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종숙 성여경직에게 드리다 與三從叔聖餘慶稷
만나지 못한 지 몇 년이 흘렀더니, 간간이 소문을 통하여 지내시는 형편을 대략 알고는 있었으나, 주소를 정확히 몰라 한 통의 편지도 전하지 못했습니다. 매번 풍파가 조금 잠잠해지면 한 번 직접 가서 그간 서로 겪어온 정상을 말하려 했으나 이 또한 뜻대로 되지 않으니, 때로 바람결에 생각만 하며 마음속으로 탄식할 뿐입니다.
월전에 몇 달 동안 출타했다가 집에 돌아오니 보내신 편지가 와 있은 지 이미 한참이 지난 후였습니다. 바쁘게 열어보자 마치 딴 세상의 소식을 듣는 듯했습니다. 즉시 답장을 드렸어야 했지만 겉봉투가 훼손되어 진작 답장을 드리지 못했으니, 거듭되는 잘못과 한스러움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뒤로 이미 몇 달이 흘렀는데, 객지에서의 체도(體度)가 어떠신지요? 병고를 앓으신 곳이 아직 깨끗이 회복되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연세는 점차 많아지고 기력은 점차 쇠하니 다시 건강해지길 어찌 바랄 수 있겠습니까? 크게 탄식할 뿐입니다.
중환(仲煥)이 편안히 모시는데 하는 일이 있다고 들었으니, 이것을 능히 제접(濟接)하는 방도로 삼으시는지요? 익환(益煥)과 용환(龍煥)이 가까이 살아 간간히 자주 서로 소식을 듣고 지내는 듯한데, 지난 분주한 세월 동안 어떻게 각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이로울 것 없는 한 생각이 때로 간혹 몽상(夢想)을 일으킬 뿐입니다.
삼종질은 위태로운 세월 속에 남은 목숨을 겨우 보전하고 있는데, 오직 아이들이 무사하니 이것으로 세상사는 재미로 삼지 않겠습니까? 생활의 계획은 한결같이 예전 같은데, 올봄에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세 아들을 이곳으로 와서 살게 했으나 아직 식구를 다 데려오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대개 수중에 한 칸의 셋집도 마련하지 못한 탓이라 도리어 한숨만 쉽니다. 장차 머지않은 시일 내에 단란하게 모여 살 듯합니다. 앞날의 방도는 짐짓 미리 기필하지 못하기에 다만 스스로 마음이 흔들리고 정해지지 못하니, 스스로 돌아보건대 인생이 끝내 이렇게 마칠 뿐이겠습니까?
고향과 봉화의 근래 안부는 별다른 일이 없는 듯하지만, 들을 만한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진군(震君)의 일은 차마 다시 얘기하지 못하겠으니, 명수(命數)에 맡겨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가문의 운수에 맡겨야 하겠습니까? 통탄한들 어찌 미치겠습니까?
오래 전부터 그쪽으로 한 번 행차하려 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가 지금까지 이르렀는데 지금은 여름철이라 몸을 빼낼 겨를이 없을 듯하니 선선해진 후에 한 번 만나 볼 작정입니다만, 과연 부질없는 말이 되진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침 여기서 영해에 사는 남형(南兄)을 만났는데 객지의 일이 바쁘고 어수선하여 몇 글자를 대강 적어 부치니, 나머지 다하지 못한 말은 이 형에게 상세히 물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진군(震君) : 배경직(裵慶稷)의 종질 배진환(裵晉煥, 1907∼?)을 말한다. 6.25동란에 잡혀가서 돌아오지 못하여 생사를 알지 못한다.
백저 배동환(白渚 裵東煥) 著, 김홍영·이미진 역, 학민출판사(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