도, 외골수로 보이기도 한다. 구시대적이고 주변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학문이 그러하지만 특히 그가 속한 교회의 신학인 개혁신학은 선명함이 필수적이다. 이것도 저것도 가능하다면 그것은 신학이 바르게 세워지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신학자로서, 교회사 학자로서 그의 신앙고백과 신학과 신념은 그가 어떤 강연을 하고, 어떤 저서들을 썼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정통신학과 경건, 신앙고백, 개혁파교회의 목회, 에큐메니칼운동, 종교다원주의, 개혁주의 전통, 종교개혁전야, WCC, 신학충돌, 교황주의와 로마가톨릭교회, 위대한 이단자들 등에 관한 저서들을 남겼다. 비록 그와 깊이 있는 교제를 지속적으로 나누지는 못했으나, 그의 책들과 대화를 통해 살펴 본 최 박사는 자신의 신앙고백과 학자적 양심에 충실하려 애쓴 신학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 하다.
그런 그가 얼마 전 제자들이 자신의 은퇴를 앞두고 기념논총을 출간하려 한다고 알려왔다. 그래서 그의 책 <종교개혁전야>(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3)을 중심으로 글을 쓰기로 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이어진 그와의 인연과 함께 그에 대해 지켜본 관찰자로서의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되었다. 이 책은 최 박사의 강인한 사상과 올곧은 학문활동의 동기를 엿 볼 수 있는 상당한 내용을 담고 있다. 중세기와 종교개혁전야의 상황은 필자가 본 최 박사의 신학과 사상을 살펴보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2. 종교개혁전야
2017년 한국교회에는 ‘종교개혁5백주년’이라는 열풍이 몰아쳤다. 5백 년 전,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성채교회에 내걸었다는 95개조 반박문을 기념하는 행사들로 2017년 한 해를 떠들썩하게 보냈다. 논란이 많은 그 역사적 진실성은 덮어두고라도, 마치 한국교회가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의 적자(嫡子)인양 다양한 이벤트와 행사를 개최했다. 그리고 2017년 11월경이 되자 한국교회는 거짓말처럼 다시 조용해졌다.
우리 시대의 경우 교회개혁은 결코 열풍이나 유행처럼 한순간 기억하고 끝낼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회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뿌리부터 열매까지 말씀의 원리를 많이 벗어나 있다. 감상적인 기념이나 이벤트성 행사로 자기점검과 개혁을 이야기해도 좋을 만큼 낭만적인 상황이 아니다. 게다가 개혁파 교회들은 소위 기독교 영웅이나 아이템을 부각시키려는 여러 가지 의도가 만들어낸 기념행사들을 지양해온 바이다. 한국교회의 종교개혁500주년기념은 그만큼 우리시대 한국교회의 가벼움과 얕음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고 하겠다.
본질적 질문을 던져본다. 과연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가 주도했고 그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다. 수많은 망치질 뒤 마지막 망치질에 대못이 쑥 들어가듯이 루터 앞선 수많은 교회개혁자들이 있었다. 중세의 기나긴 시간, 길게 드리워진 짙은 그늘, 부정적인 사회현상들은 하나하나가 전조(前兆)가 되고, 훗날 직간접적인 종교개혁 불씨가 되었다. 어쩌면 마르틴 루터를 부각시켜 종교개혁을 하나의 기념일이나 행사로 만들어낸 것은, 수많은 앞선 개혁자들의 희생과 수고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행위이거나, 역사를 통해 당신의 경륜과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하심을 너무도 나이브하게 생각하는 일이 된다. 2천 년 전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심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교회는 잠시도 사라지지 않고 든든히 이 땅 위에 존재해 왔다. 교회를 보존하고 그릇된 길에서 돌이키시고 또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이 일을 빈틈없이 진행해왔다. 그것을 최덕성 박사는 그의 아름다운 책 <종교개혁전야>(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3)를 통해 분명히 전하고 있다.
<종교개혁전야>는 2003년에 햇빛을 보았다. 이 책은 11~13세기 십자군운동부터 교황과 로마교회의 타락상, 중세의 기독교 사상과 신학, 사회와 정치, 교육, 르네상스와 16세기 이전의 교회개혁 움직임까지를 다각도로 조명한다. 또 14~15세기의 인문주의와 로마교회의 타락과 부패상에 실망한 참된 신앙을 가진 이들이 교회내부에서 ‘근원으로’(Ad Fontes)를 외치며 신약성경이 제시한 사도교회의 원형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신앙고백교회사관’으로 선명하게 짚어낸다.
