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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6:30-56 무엇을 남길까
사람이 세상에 태어 났다가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남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산에 가면 바위에다 자기 이름을 적어 놓기도 합니다.
그리고 큰 부자가 되어서 무엇인가 공적비를 세우기를 원하고
또 위대한 정치가가 되어서 무엇인가를 남겨 놓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권불십년 이라고 얼마가지 못하면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잊혀버립니다.
예술은 조금 더 오래갑니다.
추사 김정희의 그림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값이 많이 나가고
또 로뎅의 조각품도 귀한 작품이 되어서 상당히 오래 갑니다.
또 베토벤의 교향곡도 마찬가지고 톨스톨이의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들은 또 한참 갑니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의 육신이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보는 동안 밖에 가지 못합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남겨 놓아야 되는 것은
산에 이름을 써 놓는다든가 세상에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무엇인가 남겨져야 됩니다.
그래야 그것이 영원히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거든요.
또 다른 세상을 또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주님 앞에 서면 안 되고 무엇인가
주님이 기억할 만한 것을 남겨서 인정해 주는 사람은 진정한 성공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본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데 저녁때가 되어 무엇을 먹을 것이 없어서
동네에 가서 사 먹고 오게 하면 좋겠다는 제자의 말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전부 앉히라고 그러셔서 오십 명씩 백 명씩 이렇게 앉혔는데
거기에 앉은 사람에게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를 가지고 하늘에 축사하시고
떼어서 다 앉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줬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전부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바다 건너로 가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바다를 건너 가는데 바람이 거슬려서
에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물 위로 걸어 오셨습니다.
그럴 때 제자들은 우리 주님인줄 모르고 유령인가 생각해서 소리를 질을 때
예수님께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하지 말라 하시고
배 위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쳤습니다. 그리고 배가 육지에 닿았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려 왔는데
손을 대는 사람들마다 병을 다 고쳤다고 하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떡 먹는 것도 얻었고 또 풍랑 속에서 건짐도 받았고 병도 고쳤습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서 그냥 지나가 버리면 안 된다고는 것입니다.
먹고 배부른 것에서 끝나 버리고 풍랑에서 건짐받은 것에서 끝나 버리고
병 고침에서 끝나 버리면 예수님에게서 얻어 것이 다 헛되게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다 자기 육신적인 문제 해결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표적을 베풀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것을 무엇인가 얻어서 에수님을 알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하려고
이렇게 떡도 먹이시고 또 바다 위에 풍랑이 일 때도 건져 주시고
그 다음에 병도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날마다 신앙생활을 하매 있어서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남길 때 그 사람은 진정한 가치 있는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무엇인가 이 땅에 왔다 간 흔적이 있어야 되고
우리 주님의 가슴에 무엇인가 남기는 것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높은 지위를 얻고 많은 것을 가지고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그 사람이 죽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므로
그런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인가 다른 사람의 가슴에도 흔적이 있고
주님에 가슴에도 흔적이 있어서 주님이 표적으로 말씀하시는 이 속에서
주님을 깊이 깨달고 남겨 놓은 것이 있는 것이
정말로 귀한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오늘 본문에서 알아 보겠습니다.
먼저 4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무엇을 남길 것인가
첫 번째는 필요를 채워 주시므로 영적 충만함을 남겨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빈들에서 저녁이 되어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에게 제자들이 무엇인가를 먹게 하려고
우리가 가서 200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일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여기 데나리온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의 품삯 정도의 가치의 단위를 말합니다.
우리가 현재 하루에 약 5-6만원을 받는다고 하면
하루에 일 데나리온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200을 곱하면 상당히 큰 돈이 될 것입니다.
그것으로 사 먹일려고 할 때에
주님은 너희에게 떡이 몇 개가 있느냐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알아보고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먹으려고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주님이 제자들을 명해서
앉히라고 하셔서 백 명, 오십 명씩 앉혔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주님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다 배 불리 먹고 열 두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떡을 먹었던 사람이 5,000명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이 사람들은 주님이 축사 하시고 준 것 만을 가지고
떡이 배 고픈데 맛있습니다 라고만 끝나 버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여기에서 오 천 명에게 표적을 행한 이유는
내가 생명의 떡이다. 그러니까 나를 얻어라.
