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時代에 맞춰 개편한 文字學 사전. 新字典
한의학 입문에 있어서 선결요건이자 필수 과정이라 할 한자 학습에 반드시 구비해야할 한자자전 1종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이 사전은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인의 민족 계몽과 전통문화 보급을 목적으로 최남선이 앞장서 설립한 朝鮮光文會에서 1915년에 편찬한 본격적인 전문 자학사전이다. 新文館에서 발행하였으며, 종래에 사용해 오던 전통방식의 玉篇을 신시대에 맞게 개편한 對譯辭書라 할 수 있다.
규모를 살펴보면, 전서는 4권 1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246장(492면)에 달한다. 본문에는 표제자만 6000여자를 수록하였기에 방대한 작업으로 인하여 착수한 지 5년 만에야 완성하였다고 하니 대략 1910년경에 편찬 작업 일에 착수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본문의 편제가 4권으로 구분되어 있기는 하지만, 부수별로 획순에 따라 글자를 찾아가기 때문에 分卷은 다만 검색에 보조적으로 필요할 뿐이지 주제가 달라지진 않는다. 곧 이 자전의 검색목록에는 권수와 장수를 같이 병기하여 해당 글자의 면수를 표기하고 있는 것이 요즘 자전과는 다소 다른 면모이자 특징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겠다.
이것을 두고 근대적 획인자전(劃引字典, 즉 획수로 찾아볼 수 있는 자전)으로서 의미가 크다고 평하는데, 기존의 전통적인 韻書나 사서가 운자별로 분류되어 있던 것을 상기해 보면 근본적으로 검색방식이 바뀌고 사전의 효용성 또한 새롭게 변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전 편찬의 주역인 柳瑾과 崔南善의 서문을 참조하여 편찬과정을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전체 편찬작업은 유근의 주관 아래 李寅承 · 南基元의 도움을 받아 진행되었으며, 한자의 새김은 근대 한글학 연구의 1세대인 周時經과 金枓奉이 정성을 다하여 심혈을 기울였고, 인쇄에 즈음하여 자획 등을 교감하는 일들은 신문관에 근무하던 崔誠愚와 같은 이들의 힘이 컸다고 전한다.
범례(‘新字典例’)에 따르면 이 『신자전』의 기본이 된 자전은 청나라 강희제때 만들어져 당대 최고의 자서라 일컬어지는 『康熙字典』을 대본으로 하고, 내외 고금의 여러 가지 자전류들을 참작하여 새로운 시대에 맞도록 빼고 더하고 바로잡아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국내(당시 조선)의 옥편은 1800년대에 두루 성행하여 널리 쓰였던 『全韻玉篇』을 기준으로 편찬에 참고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 책의 특징은 서문과 典例에서 밝힌 대로 한자의 자획을 바로잡고, 진보적인 사전의 형식에 따라 종래에 없던 주석의 용례를 각종 經書에서 찾아 인용하였으며, 특별히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 경우에 삽화를 넣어서 다채로움을 더하였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그 무엇보다도 자전의 말미에 부록으로 첨부해 놓은 조선 俗字 · 新字를 실어놓은 점이 가장 특징적인 면모라 할 수 있다. 한편 인용은 주석을 실증하는 성격이어서, 한자의 주석 하나하나 처음부터 새로 하는 작업과 같았다고 밝히고 있어 매우 힘든 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이 자전은 牛痘法을 소개하고 한의사단체의 효시인 全鮮醫會(1915)를 이끌었던 松村 池錫永의『字典釋要』(1909)를 많이 참조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로 이 보다 앞서 『강희자전』을 근거로 『규장전운』의 자음을 따르고 俗音을 병기하는 동시에, 3국의 속자를 이미 수록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 部首 배열에 따르는 檢字의 내용이 두 자전이 서로 거의 같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 한자자전이 나온 뒤로 일제강점기에 나온 여러 종류의 옥편들이 위에서 말한 면모들을 대부분 그대로 준용하였다. 망국 조선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시점에 나온 이 자전은 기존의 옥편에서 갖추지 못한 결함을 시대 변화와 새로운 수요에 맞추어 개선하고 상세한 주석을 보충함으로써 충실하고 현대적인 사전의 전범이 될 수 있었다.