이 책은 종교개혁 직전까지 전반적인 중세에 대한 이해를 십자군전쟁이 끼친 전방위적 영향을 살펴보고 해석하며 이로 촉발된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교회적 변화를 짚은 책이다. 신학도들에게 유익한 동시에 일반성도들을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교황 중심의 로마교회의 강화와 함께 당시 교회가 드러낸 문제에 대해 비판하며 저항했던 왈도파를 비롯한 탁발수도사들의 등장에 주목한다.
스콜라주의와 스콜라신학의 발전이 교황과 로마교회의 강화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 사변적 성격의 신학이 오히려 일반대중들과 비평적 지식인들로 하여금 교회개혁을 요구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한다. 교회를 떠난 사변적 신학의 공허함과 폐해를 비판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 도래한 종교개혁은 샘 근원, 이른바 성경과 원전에 대해 증폭된 관심과 함께 필연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교황제도, 로마교회의 개혁요구와 필요성이 극대화된 상황이 낳은 필연적 결과였다.
△ 변화의 도화선, 십자군전쟁
최 박사가 많은 의미를 부여한 십자군 전쟁은 이 책에서 역설적이게도 ‘빚좋은 개살구’로 표현된다. 교황이 자기 자리와 기득권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해석한다. 명목상 모슬렘의 공격을 받은 동로마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우스(1081~1118)의 요청으로 1095년부터 1291년까지 약 2백년 동안 지속된 십자군 전쟁은, 로마교회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고 동서방교회간 긴장 국면을 서방교회에 유리하게 정리하고자 했던 우르반 2세와 교황청, 유럽 제국의 국왕과 영주 등에 의해 촉발되었고 권력, 재물, 명예, 심지어 구원을 획득하기 위한 다양한 계층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하지만 소위 ‘성공한 성전(聖戰)’을 기획한 교황청은 자신의 의도와 달리 스스로를 몰락하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 셈이 됐다. 그러나 중세사회는 전쟁의 결과로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먼저 중세 전반에 걸쳐 짙게 드리운 암흑기를 벗어나는 기회가 됐고, 화폐경제의 부활, 중산층 자본가 계급의 등장, 동일 언어를 쓰는 국가의 등장과 함께 점진적으로 국가(주의) 탄생, 인문주의와 비평적 사고의 태동과 부패하고 타락한 로마교회에 대한 거부감을 자극해 16세기 종교개혁의 밑거름이 됐다.
또 십자군전쟁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를 단절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십자군전쟁을 통해 동방기독교인들을 학살하고 비잔틴라틴제국을 세워 동방교회 교인들의 서방교회에 대한 적개심과 반감을 불타오르게 했다. 또 미신적이고 우상숭배적인 성자와 성자유품숭배(서물숭배) 사상이 촉발됐다. 동시에 로마교회와 다른 신앙관을 가진 ‘이단’들이 등장했고, 무자비한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이루어졌다. 교황이 통치하는 로마교회와 유럽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 확장하려던 교황청의 의도는 오히려 중세로마교회를 갈갈이 찢어놓았다. 그리고 교황과 로마교회의 욕망에서 비롯된 그릇된 사고방식을 유럽전역에 고스란히 드러내고야 말았다.
십자군전쟁이 가져온 긍정적인 결과로는 획일적이고 주도적인 세력에 대해 비판하거나 반대할 수 없었던 시대정신에 균열이 생기도록 한 것이다. 중세의 정신세계는 폐쇄성, 배타성, 단일성과 획일성이 지배했다. 창의성과 역동성을 역겹게 여기고 고행을 선호했으며 새로운 사상, 비평적 사고, 건설적인 생각을 억압하고 배척했다. 같은 맥락에서 교황으로 대표되는 로마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중세사회를 확고하게 지배했고 이에 반기를 들거나 대적하는 세력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십자군전쟁 이후 중세 유럽사회에는 성경을 치우고 교계지상주의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세력이 된 교황에 대해, 타락한 교회와 사제들에 대해 개혁을 요구하고 성경으로 돌이킬 것을 촉구하는 교회개혁 움직임이 나타났다. 진취적 사고방식과 비평적 분위기는 대학의 설립으로 이어졌고 스콜라철학이 발달했으며 지성(知性)을 습득한 대중은 교회의 부패상을 직시하게 되었다. 자본가 계급과 상업자본의 등장은 훗날 귀족이 아닌 중산층 자본가들이 힘을 축적하고 발휘하는 사회로 이어졌고, 그리스 로마시대의 철학과 문학의 관심은 인문주의 부흥으로 나타났다.