영적으로 충만해 져라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떡만 먹기를 원했지
진정으로 영적으로 주님을 얻어 깨닫고 만나고
영적으로 충만해 진 것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절대 그러면 안 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육신적으로 풍성해 지는 것으로 끝나 버리면 그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야기 할 때
그 보이는 것 속에 안보이는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떡을 먹여 주실 때 그 떡이 예수님인 줄 알고
그 떡을 먹고 주님을 깨달고 이해해서 영적으로 충만한 것이 우리에게 남아야지
그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도 육적인 만족으로 가지 말고
영적으로 충만한 것이 남겨져서 주님 앞에 인정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싶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이 이렇게 필요를 채워 주시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여 영적으로 충만한 것들을 남겼듯이
우리도 필요를 채워 주시므로 영적 충만함을 남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이라고 하는 사람은 다니엘서 1장을 보면
뜻을 정한 신앙으로 열흘 동안 시간을 주라고 하고
진미를 먹지 않고 채식을 먹고 진미를 먹은 사람들보다
다니엘과 친구들의 얼굴을 비교해 보아서 채식을 먹었던
뜻을 정한 신앙이 이겼습니다. 얼굴이 훨씬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영적으로 충만해 짐으로
다니엘은 2장에서 느부갓네살이 어떤 내용인지도 꿈도 말도 안 해 주고
해석만 하라고 하면서 해석을 못하자 박수들을 죽이려고 할 때에
다니엘이 왕의 시위대장 아리옥에게
왜 그리 급하뇨 기한을 주면 내가 해석을 주겠다고 해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꾼 꿈인 신상에 대해서 해석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역사가 앞으로 진행될 것에 대해서 다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다니엘은 영적으로 충만해서 지혜를 얻어 귀한 것을 남겼듯이
우리도 마찬가지로 다니엘과 같이 하나님 가슴에 무엇인가
영적 충만한 어떤 것들을 남겨서 보여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마가복음 6장 48절 49절을 보겠습니다.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무엇을 남길 것인가
두 번째는 표적을 보여 주시므로 믿음의 고백을 남겨야 합니다.
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바다 건너 벳새다에 건저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작별하신 후에 예수님은 기도하려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바다 가운데 가는데 바람이 불어서 힘들게 노를 젖는 모습을
보시고 밤 사경쯤 되어 그것을 해결해 주시려고
바다 위로 걸어서 오시는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주님인 것을 모르고 유령인가 싶어서 소리를 질렸습니다.
그때 주님이 안심 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고 배에 올랐습니다.
그랬더니 바람이 그쳤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심히 놀랐다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바다위로 걸어 오시는 표적을 보여 주실 때는
다 뜻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믿음이 없기에 주님을 오해하고 두려워 떠는 모습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믿음을 고백하라고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바다를 건너 가라고 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라고 하신
그 길 속에도 풍랑이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도 기억해야 됩니다.
그것을 해결하려고 오신 주님을 제자들은 유령으로 생각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믿음의 고백을 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바다 위로 우리 주님이 걸어 오신 것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표적을 보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믿음의 고백을 들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믿음을 더 성장 시켜 주시려고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표적을 보여 주시므로 제자들은 믿음의 고백을 남기지 못했는데
우리는 우리에게 이런 바다의 풍랑 같은 여러 가지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도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하는 그 일 속에도
풍랑이 있다란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우리도 주님이 하시라고 하신 그 일 속에서
우리가 두려워 할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의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시니까 이렇게 다 해결되는 군요.
그래요. 나는 주님으로 살겠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해결자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음의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두려워 떠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다 해결하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주님으로 충분합니다.
이 어려운 문제를 주님이 다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표적을 보여 주시므로
믿음의 고백을 남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욥기 5장 8절 9절을 보겠습니다.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이렇게 엘리바스가 욥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바스는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측량하실 수도 없는 일도 행하시고 귀한 셀 수 없는 일도 행하신다고
엘리바스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우리도 하나님께 구하고 의탁하고
하나님은 측량하실 수 없는 일도 행하신다고
이렇게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못만났는데 다른 제자들은 다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도마는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문을 열지 않고 방 한 가운데 들어 오셔서
숨을 몰아 쉬시면서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옆구리를 만져보라는 것입니다.
옆구리는 어떻습니까? 창 맞은 자리입니다.
옆구리가 뚫렸습니다. 그곳을 도마가 만졌습니다.
그랬더니 창자국이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가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도마는 믿음의 고백을 한 그 이후부터
자기가 믿지 못한 것 때문에 많이 회개하고 인도까지도 가서
계속해서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다는 말만 하다가 일생을 다 마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다 라고 하는 것이 도마의 레파토리였다고 합니다.
도마는 쿡 찌려면 그 입에서 무엇만 나오느냐 하면은
예수님은 부활하셨네! 라고 합니다.
우리는 쿡 찌려면 우리에게서는 무엇이 나오겠어요?
아야 라고 나오겠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의 고백이 나와야 됩니다.
