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이제는
이~곳에 더 이상 올 수가 없어 ~~~요 "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진다. 목이 메여 차마 더 말을 할 수가 없다. 갑작스레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으며 쏘나기가 세차게 후려치며 내리고 있다. 우산은 손에 들었으나 그냥 비를 맞고 있다. " 아버지 ! 아버지! 맏아들을 용서 하세요, 안녕히 ~~~ " 계속 북받쳐 오르는 서러움과 아쉬움과 죄송스러움이 발길을 붙들고 있다. 파헤쳐져 어지럽힌 아버지의 묘소를 떠날 수가 없다. 수 많은 사람들이 운명을 달리하고 잠들어 있는 망우리 묘소이다. 1967년 5월 18일 밤에 이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1908년 3월27일(음)에 태여나셨으니 환갑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봉분을 파헤치니 시신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미생물에 분해되어 시신을 감싸주던 관(棺)도 거의 흡수된 상태이다. 흙은 찰흙으로 상당히 좋은 곳이다. 관을 여기저기 나무뿌리가 얽히고 설켜있어 아직 남아 있는 백골을 조심스레 수습한다. 53년을 이곳에 홀로 잠들어 계시던 이곳을 오늘 2020년 6월2일(화)에야 떠나야 하는 날이다. 1906년 12월15일(음)에 태여나서 1979년 2월 25일 한많은 세상을 떠난 당신의 아내이자 나의 어머니와 상봉하는 재회의 날이다. " 이 분은 올해 돌아가실 분인데 신수는 볼 필요가 없습니다 " 어머니의 생년월일을 말하는 순간 점쟁이의 한 마디가 튀여 나온다. " 아니, 그게 아니고 아버지와 합장(合葬)할 날자를 알려고 왔는 ~~~ " " 절대로 두분은 같이 모시면 안됩니다, 살아 생존에 외롭게 사시던 분이라 ― ― ― " 이런 어처구니 없는 미신의 한 마디로 41년간이나 생이별이 아닌 사결별(死結別)의 시작이었다. 오늘에야 용인공원묘원에 계신 어머니와 아버지의 재혼아닌 재상봉(再相逢)의 날이다. 십대의 청소년소녀의 어린 나이었으리라.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부모님의 권유아닌 반(半) 강요(强要)로 맺어진 혼인이 아닐까.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시집살이에 어린 어머니의 꽃잎은 펴보지도 못하고 짓밟힌 세월일 터이다. 아들도 못 낳는 며느리를 옛부터 내려오는 남존여비(男尊女卑)의 희생물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애기를 그리 많이 낳고도 며칠도 안되어 길고 긴 사레 논밭에서 길쌈을 매며 허둥되던 오마니가 가슴을 메이게 한다. 젖을 달라고 매달리는 어린 딸들을 눈물로 뿌리치는 아련한 그림도 선명하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산후조리는 커녕 식구 인원대로 제대로 쌀도 내어주지 아니하는 내 할머니가 얼마나 야속하였으며 배를 주려야 하는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부엌바닥에 주저앉아 냉수로 배고픔을 달래야 하는 오마니이다. 굶주림을 참고 견디기에 한계에 다달은 어느날이다. 도끼로 광(창고)의 문을 부수고 듬쁙 쌀을 담아 나온다. 어처구니 없는 며느리의 미친(?) 행동에 시어머니는 싸늘한 시선을 보낼뿐이다. 끝내는 이북에 있는 장수산을 찾는다. 부처님께 정한수 한 그릇을 받쳐 놓고 밤낮으로 눈물로 빌고 빌었으리라. "부처님이시여! 제발 아들 하나만 낳게 해주십시요 " 식음을 전폐하다 싶이 눈물이 피눈물 되도록 목놓아 부르짖었을 오마니이다. 끝없는 처절한 몸부림이 아직도 이놈의 아들 가슴속에는 강물이 되어 넘쳐흐른다. 하늘마저 감동한 것이련가. 연달아 금쪽같은 아들 둘이나 낳으신다. 바로 불효식 이 몸과 남동생이다. 무엇으로 오마니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리까. 바다와 같은 오마니의 사랑에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으리까. 이 몸이 한줌의 재가된들 어찌 그 애틋한 절절한 피맺힌 사랑을 알기나 하리까. 삶의 배우자인 나의 아버지는 아내인 나의 오마니를 어떻게 생각하며 행동으로 살아 왔을까. 여자는 자식을 줄줄이 낳아주는 성(性)의 도구 아니면 노예쯤으로 여긴 것은 아닌가. " 소금을 물에 끌어들이라면 끌어들여야 할 것이지 무슨 이유가 있는가 ". 가부장적인 위세와 허세의 극치의 나날이었을 테이다. 아버지 한마디이면 곧 명령이 법(法)인 것이다. 