△ 교황과 중세로마교회가 직면한 도전
십자군전쟁의 결과로 촉발된 사회적 변화는 교회의 변화로 이어졌다. 교황의 막강한 위세와 그늘아래 숨어있던 경건한 신자들을 깨어나게 했다. 화려한 교황주의와 달리 그들은 단순한 신앙생활을 추구하며 탁발(托鉢)수도생활을 했다. 최 박사는 12~13세기를 ‘탁발수도사들의 시대’로 정의한다. 프랜시스수도회, 도미니크수도회, 갈멜수도회, 어거스틴수도회 등이 탁발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교황좌를 두고 벌어지는 유혈다툼, 성직매매, 성직자들의 타락상에 환멸을 느낀 대중들은 자발적 가난과 봉사, 교육과 설교에 집중하는 탁발수도사들에게 호의를 가졌다.
또 십자군전쟁 이후 촉발된 비평적 사고는 교회 안에 잘못된 옛 권위에 도전하고 주류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집단들의 등장으로 이어졌는데, 그중 하나가 왈도파였다. 그들의 등장은 부패한 성직자그룹과 말씀이 없는 교회에 대한 평신도들의 불만의 표시였다. 그들은 제도교회 밖에서 교회로 존재했고 사도적 빈곤을 실천하며 원시 기독교의 모습을 재현하고자 한 집단이었다.
왈도파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랐고 말씀에서 떠난 로마교회의 지시에 순증하기를 거부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리옹의 왈도(혹은 피터 왈도)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그들의 두드러진 업적 중 하나는 복음서와 성경의 몇몇 책들, 교부들의 책 일부를 모국어인 불어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이는 평신도가 성경을 소지하거나 읽고 설교하는 것을 금지했던 당시 교회의 방침에 명백하게 반하는 일이었다. 신앙과 행위의 최종적 권위가 성직주의나 교계제도(敎階制度)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음을 확인하고 드러낸 것이었다. 그들은 교황제도나 로마교회를 거부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말씀이 그 모든 것보다 가장 중요하다고 이해했다.
물론 왈도파의 모든 교리와 신앙이 전적으로 옳았던 것은 아니다. 마리아를 숭배했고 화체설을 수용했다. 많은 잘못된 가르침을 따랐고 그릇된 교리를 가졌지만 그들의 신앙자세와 태도는 부패한 당시 로마교회의 그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남프랑스와 스페인, 독일,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훗날 후스파와 연합, 교류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6세기 남부 독일의 종교개혁운동과 스위스 종교개혁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세상의 부와 재물, 명예를 버렸던 왈도파는 당시 이단이었던 카타리파와 함께 무자비한 박해를 받았다.
최 박사는 여기에서 그의 해석을 덧붙인다. 그는 왈도파 신앙을 후대인 우리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신학적 주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계제도를 본질로 보는 로마교회의 시각으로 보면 왈도파는 분리주의 이단이지만, 종교개혁신학으로 보면 그 교회야말로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그리스도의 몸이자, 정통신앙을 가진 진리의 기둥과 터였다고 해설한다.
로마교회 내부에서의 개혁운동은 탁발수도회의 등장으로 나타났다. 십자군원정에서 포로된 자들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창설된 삼위일체수도회, 공동체생활과 노동봉사를 했던 롬바르디 지역의 가톨릭빈자들, 가난과 삶을 통한 전도에 힘썼던 아씨시의 프랜시스와 프랜시스수도회, 빈곤실천과 카타리파 등 이단개종을 위해 시작된 도미니크수도회, 묵상 선교 기도 신학연구에 힘쓴 갈멜수도회, 마르틴 루터가 소속되었던 어거스틴수도회 등이 있었다. 그들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구원을 얻는 길이라고 믿었고, 과거의 수도원주의와 달리 세상 속으로 나와 길거리와 교회, 대학에서 가르쳤다.