朝鮮光文會의 고전간행과 애국계몽운동. 新字典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사전은 일제강점기 최남선이 朝鮮光文會를 통해 민족계몽운동 차원에서 전통문화와 신지식을 보급할 목적으로 펴낸 도서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는 石儂 柳瑾(1861~1921)이 순한문으로 쓴 ‘新字典序’와 당시 25세의 六堂 崔南善(1890~1957)이 국한문을 혼용하여 작성한 ‘新字典叙’, 2가지의 서문이 실려 있다.
유근은 1895년 김홍집 내각에서 탁지부 주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1896년에 결성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각종 토론회를 주도하며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또 1898년 남궁억, 장지연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주필, 사장을 역임했다. 1905년 장지연이 을사조약 체결에 격분한 나머지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의 마지막 부분을 끝맺지 못하자 유근이 완성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그는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06년 대한자강회, 1907년 신민회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또 중앙학교 초대교장, 동아일보 편집고문을 지냈다. 계몽운동가이자 언론인, 대종교 지도자였던 그는『신정동국역사』,『신찬초등역사』등 역사서를 펴냈으며, 安鍾和와 함께『초등대한지지』(1907)도 집필하였다.
이 자전을 발행한 경성 신문관은 1907년 여름 일본에 있던 최남선이 귀국하여 부친에게서 받은 돈으로 설립한 출판사였다. 원래 유근이 완성한 『한문대자전』이라는 원고가 있었으나 출판 사정으로 간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신문관에서 내용을 축소하여 간행하게 된 것이다. 신문관에서는 한국 최초의 종합 잡지인 「소년」과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새별」, 「청춘」 등의 잡지를 발행하였다.
최남선은 1910년 12월에 신문관 2층에서 고전 간행 및 귀중 문서의 수집, 편찬, 개간을 통하여 민족고전과 전통을 보존하고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조선광문회를 발족하였다. 행림서원판 『향약집성방』서문이나 도서목록에 보면 이 역시 애초에 조선광문회 간행 계획에 들어있었으나 이태호의 요청을 받아 들여 협조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조선광문회에서는 그 첫 작품으로 『동국통감』과 『열하일기』를 간행하였고, 『한문대자전』이 2번째 사업이었다. 당초에는 180여 종의 고전을 중간한다는 계획이었으나 대부분 수포로 돌아가고 『동국통감』,『해동역사』,『대동운부군옥』,『경세유표』,『삼국사기』,『삼국유사』,『발해고』,『택리지』,『산경표』,『용비어천가』,『성호사설』,『이충무공전서』등 20여 종을 간행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조선광문회의 설립자이자 이 책의 서문을 쓴 최남선은 시인이자 역사학자였으며, 민족문화를 전파하는 출판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890년 觀象監에 근무했던 최헌규의 둘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12세였던 1901년 「황성신문」에 ‘대학흥국책’을 투고한 바 있고 1902년에 경성학당에 입학, 1904년에는 대한제국 황실유학생으로 뽑혀 동경 부립 제일중학교에 들어갔으나 3달 만에 자퇴하여 귀국하였다. 1906년 와세다대 지리역사학과에 입학하였지만, 이듬해 경술국치 문제로 학교와 다투다 격분한 유학생들과 함께 자퇴하였다.
최남선은 1909년 안창호와 청년학우회를 설립하였으며, 1919년 ‘독립선언문’을 기초하여 투옥되었으며, 이로 인해 1921년 10월까지 2년 6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출옥한 이후에 1922년 東明社라는 출판사를 세워 잡지「동명」을 발간하는 한편, 역사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그는 1928년 총독부의 조선사 편수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점차 친일행각을 이어갔고 광복 이후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그는 젊은 시절부터 국학진흥과 역사연구, 고전 간행 등 민족문화 선양에 크게 이바지 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의학전통과 역사연구에 기여한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공로라 하겠다.
조선의 쓰임에 맞춘 新出漢字. 新字典
일제강점기 六堂 崔南善(1890~1957) 등이 주축이 된 朝鮮光文會에서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전통문화를 정리하고 새 시대에 걸 맞는 신지식을 보급할 목적으로 펴낸 이 자전에는 『康熙字典』과 『全韻玉篇』등 기존의 자전과 『字典釋要』등을 참조하여 문자지식을 집약해서 정리한 것이다. 하지만 기존에 통용 지식 이외에도 새로 정리된 내용이 첨부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 ‘俗字部’를 들 수 있다.