도마는 죽창을 쿡 찔러도 뭐라고 했어요? 예수님은 부활하셨네!
죽창을 찌려면 얼마나 아프겠어요.
죽어도 예수님은 부활하셨네 라고 했어요.
우리도 도마와 같이 믿음의 고백을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55절 56절입니다.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무엇을 남길 것인가
세 번째는 치유해 주시므로 감사의 표현을 남겨야 됩니다.
53절에 보면 이제는 바다를 건너서 풍랑이 있는 바다에 걸어 오시다가
제자들이 유령인가 하는 그런 말을 듣고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하지 말라 하고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게네사렛 땅에 갔습니다. 그래서 배에서 예수님이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고 온 지방에 소문이 다 펴졌습니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려고 병든 자를 침상에 메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옷이라도 만져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손을 대는 자는 다 낳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육적인 병만을 고쳐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병을 고치는 것은
육적인 병을 고쳐 주면서 예수님은 깨닫고
예수님에 의해서 영적인 병을 고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었어요.
다 나았어요. 그러면 할렐루야 병 고쳐서 감사합니다.
이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육신의 병을 고쳤는데 그 고친 사람 죽을까요? 안 죽을까요?
병고친 그 사람 몇 십 년 후에 죽어요.
죽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병 고치는 것이 끝이 되면 그것은 큰일 납니다.
병을 고친 사람도 죽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치는 것이 끝이 아니라
그 치유해 주심에 대해서 감사의 표현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것이 남겨져야지
그런 것이 남지 않고 할렐루야 병이 나았으니까
치료받았네! 치료받았네! 그 치유 받았네로 끝나 버리면 안 된다는 거죠.
치유받은 것만 좋아하면 안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치유해 주시므로 감사의 표현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께서는 영적인 병을 치유하시길 원하세요.
중풍병자는 어떻게 걸을까요? 절뚝 절뚝 그렇게 걷겠지요?
이것이 무엇이냐? 좋은 때는 잘 걷지만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잘 못 걷는지요
영적 중풍병자입니다.
영적 문둥병은 아무리 말을 해도 감각이 없어요.
아무리 말을 해도 알아 듣지 못해요.
주님께서 영적인 병을 고치기를 원하는 것이지
육신의 병만을 고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되요.
그래서 우리는 육적인 병을 치유해 주심에 감사의 표현으로
우리가 영적으로 변화가 되고 영적으로 치유되어서
하나님이 원하는 순종과 충성과 봉사하는 것이 남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으니
우리도 주님에게 감사의 표현을 남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50편 23절을 보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감사 표현을 헌신하고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을 남기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만이라고 하는 사람은 수리아의 장군이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사 앞에 와서 병을 나아주기를 원했지만
엘리사는 가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말 밖에는 하질 않습니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 안 갈려고 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더니
그대로 어린 아이의 살 같이 나아만 장군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가져온 많은 예물을 엘리사에게 주려고 할 때에 엘리사는 안받았습니다.
나아만은 자기를 치유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왕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고국에 가면 우상을 섬길 때
내가 어찌 할 수가 없어서 그 때에 내가 옆에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해를 좀 해 주시라고 엘리사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나아만은 이 치유 때문에 누구를 만난 것입니까?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이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만나지 못한 사람은 자기 병을 고치면
보통 석 달 정도는 교회에 나옵니다. 그것이 한계입니다.
석 달 지나면 고침받은 은혜는 다 없어져 버립니다.
그리고 왜 교회에 안 나오세요 그러면
나 교회에 많이 나가 주었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죽었대요.
자기가 교회를 나가줘요? 누구를 위해서 나와줘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엄청난 소리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가 편리한대로 말합니다
육적인 병을 치유해 주심에 감사만 하면 안 되고
영적인 치유에 감사해서 나 같은 것에
이렇게 관심이 많으셨군요 라고 고백하며
헌신하고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이 남겨질 때
정말로 귀한 신앙생활이 될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바위에나 어떤 비석에 이름을 남기는 것
그것은 다 쓸대 없는 일입니다.
자기가 공적비 세우는 것은 다 쓸데 없는 일입니다.
좋은 옷도 좋은 집도 좋은 자동차도 나중에 가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 주님의 가슴에 찡하게 남아야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남겨야 할까요
첫 번째는 주님이 필요를 채워 주시므로
영적으로 내가 성장을 해서 충만해 지는 것을 남겨야 됩니다.
두 번째는 주님이 표적을 보여 주시므로 믿음의 고백을 남겨야 됩니다.
세 번째는 치유해 주시므로 하나님을 만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충성해서
감사의 표현이 남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