최 박사는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며 가난과 질병, 기아와 착취 속에 신음하던 중세인들을 외면했던 중세교회와 달리 그들의 수치를 가려준 이들로 탁발수도사들을 거명한다. 이어서 그는 일제에 아부하다 해방 이후 과거사 청산이나 공적 참회고백 없이 교권을 가졌으며 다시 군사독재에 빌붙었던 한국교회의 행적을 중세교회의 그것과 비교한다. 그리고 나아가 신사참배거부운동과 해방 후 한국교회재건운동, 진리운동, 참회운동을 중세 당시의 탁발수도회와 비교할 만하다고 평가한다.
△ 영적권력에 예속된 세속권력(Unam Sanctam: One Holy)
‘베드로의 대리자’를 자처하던 로마교회의 교황은 12세기 들어와 자신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선언했다. 교황청에 재정이 몰린 13세기에는 교황은 황제들의 황제로 행세했고 14세기 말에는 서방세계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제권(帝權)에 대한 교권(敎權)의 지배를 의미하는 우남상탐(Unam Sanctam, 1302)을 발표하면서 “하나의 검은 다른 하나의 검 아래 있으며, 세속권력은 영적 권력에 예속되어야 한다. 지상의 권력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면 영적권력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한다. 만약 지존적 존재의 영적권력이 잘못을 범하면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만 판단을 받아야 한다. 한 목자 아래 한 양떼가 있을 뿐이다”고 천명했다.
교황이 중세유럽세계를 장악하게 된 이유는 교황이 가지고 있다는 ‘베드로의 천국열쇠’에 대한 미신적 두려움과 존경이 가장 컸고 기근, 기아, 질병 등의 불안요소들이 영향을 주었으며 오랫동안 황제가 없던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공백도 한 몫을 했다. 교황은 정치적 불안 속에 있던 황제 권좌에 영향을 주거나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세속 정치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해갔다.
교황과 로마교회의 지지를 통해 권력의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했던 황제와 국왕들은 교황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국왕의 중혼문제, 교황의 승인 없이 신성로마제국황제로 등극할 수 없었던 독일, 캔터베리 추기경 자리를 놓고 촉발된 영국 국왕과의 힘겨루기, 모슬렘과의 전투와 통일과정에 교황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스페인, 헝가리, 포르투칼, 보헤미아, 덴마크 등도 ‘한 목자 아래 한 양떼’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야말로 광대한 영토의 교황제국이 세워졌고 교황은 황제들 위에 군림한 ‘황제 위의 황제’였다.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울 듯, 우남상탐이 발표되고 최고치에 달했던 교황의 권세는 국가주의가 강화되면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신비주의
중세의 신비주의는 플라톤의 3층 구조 사고양식에 입각해 신앙성숙과 하나님과의 연합을 추구했다. 정화(淨化), 조명(照明), 합일(合一)의 점진적 단계를 거치는 영혼 상승을 모색했다. 당시 대중들은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명상을 가장 고상한 일로 여기고 영적이고 신비한 삶을 이상으로 여겼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서 신인합일(영적결혼)의 삶을 추구했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헬라철학을 기초로 신비주의와 연관이 있거나 신비사상을 논한 바 있었다.
‘감미로운 박사’로 불리는 끌레르보의 버나드(1090~1153)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명상을 통해 수도주의 이상을 실현한 수도사 설교자였다. ‘체험하기 위해 믿는다’며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체험을 강조한 그는 인식적이고 지적인 관조적(觀照的) 묵상을 추구했다. 자신의 묵상 관조 신비경험들을 목회활동으로 연결했기에 당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교황과 황제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프랜시스수도회의 보나벤투라(1217~1274)는 하나님과 하나 됨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고, 영혼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단계들을 제시했다. 그의 신비신학은 어거스틴 전통아래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완전에 이르는 방법들, 통상적인 인식기능으로 경험할 수 없는 영적지각과 체험을 추구했다. 수도사 프랜시스의 제자였던 그는 광야의 가난한 순례자였던 스승의 길을 따랐다. 동시대의 토마스 아퀴나스가 표방한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에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없다는 이유로 추종하지 않았는데, 그에게 있어서 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의 신비를 풀거나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하는데 있었다. 그는 계시된 진리와 자연적 이성의 구분을 반대했다.
