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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신을 섬으로 해야 하는가?
다시 절구커피로 돌아 왔다. 몇 주 분쇄된 것으로 만들어 마셨으나 다시 절구질 하기 시작했다.
절구용 원두콩을 더 이상 동서식품 대리점에서 팔지 않는다. 지난 수년 동안 거의 십년 가까이 절구질 해 가며 원두커피를 마셨는데 더 이상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찾는 사람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원두콩은 노브랜드에서 구입한 것이다. 이마트 안양점 4층에 가면 노브랜드 매장이 있는데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 절구질해서 마셔보니 동서식품대리점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
추운 날씨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 모니터에는 ‘추운날씨’라고 써 있다. 스마트폰 첫 화면에 날씨를 보니 영하 2도이다.
발 밑에는 전기히터가 있다. 마치 장작불 난로를 가까이 하는 것처럼 따뜻하다. 겨울에 발만 따뜻하면 모든 것이 따뜻한 것처럼 보인다. 여름에는 코가 차가워야 한다. 얼굴만 시원하며 다 시원한 것처럼 보인다.
절구커피 한잔에 여유를 갖는다. 계란과 고구마와 샌드위치로 아침식사를 마친 다음에 여유를 마신다. 향으로도 마시고 맛으로도 마신다. 무엇보다 여유를 마신다. 쭈구리고 앉아 절구질해서 만든 절구커피를 마신다.
어제 손님이 왔었다. 오겠다고 미리 예고 했었다. 니까야공부모임에 나오는 사람이다. 수많은 인연이 있지만 이렇게 백권당에 찾아 오겠다고 하는 사람은 드물다.
백권당은 17년되었다. 2007년 말에 입주한 이래 찾아 온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일년에 너댓명 되는 것 같다. 작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그것은 북콘서트라는 ‘만용’을 부렸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손님 맞을 준비는 되어 있다. 손님이 오면 앉을 수 있도록 탁자가 마련되어 있다. 이른바 회의용 테이블이다. 의자가 네 개 있는 것이다.
손님 올 것을 생각해서 차기(茶器)도 갖추어 놓았다. 그렇다고 비싼 것은 아니다. 이는 ‘아름다운 가게’나 ‘굿윌스토어’와 같은 재활용품 가게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으면 사 놓은 것이다.
차기가 있으면 차(茶)도 있어야 할 것이다. 돈 주고 산 것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수많은 종류의 차는 대부분 선물 받은 것이다. 특히 보이차는 너무 많다. 평생 먹어도 다 먹지 못할 것 같다.
손님 올 것을 생각해서 가구도 배치해 놓았다. 무엇보다 신경 쓴 것은 책장이다. 테이블 옆에 책장이 별도로 있는데 백권 이상의 책이 있다. 직접 만든 책이다. 블로그에 썼던 글을 시기별로 또는 카테고리별로 묶어서 만든 것이다.
백권당에서 가장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책이다. 내가 직접 만든 백권의 책이다. 현재 111권 진열되어 있다. 지금까지 120권까지 pdf로 만들었는데 추가로 인쇄와 제본하려 한다.
흔히 집자랑한다고 말한다. TV에서도 집자랑하는 프로를 볼 수 있다. 마치 별장처럼 잘 지은 집을 이곳저곳 소개하는 프로를 말한다. 그런데 백권당에는 자랑할만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고작 열평가량 되는 임대사무실에 보여 줄 것이 무엇이 있을까?
백권당은 일터겸 서재겸 명상공간이다. 처음에는 일하는 사무실이었으나 글을 씀에 따라 서재가 되기도 한다. 요즘에는 명상공간을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수행처가 되기도 한다.
백권당에서 자신 있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백권의 책이다. 실제로는 그 이상이 된다. 또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업무 다이어리이다. 이는 직장생활 할 때 업무노트를 말한다.
업무노트는 1987부터 작성된 것이다.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 또한 강연노트도 있다. 강연이나 강의, 공부모임, 법회 등에 참가하여 노트한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업무노트와 강연노트를 합하여 100권이 넘는다. 이것도 보여 줄 것에 해당된다.