우선 ‘朝鮮俗字部’라고 명명된 내용을 중심으로 의약 관련 문자지식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湯劑의 1회분 복용량을 종이에 싸서 포장하는 단위로 ‘첩’이 있다. 보통 1회 복용량을 포장하여 1첩이라고 부르고 1일 분에 2첩을 쓰고 재탕하여 3회 복용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또 10일 분량으로 作貼하여 포장할 경우, 이를 1劑라고 한다.
원문을 보면 “帖 [톄]: -紙 톄지, 見公私文字. 又音( [텹], 藥一封曰一-, 見醫方”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를 뜯어보면 종이를 말할 때는 ‘체지’라 하고 의서에서 약 1봉을 말할 때 1첩이라고 말해, 용례에 따라 각기 발음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또 “症 [증]: 病之徵驗 증셰, 古皆作證.”이라 하여 병을 징험할 수 있는 증세를 나타날 때, 이 글자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옛글에서는 모두 ‘證’자를 사용하다가 훗날에서야 비로소 이 글자(‘症’)를 쓰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病症’이나 ‘症勢’라고 쓰는 이 글자가 단지 조선에서만 사용된 글자인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또 하나 흥미로운 글자풀이가 있다. ‘쇠 철’자로 쓰이는 ‘鉄’이다. 이 글자는 요즘에도 같은 뜻으로 쓰이는 ‘鐵’자의 약자로 통용되곤 한다. 그런데, 『신자전』에서는 음을 [석]이라고 달았고 풀이를 ‘無痘痕’이라 했으며, 한글풀이는 ‘곱상스럽을’이라 하였다. 무슨 의미인지 알쏭달쏭한데, ‘見官簿軍籍’이라 출전을 밝혀놓았다. 곧 관청의 등록부나 군적대장에 軍丁의 용모를 구분하여 기재할 때, 쓰였던 일종의 약호 같은 것으로 활용되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추정은 다음의 사례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縛’자이다. 이 글자는 자서에서 ‘묶을 박’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동일한 음에 ‘有痘痕’이라는 설명에다가, 한글풀이로 ‘얽을’이라 하였으며, 역시 ‘見官簿軍籍’이라 했다. 이를 앞의 ‘鉄’자와 대비하여 보면 천연두를 앓은 흔적이 없이 얼굴이 깨끗한 壯丁은 미소년이나 好男子를 뜻하는 표기로 석(鉄)자를 사용하였고 이와 반대로 천연두를 앓고 난 후유증으로 얼굴이 얽었다는 의미에서 이 박(縛)자를 써서 표기했던 것이다. 세속의 표현으로 어려서 두창을 앓아 얼굴에 심한 상처가 남은 곰보를 ‘박박 얽었다’고 말한 기억을 되살리면 이 말이 여기서 유래함을 추정할 수 있다.
또 ‘䅯’은 ‘기장 당, 수수 당’으로 자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穀名蜀黍 옥수수 〇 강낭이 見俗書’라고 하여 원래의 의미에서 파생하여 조선에선 옥수수를 뜻하는 글자로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본초에선 玉蜀鬚라는 명칭이 쓰이지만 짧게 한 글자로 표현하기 위해 이 ‘당’자를 끌어 쓴 것이 아닌가 싶다.
또 하나 재미난 경우는 신체의 은밀한 부위를 가리키는 글자로 남자의 음낭을 뜻하는 글자가 있다. ‘閬’자가 바로 그것인데, 원래 ‘솟을 대문 랑(낭)’으로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풀이는 ‘腎囊 불알 見俗書’라 했으니 조선시대 항간에서 이 글자로 남성의 囊丸 혹은 고환을 지칭하는 용도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䑋’은 ‘살찔 양’자로 일반 자전에 올라 있는데, “[양] ‘牛胃 쇠양 見東醫寶鑑獸部, 又僞作양”이라 하여 소의 위를 뜻하는 우리만의 글자를 창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