△스콜라주의
‘인간은 논리를 갖춘 이성에 의해 기독교 주요 교리들의 일부 혹은 전부를 증명할 수 있다(안셀무스)’, ‘기독교가 긍정하는 일부 진리들은 이성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고 다른 진리들도 믿음의 길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지만 이성과 무관한 진리는 하나도 없다(아퀴나스)’로 대변되는 스콜라주의는 중세후기신학의 두드러진 경향이다. 최 박사는 스콜라주의에 대해 ‘십자군의 번쩍이는 창검, 교황들의 획기적 정책, 황제들의 권력보다 더 강하고 광범위하게 지속적 영향을 끼친 것이 있는데 중세후기를 풍미한 스콜라주의였다. 용사들의 시대는 잠자던 중세인의 지성과 비평적 사고를 각성시켰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스콜라주의는 교회당부속학교 ‘스콜라’(schola)를 중심으로 발달한 중세신학으로 중세학교의 교육방법, 교수와 학습방법(질문과 답을 제시하고 다시 반대하는 대답을 열거하는 방법)을 의미하기로 하지만, 주로 조직적으로 진행된 신학 학풍이라고 정의한다.
스콜라학자들은 고전적 헬라철학과 기독교신앙의 조화를 꾀했다. 또 신앙을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논증하고자 했다. 윌리엄 오캄 등, 후기 스콜라주의자들이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진리가 있음을 주장하기 전까지는, 이성을 통해 기독교 진리를 증명할 수 있으며 이성과 양립되는 진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신학은 학문의 여왕이었고 철학은 신학의 시녀였다.
스콜라주의는 유명론(唯名論)과 실재론(實在論) 사이의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유명론은 비평적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고, 보수적 신학자들은 실재론을 지지했다. 교황권의 존재와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인간의 타락과 구원을 설명하기에는 실재론이 더 적합했기에, 교회의 중요성과 전통을 강조하던 보수신학자들은 보편성을 강조하는 실재론을 더욱 선호했다.
이 과정에서 학자들 간의 논쟁은 학문을 발전시켰을지 몰라도 상당수 대중들은 이를 싫어했다. 유명론과 실재론을 둘러싼 논쟁은 불가피하게 교회를 사변화 시키는 방향으로 흘렀고, 대중들은 신비주의나 수도원주의로 끌렸다. 이 같은 긴장 국면은 자연스럽게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인식시켰다. 스콜라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안셀무스(1033~1109)는 실재론의 대가로서 신앙이 이성보다 우선하지만 믿는 바를 합리적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아퀴나스(1225~1274)는 기독교 주요 교의를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고, 윌리엄 오캄(1285~1347)은 기독교 신앙이 전적으로 계시에 의존해 있음을 주장했다.
최 박사는 ‘만족설’로 설명되는 안셀무스의 신학적 유산인 구속론의 경우,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구원에 필요한 속상물(贖償物)로 바쳐지기 위함이며, 성육신과 대속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공의로운 속성을 만족시키면서도 사랑의 속성을 파괴하지 않으려 한 신학적 사색의 결과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우리시대 교회들까지 그의 신학적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호평한다. 반면 그가 그리스도의 죽음에만 초점을 두고 전 생애가 구속사적 의미를 지님을 간과했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수난당하심이 형벌적 대속사역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살피지 못함과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신비적 연합을 주목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감각을 지식의 출발점으로 삼는 새로운 철학을 발전시켰으며 자연과학과 자연법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철학을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와 독특한 자연신학(theologia naturalis)을 만들어냈다.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종합해 어거스틴적이지도 아리스토텔레스적이지도 않은 ‘토마스주의’(Thomism)라는 철학적 신학을 구축했다. 당시 어거스틴주의는 보수적인 성격을,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진보적 성격을 가졌다. 그는 현재도 ‘세례 받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불과하다’ 혹은 ‘가장 높은 하늘의 궁정으로부터 가장 낮은 지옥구석까지 중세의 세계관을 다 제시하는 거대한 고딕교회당 같다. 천사박사 혹은 전 교회의 박사’ 등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후대에 마르틴 루터로부터 ‘영광의 신학’으로 비판받았던 토마스의 신학은, 로마교회의 극찬과 달리 계시가 아닌 인간의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 복음의 단순성을 간과하고 교회를 사변화로 이끌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중세를 거세게 휘몰아치던 스콜라주의는 신앙과 이성 사이의 연계성을 의심한 후기 스콜라주의자들에 의해 신적 계시를 통해 알 수 있는 진리와 이성으로 밝혀진 것은 다르며 신의 존재, 전지성, 영혼불멸 등은 이성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토마스가 속한 도미니크학파와 달리 어거스틴 전통에 선 프랜시스학파는 신학은 단순하며 실천적이고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학파의 던스 스코두스와 윌리엄 오캄은 토마스주의를 반대하면서 이성의 제한성과 계시의존적 사색의 중요성과 교회개혁을 촉구했다.