백권당에 보여 줄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셋톱박스(Settopbox)이다. 직장생활 했을 때 개발했던 전자제품이다. 마치 삶의 훈장처럼 보관하고 있다. 직장생활 20년에 대한 삶의 결실과도 같은 것이다.
언제든지 손님 맞을 준비는 되어 있다. 오기만 하면 절구커피와 차를 대접할 것이다. 또한 백권의 책과 백권의 노트, 그리고 셋톱박스를 보여 주려한다. “나는 이렇게 살았노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삶의 결실에 대한 것이다.
니까야 공부모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간다. 대부분 한두번에 그친다. 꾸준히 나오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오면 ‘오는가 보다’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어제 백권당에 온 K선생이 그렇다.
묘한 징크스가 있다. 바쁠 때 손님이 오는 것이다. 어제도 그랬다. 일감 주문이 있어서 주말작업을 하고 월요일 오전에는 마무리 작업했다. 손님은 12시에 오기로 되어 있다.
월요일 오전 백권당에 오자마자 속도전을 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일감을 마무리 했다. 그리고 파일을 메일로 발송했다. 손님 오기 전에 마친 것이다.
두 시간이 시간이 남았다. 글 하나 나올 충분한 시간이다. 주제는 정해져 있다. 아침에 미리 생각해 놓은 것이다. 두 시간 동안 자판을 신나게 두들겼다. 손님 오기 오분 전에 마쳤다.
손님이 왔다. 니까야모임에서 한번 보았기 때문에 구면이다. K선생은 왜 먼 길을 찾아 왔을까? 이것저것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아직까지 한번도 강단에 서 본적이 없다. 아직까지 사람들 앞에서 법에 대하여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정평법회에서 법문하라고 하면 도망다닌다. 쓰는 것은 자신 있지만 말은 못하는 것이다.
손님은 점심 때 왔다. 절구커피를 대접하며 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심식사를 해야 했다. 명학역 중심상권에 있는 갈비탕 집에서 식사를 했다. 돈은 내가 지불했다. 멀리서 찾아 왔는데 당연히 접대해야 한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차담을 했다. 차기와 차는 갖추어져 있으므로 문제가 없다. 커피를 마시면 리필이 안되기 때문에 다 마시면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차는 끊임없이 리필이 되기 때문에 대화를 끊임 없이 이어나갈 수 있다. 커피를 마시면서 삼십분 이야기할 것을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하면 세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다.
K선생과 거의 세 시간 이야기했다. 차담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본다. 그러나 무엇보다 K선생의 태도이다. 무엇인가 배우려는 진지한 자세를 본 것이다.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고 특히 초기불교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궁금한 것을 물어 보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다.
사람을 만나서 토론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늘 혼자서 지낸다. 공부모임에 가면 듣고 노트하고 노트한 것을 바탕으로 글을 쓴다. 이렇게 늘 혼자 지내다 보니 사람들하고 이야기하거나 토론할 기회가 거의 없다.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모임에서 어떤 사람을 비판했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이다. 글로서 작심하고 비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존심이 몹시 상했던 것 같다. 비판을 업으로 삼고 있는 지식인이 자신을 비판한 것에 대하여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지식인은 토론하자고 했다. 그러나 한번도 맞짱토론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침묵했다. 토론의 달인과 토론하면 백전백패가 될 것은 뻔한 일이다. 어쩌면 비겁하게 도망 다닌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찾아 와서 이것저것 물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자칫 잘못하면 ‘자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가능하면 묻는 것에만 답해야 한다. 상대방을 배려 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내가 많은 것을 알기 때문에 가르쳐 주려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K선생은 정신과 물질은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말했다. 반야심경에서 공즉시색과 색즉시공을 예로 들어서 말한 것이다. 또한 양자역학을 예로 들어서도 말했다.
K선생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난감했다. 잘못 이야기하면 오해할 수 있다. 조심스럽게 “정신과 물질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크게 놀라는 것 같았다. 이제까지 자신이 믿고 있던 신념체계가 무너지는 듯 했다.