생노병사(生老病死) 태여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것은 사람이 사노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기도 하다. 핑게없는 무덤이 어디 있을까마는 내 아버지는 조금 일찍 뜨신 느낌도 있다. 항상 떠나온 고향산천을 그리며 북에 두고 오신 오마니를 못 잊어 그토록 술을 즐기신 모양이다. 어느 날 새벽에 뜰을 거닐다가 한쪽 다리에 마비가 온 것이다. " 병원에는 갈 필요가 없다." 한마디뿐으로 자식들의 의견은 관심이 없다. 신경통 관절통으로 생각하시곤 당신만의 민간요법을 고집하신다. 닭에다 지네를 잔뜩 넣고 끓여서 거기에는 막걸리는 빠질 수가 없는 필수품이다. 돼지고기도 기름기가 많은 부위를 엄청 즐기셨다. 그러는 어느 날 또 한번 쓰러지셨다. 그런대로 일년여를 지팡이에 의지한 세월이 지난다. 마지막에는 뇌출혈로 영원히 먼 길을 떠난 것이다. 지금에서 생각컨대 돼지고기 닭 지네 술 모두가 고혈압에는 상극(相剋)인 음식이렸다. 혈압 한번 측정도 병원 문턱 한번 밟아보지 못하시고 스스로 길을 재촉한 셈이 아닐까. 요즘처럼 의술이 하늘을 찌르는 세상이었으면 어떠했을까.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으셔야 된다는 대학생인 아들은 물론이고 간호사 출신인 큰 딸의 하소연도 마이동풍이었다. 오마니는 해마다 2월즈음에는 한증막(汗蒸幕)을 찾곤 하셨다. 한증막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신경통등을 치료하는 민간요법의 일종이다. 돌아가시기 며칠전에도 옥수동 작은 딸네집 근처에 있는 한증막을 다니시던 중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자기를 굽는 그런 뜨거운 토굴에서 가마니를 뒤집어 쓰고 보내는 곳이다. 대엿새 정도 그곳에서 밥도 해서 드시면서 땀을 흠뻑 배출시키는 것이다. 일천구백 삼사십년대에 아홉명의 자식들을 낳아 기르다 네명은 어린 나이에 오마니 품을 떠난다. 장티브스 천연두 학질등으로 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시절이었다. 온 몸이 불같이 뜨겁게 달구어도 고작 오줌을 체에 걸러서 먹이거나 젖을 물리기도 할뿐이다. 제대로 된 치료도 의약품도 없었던 시절이 아닌가. 그저 옆에서 시들어 가는 자녀들을 지켜볼 수 밖에 손을 쓸 수가 없다. 자녀들을 잃은 그 고통과 절망을 그 누가 알기나 하리까. 곁들여진 시집살이의 험악한 능선도 첩첩이었으니 얼마나 힘들고 버거운 삶을 온 몸으로 버텨야 했을까. 겹겹이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가 심장의 관상동맥과 뇌혈관을 경색시키며 막힌 것이리라.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털어내기 위하여 한증막을 찾은 이유일 것이다. 엄청 많은 땀을 흘리며 탈수상태에 이루기도 했으리라. 작은 딸네 집에서 탈수 탈진된 불편한 몸으로 잠자리에 드신다. 그 날 밤이 전생의 고통을 끊어 버리는 순간이렸다. 잘 있으라는 말 한 마디 없이 눈을 감은 것이다. 자식들에게 조그마한 걱정도 피하기 위함이 아닐까. 운명은 스스로의 행동과 마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리라. 내 오마니는 별로 말이 없으신 분이다. 자식들에게 싫은 소리는 물론이며 야단은 커녕 큰 소리 한번도 들어보지를 못했다. 오롯이 년하(年下)인 남편의 거칠은 말투로 명령(?)에 순종할뿐이다.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며느리의 여인상이다. 손녀에게는 덤덤히 대하면서 손자에게는 문틀에 창호지를 찢어도 바지에 이불에도 오줌을 흘려도 그저 웃는 낮으로 대하는 것이다. 장남의 아들이자 손자 녀석이 돌이 갓 지난 어느 날로 기억한다. 세발자전거에 앉아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친손자를 바라보며 환한 함박웃음을 짖고 있는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말씀도 웃음도 별로이신 오마니가 그토록 행복한 표정은 처음이다. 세살배기 손녀는 손을 잡아 걷게하곤 오빠인 다섯살 손자는 등에 업고 다니시기도 한다. " 아이고, 할머니는 동생을 걸어가게 하고 오빠는 업고 가다니요 " 동네 아주머니들의 놀라는 반응이다. 손녀와 손자에게도 남존여비 남녀차별이 예로부터 내려온 풍습이며 전통인 셈이다. 대학 일학년 때로 기억된다. 아무 것도 없이 빈 손으로 공산주의가 싫어서 무조건 남하한 피난시절이다. 하루 세끼 된장찌개에 밥 한그릇이 아쉬운 세월이다. " 정남아, 휴학을 해야겠다. " 아버지의 나즈막하고 힘없는 한 마디이다. 1학년 2학기 등록금을 마련치 못한 형편이다. " 절대로 휴학은 안할거야," 울면서 나딩구는 철없는 자식이다." 