오캄은 이성적 학문(철학)과 계시는 종합될 수 없으며 신의 존재와 신성은 이성이 아닌 계시로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면도날’은 신학과 철학, 신앙과 이성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단절해버렸고 철학은 교회에서 독립해 근대 학문 영역이 되었다. 이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최 박사는 종교개혁자들이 계시의존적 사색을 하게 된 것은 오캄의 이론적 기초 덕분이라고 단정한다.
△ 중세교회의 개혁운동
중세 후기 교황과 로마교회, 수도원들은 축적된 부와 권력으로 인해 타락하여 영적능력을 상실했다. 아비뇽 교황궁의 경비충당을 위해 면벌부를 팔고 교회세를 도입하며 성직매매를 일삼았다. 국가주의의 확산으로 교황의 권위가 추락했고 교황들이 난립하자 공의회운동이 벌어졌다. 이 같은 상황 속에 존 위클리프, 롤라즈, 얀 후스, 타볼파 등이 교회개혁에 앞장섰다. 교회의 제도적 교리적 개혁을 도모했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교황이나 로마교회보다 높은 권위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국가주의의 확산은 성경이 모국어로 변역되게 했고, 인쇄술의 발달로 성경이 대량으로 보급되었다. 성경중심의 교회개혁운동이 재촉되었다.
종교개혁의 새벽별로 불리는 존 위클리프(1330~1380)는 교황과 로마교회에 집중되는 대중의 혐오감을 의식하면서 교회의 본질에 대해 고민했고 어거스틴의 전통에 따라 교회는 영적이고 불가시적이며 이상적 실제라고 고백했다. 또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확신하며 교권이 세속권력을 가지는 것을 비판했다. 교황제도를 비판하고 면벌부를 배척하며 화체설을 부정하던 그를 콘스탄츠공의회(1415)는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의 유골을 파내 화형을 집행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그가 죽은 뒤 ‘가난한 설교자들(Lollards)’ 무리의 신앙과 복음설교를 통해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들은 위클리프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예정과 성경을 강조하며 모든 인간은 성경을 읽고 해석할 권한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화체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면벌부, 성상사용 등을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위클리프의 신학사상은 얀 후스(1372~1415)에 의해 보헤미아 지역에도 확산되었다. 그는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과 성직매매를 질타하고 교회개혁을 주창했다. 특히 후스가 성찬에서 당시 평신도들에게 금지된 포도주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행한 것은 큰 문제가 되었고 포도주를 담은 잔은 체코 교회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성경의 궁극적 권위에 의지해 교황의 권위에 도전했으며 면벌부를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고 비판했다. 콘스탄츠공의회에 소환된 후스는 화형을 당했다. 하지만 그의 사후 그의 영향을 받은 후스파, 타볼파, 호렙파는 성경의 권위아래 보헤미아 지역의 개혁을 추진해갔으며 훗날 모라비안형제단, 왈도파 등과 연합해 종교개혁의 아침을 준비하였다.
△ 중세교회개혁운동과 16세기 종교개혁운동
16세기 종교개혁은 유럽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주었다. 중대한 역사적 사건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발발하는데, 최 박사는 ‘신앙과 행위의 최종적인 권위가 어디에 있는가’에 주목한다. 그는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이란 원리를 바탕으로 전개되었다고 해석한다.