흔히 대승에서는 정신과 물질을 하나라고 말한다. 이를 색즉시공과 공즉시색의 논리로 설명한다. 여기에 양자역학까지 동원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정신과 물질은 하나라는 말은 니까야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16단계 지혜가 있다. 가장 첫 단계 지혜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nāmarūpa pariccheda ñāna)’이다. 정신과 물질은 같은 것이 아님을 말한다. 정신은 정신이고 물질은 물질인 것이다.
좌선을 할 때 마하시 방식에서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긴다. 배가 부푸는 것은 물질적 현상에 대한 것이다. 배가 부푼 것을 아는 것은 정신적 현상에 대한 것이다. 행선을 할 때 발을 드는 것은 물질적 현상에 대한 것이다. 발을 드는 것을 아는 것은 정신적 현상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 몸과 마음은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1단계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아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과 물질이 구분되어 있는 것을 아는 것에 대하여 ‘지혜’라고 한다. 이는 다름아닌 불교적 지혜이자 보편적 지혜에 해당된다.
물질과 정신은 같은 것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오온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오온은 하나가 아니라 다섯 개의 다발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가 생겨나면 그 다음 단계는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paccaya pariggha ñāna)’이다. 이를 원인과 결과에 대한 지혜라고도 한다.
위빠사나 초보수행자들은 1단계와 2단계 지혜를 익혀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이는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과 같다. 왜 그런가? 자아를 버리기 위한 것이다. 개념을 버리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가 왜 중요한가? 이는 자아개념을 부수기 위한 것이다. 좌선을 해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거나, 행선을 해서 발의 움직임을 새겼을 때 오로지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만 있는 것을 알았을 때 나, 남자, 여자, 사람, 중생 등 언어적으로 형성된 개념이 타파된다.
1단계 지혜는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나’라는 것은 없게 만든다. 있다면 언어적으로 형성된 나라는 개념이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남자라는 개념, 여자라는 개념, 중생이라는 개념 등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는 왜 중요한가? 이는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대한 것이다. 어떤 것이든지 인과의 지배하에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인 인과에다 조건을 하나 더 넣았다. 그래서 원인과 조건과 결과를 말했다. 그래서 위빠사나 2단계 지혜는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가 된다.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가 생겨나면 어떤 일이 생겨날까? 숙명론, 신의론, 우연론과 같은 견해가 부수어진다. 이는 원인 없이 결과가 일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또한 업보를 부정하는 견해가 삿된 견해임을 알게된다. 원인도 결과도 없이 우연히 발생하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업과 업의 과보만 있게 됨을 알게 된다.
K선생은 불교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말을 들어보니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초기불교를 접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대승의 논리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공(空)의 논리에 대한 것이다.
공의 논리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공즉시색”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 이야기한다면 반쪽짜리 불교가 되어 버린다. 왜 그런가? 역부여시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오온에는 색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 상, 행, 식도 있기 때문이다.
흔히 불교를 과학과 접목하여 설명하려 하는 사람이 있다. 색즉시공공즉시색과 양자론을 결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은 어디까지나 물질적 탐구에 대한 것은 아니다. 정신적 영역은 아닌 것이다. 물론 미시적인 양자론에서는 정신적 영역에 대한 것도 있지만 물질적 탐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색즉시공이 있다면 ‘수즉시공’도 있다. 당연히 ‘상즉시공’도 있고 ‘행즉시공’, ‘식즉시공’도 있다. 물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영역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로지 색즉시공 하나만으로 공을 설명하려 하거나 더 나아가 물질과 정신이 하나이다라고 말한다면 어긋난다. 나머지 수, 상, 행, 식 즉 정신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을 때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고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이 된다.
K선생과 차를 마시면서 법에 대하여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K선생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알려 주었을 때 미안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잘 받아 들이는 것 같았다.