여보, 어떻게 해서든지 등록금을 마련해 줍시다, 쟈는 하고픈 거는 하지 못하면 안되는 아이야요,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하는 게라요 " 말없이 안타깝게 지켜보시던 오마니의 하소연이 아닌가. 그날의 오마니의 한 마디가 70대 후반인 오늘도 가슴속에 앙금으로 남아 옥죄이고 있다. 다음 날 아버지는 나의 손을 잡고 고향지인의 상점으로 들어선다. 멋적은 웃음을 머금으며 연신 부탁에 부탁을 읍소를 하는 광경이었으리라. 그 순간이 없었으면 지금 이 자식 장남은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하세월에 매달렸을까. 손자가 정형외과 전문의사이며 원장인 연세한강병원 약제실의 약사로 근무를 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아버지의 영혼에는 어찌 비추이고 있을까. 오늘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장(移葬)과 화장(火葬) 합장(合葬) 봉안(奉安)의 모든 과정을 말끔하게 처리한 손자이다. 이처럼 대견한 손자의 모습을 할아버지가 보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2020년 6월2일(화) 오늘은 이곳의 아버지와 용인공원 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어머니를 합장(合葬)을 하는 날이다. 나와 아내와 아들이 아버지가 계신 망우리를 찾은 것이다. 오마니가 계신 용인공원묘지는 남동생과 작은 누나와 매형님이 분담을 하기로 하였다. 동생이 오마니 유골을 수습한 것을 사진으로 보낸다. 관과 유골은 거의 손상이 없다는 전언이다. 아버지는 유골도 많은 부분이 진토가 되어 거의 완벽한 오마니의 모습과는 많이 차이가 있다. 두분을 용인에 있는 평온의 숲의 나래원으로 향한다. 12시30분에 오마니를 먼저 화장(火葬)를 한다. 오후 3시에 아버지의 유골을 예약대로 화장(火葬)을 마쳤다 .두분 모두 도자기 유골함에 진공 상태로 봉안을 한 것이다. 유골함을 품에 안아본다. 대한민국의 선조(先祖)들이 그러하듯 아버지 오마니도 일제강점기에 태여나셨다. 인생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36년 동안을 왜놈들의 군발에 무참히 짓밟힌 죽지 못해 살아온 삶이 아닐까. 그 이후로는 어떤가.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의 발발로 남한으로 피난민 생활로 이어진 여생이다.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오롯이 자식만을 바라보며 견뎌온 고난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해외여행은 커녕 비행기 한번 태워드리지 못한 이놈의 자식이 오늘 따라 면목이 없고 한심할 따름이다.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문형산 자락에 두분을 봉안을 한다. 하루종일 햇볕을 받으며 전망이 확트인 산중턱에 모셨다. 그토록 생존에 아버지가 눈물로 찾으시던 이북 고향산천은 마음뿐으로 통일이 되는 그날이 언제나 오려는지 하늘에 맡긴다. 북한에 두고온 더 큰딸과 나의 할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그대로 영혼(靈魂)과 함께 안장(安葬)을 할 수 밖에 없다. 살아 생전에 즐기시던 술 한잔을 딸아 드린다. " 오마니! 아버지! 41년여만에 만나셨으니 살아 생전에 못 다 하신 이야기 마음껏 나누시기를 ~~~, 후손 모두가 건강하고 평안한 삶이 되도록 기원(祈願)하나이다 " 오늘 이 자리에 오마니 아버지 앞에 무릎을 끓은 후손들의 소원이기도 하리다. 큰 딸 작은 딸 작은 사위 맏아들 맏며느리 작은 아들 작은 며느리 친손주 외손주 증손주 그리고 앞으로 태여날 고손주등등 오늘 함께 못한 후손들도 한 마음일 것이다. 아버지는 서울 망우리에 오마니는 경기도 용인묘소에 41여년 동안을 외롭게 따로 따로 홀로 계셨다. 불효 자식들을 얼마나 원망을 하셨을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그저 미안하고 죄송스러울뿐이다. 부모님 영전에서 모두 다 환한 모습으로 인사를 올린다. " 여보 !, 어디 갔다가 이제 오신겁네까 " " 아니, 님자야말로 무엇 하다가 지금에야 나타난 것이야요 " 두분의 밝은 이야기가 계속 흘러 나오고 있다. " 오마니! 아버지 ! 사랑합니다 ! 안녕히 계세요 ! " 돌아서는 발걸음이 이다지도 가벼울 줄이야.
2020년 6월 2일 불효식 맏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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