12세기의 왈도파는 교황보다 성경의 권위를 중시했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단순한 삶을 살았다. 위클리프, 롤라즈, 후스, 후스파 등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개혁운동은 전통보다 성경의 권위를 우위에 두고 진행됐고,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았다. 신비주의, 후기 스콜라주의나 공의회운동도 직간접적으로 성경이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졌다는 인식을 확산시켰고, 곳곳에 설립된 대학들은 성경을 읽고 이해하며 시대를 해석할 비평적 힘을 길러주었다.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인문주의 정신은 원전인 성경으로 돌아갈 인식을 확산시켰으며, 인쇄술의 발달과 국가주의의 확산은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의 확산을 촉진했다. 교황과 교회의 전통이 아닌 성경의 가르침만이 신앙과 행위의 최종적 권위라는 인식의 전환이 촉발되었다.
중세후기 교회개혁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은 크게 (1) 로마교회의 가르침에 오류가 있으며 교리를 개혁해야 한다는 사실, (2) 문제의 해결책은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 (3) 성경의 가르침이 최종 권위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었다. 중세의 교회개혁운동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을 배태하게 했다. 중세교회개혁운동의 터 위에, 성경에 기초한 순수한 교회와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용감한 신자들의 신앙고백과 수고와 희생의 열매로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이 나타난 것이다.
역사신학자 최 박사는 어쩌면 본인이 이 책에서 가장 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이야기를 말미에서 털어놓는다. 기독교의 참 모습은 종종 교회 변두리의 신자들이 보존해왔다고 말한다. 주류교회보다 비주류교회 혹은 변두리신자들이 순수한 신앙을 유지해왔으며, 로마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당한 왈도파, 위클리프, 롤라즈, 타볼파, 후스파 등이 그러했다고 말하고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은 로마가톨릭교회의 변두리 신자들에 의해 촉발되고 확산되었으며, 종교개혁시대 이후에도 영국의 변두리에 있던 청교도, 독일교회 변두리의 독일고백교회에 의해서, 또 먼 훗날 일제말기 한국교회 변두리의 신사참배거부운동교회 등이 기독교 본래의 모습과 순수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에서 동일하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최 박사는 ‘하나님의 진리는 완벽한 사람이나 흠 없는 공동체에만 제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중세교회의 빛과 어둠, 진리와 비진리, 선과 악, 알곡과 가라지 모든 것들이 오늘날 교회를 위한 거울이다. 중세교회가 물려준 역사의 보고(寶庫)들은 오늘날의 교회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고 고백해야 하며 그가 부여한 사명을 어떻게 수행해나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길라잡이’이라고 결론짓는다.
3. 결론
컬러 예술작품들과 더불어 아름답게 편집된 이 책을 다시 읽으며 필자는 가슴 먹먹함을 느꼈다. 중세교회의 타락과 부패상 속에서 우리시대 한국교회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직 성경의 정신으로 서슬 퍼런 영적, 세속적 칼을 휘둘러대던 교황과 로마교회에 맞서 신앙과 교회를 지키려했던 이들의 희생과 수고와 함께, 오늘날 비겁하고 뻔뻔한 나와 우리의 모습이 비쳐졌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후예를 자부하며 지내온 우리의 현실은 박해 앞에 섰던 그들의 결연함과 단호함에 결코 비교할 수 없으며 애써 좁고 험한 진리의 길을 외면하고 합리화하는 비겁하고 천박함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변두리보다 중심의 화려함과 번영을 좋아하며 고난과 박해보다 안락과 풍요를 즐긴다.
우리가 상속받은 신앙고백과 신학, 교회는 안락과 풍요가 아니라 피 흘림과 고문, 능욕과 내어쫓김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주어졌다. 우리는 과거 믿음의 용사들의 모습과 초라하고 추한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며 아파해야만 한다. 우리의 부족과 죄상을 보며 통회해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최 박사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는 완벽하고 흠 없는 공동체에 제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흠 많은 우리에게도 주권적으로 주어진다. 과거와 현재의 빛과 어두움, 진리와 비진리, 알곡과 가라지들 등 모든 것은 하나의 거울과 교훈으로서 우리시대와 다음세대의 교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됨’을 기억하며 위로와 새 힘을 얻을 수 있다. 거꾸러져 넘어진 자만이 다시 일어설 수 있으며, 통회의 눈물의 밤을 지낸 자만이 벅찬 소망의 새벽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재호 (기독교언론인, 전 뉴스앤조이 기자,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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