K선생과 이야기하다 보니 ‘자등명법등명’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K선생은 ‘자주법주(自洲法洲)’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을 섬으로 삼는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을 어떻게 섬으로 삼을 수 있을까? 자신을 등불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자신을 섬으로 삼는다는 말은 좀처럼 이해가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섬이기 때문에 자신을 섬으로 삼는다고 말해 주었다.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하자 성자의 흐름에 들면 자신에게 의지하게 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자신을 섬으로 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해 주었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과 같다. 왜 그런가? 성자의 흐름에 들면 악처에 떨어질 염려가 없다. 이는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섬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흔히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다. K선생과 자주법주에 대하여 이야기하다 보니 생각이 정리되었다. 그 동안 수많은 글을 써왔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된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악처에 떨어질 염려가 없으므로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섬에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지혜로운 님은 거센 흐름에 난파되지 않는 섬을 만들어야 하리.”(Dhp25)라고 했다. 자신을 섬으로 삼거나 자신을 등불로 삼는 것이다.
결국 의지해야 할 것은 자기자신뿐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었을 때 자신에게 의지하게 된단. 자신을 섬으로 하여, 자신을 등불로 하여 완전한 열반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도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이고 자신이 자신의 안내자이다.” (Dhp.380)라고 했다.
K선생과 이야기한 것을 글로 표현하려 하니 글이 한없이 길어진다. 말로서 몇 시간 이야기한 것을 글로서 표현하려 한다면 대단한 에너지가 소요된다.
K선생과 거의 세 시간 있었다. K선생은 일어서려 할 때 선물을 하나 주었다. 휴대용 가습기이다. 고맙기는 하지만 그다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남의 집에 갈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선물하는 것은 예의일 것이다. 그래서 작은 선물이라도 하는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먹을 것이 가장 무난한 것 같다.
어떤 이는 자신의 책을 선물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 읽어 본다는 보장이 없다. 가장 이상적인 선물은 아마도 ‘손카드’가 아닐까 생각한다. 돈도 들지 않는다. 그대신 정성이 담겨 있다.
글을 쓰면서 여러 선물을 받았다. 먹을 것도 있고 기념품도 있고 심지어 봉투도 있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손카드이다.
책상 뒤에 책장이 있다. 회전의자를 돌리기만 하면 경전을 꺼낼 수 있게 해 놓았다. 책장 위에는 손카드가 두 개 있다.
먹을 것은 먹을 때 뿐이다. 봉투에 있는 돈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사연이 있는 손카드는 남아 있다.
어느 노작가는 ‘손편지’를 공개했다. 연말 끝자락 날에 아내로부터 받은 것이다. 손으로 쓴 편지를 보니 사랑과 존경이 가득하다. 그 어떤 값진 선물보다 나을 것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앞으로 방문할 일이 있을 때 손카드를 작성하는 것이다. 직접 손으로 써서 전달하는 것이다. 이렇게 했을 때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3월이 되면 처와 아들 생일날이 있다. 처는 음력으로 하고 아들은 양력으로 하기 때문에 겹친다. 그래서 한날에 치룬다. 올해 처음으로 손카드를 작성하고자 한다.
영화 버킷리스트를 보면 두 시한부 암환자가 나누는 대화가 있다. 흑인 남자는 백인 남자에게 “일생을 살면서 남을 감동하게 한 적 있습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지난 세월을 생각해 본다. 나는 남을 감동케 한적이 있을까? 그다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오랜세월 글을 써 오면서 댓글로 감사의 메시지를 받은 적은 있다.
방문할 때 빈손으로 가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다. 그래서 함부로 찾아 가지 않는다. 방문할 때는 먹을 것이라도 가져 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선물은 아마도 손카드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성을 들여 육필로 작성된 손카드를 받았을 때 감명받지 않을 자 어디 있을까? 이런 이유로 다이소에서 카드를 몇 장 구입해 왔다. 그리고 손카드 작성용 펜도 샀다.
방문하기 전에 글을 써야 한다. 그 사람에 대하여 쓰는 것이다. 감사의 글이 좋을 것 같다. 쓸 것이 없으면 경전에 있는 문구라도 하는 써 놓으면 될 것 같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되었다. 손카드는 금전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이고 무엇보다 사람을 감동하게 한다는 것이다. 생일 때나 방문할 때 시도해 보고자 한다. 손편지와 손카드는 최상의 선물이다.
2024-01-3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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