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름은 녹습니다
함석헌
봄이 옵니다. 참 어렵게 비싸게 옵니다. 지난겨울은 아주 따뜻하다고 겨울인 줄 모르게 지낸다고 좋다고 사람들이 호호호호 하고 웃더니 그 웃음이 채 끝나기도 전 우수 경침이 다 지나서 다시 추위가 와 가지고 웃던 사람들이 다시 푸르덩덩해졌습니다. 사람을 놀리기나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놀리기는 무엇을 놀리며 누가 그 놀리기를 하고 있겠습니까? 大自然입니다. 크게 스스로 그런 것입니다. 노루 제 방귀에 놀랐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제 생각에 놀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천지 창조 이래 따슨 겨울 추운 봄이 몇번이었겠습니까? 수없이 여러 번 있었을 것입니다. 그 미리 짐작 못했던 일 때문에 죽은 사람도 많았겠지만, 사실 그런 미리 짐작 못한 일이 아니었더라면 발달은 없었을 것입니다. 발달은 결국 정신의 발달입니다. 사람은 줌이요 받음입니다. 산 담에는 그 남는 정신을 홋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이고 난 담에는 전 사람의 살고 난 정신을 밑천으로 전해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생각이 그것을 원하거나 말거나 간에 그것은 그렇게 됩니다. 우리 생각 뒤에 보다 크고 보다 어진 엄청난 생각이 있어 그것을 하고 있습니다. 이 어진 생각이 잘나고 못난 모든 사람의 살고 난 결과를 정신이라는 한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 녹여가지고는 다시 새 세대로 새 사람으로 빚어냅니다. 신비입니다.
大然閣에 불이 났습니다. 사람이 수백명 죽고 막대한 물자의 손해가 났으니 큰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大然입니다. 크게 그런 것입니다. 역사 이래 불도 많이 났을 것이요 사람도 많이 죽었을 것입니다. 놀랄 것 없습니다.
웃었다 울었다 하며 놀라기 보다는 차분히 생각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 뒤에 신비 속에 서는 그 엄청난 생각의 방송이 우리 생각의 안테나에 느껴질 때까지 말입니다.
어느 의미로는 大然閣과 그 많은 사람과 물자의 불탐은 余先榮이라는 한 형상을 그려내기 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그 불길은 타는 대연각 보다 높습니다. 몸 때문에 저를 잃지않는 정신, 제 목숨을 제 손으로 한 개피씩 살금살금 태우며 바라보고 앉았는 생각! 그것은 그 한 사람의 것이라기에는 너무도 큽니다. 그러기 사람마다 중국민족의 대륙성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사실은 민족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적인 것이요 우주적인 것입니다.
닉슨이 모택동을 만났다고 야단들입니다. 인간은 참 작은 물건입니다. 놀랄 것이 없지 않습니까? 놀라는 것은 자기를 파는 일입니다. 자기를 팖은 자기보다 크다 생각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닉슨도 사람이요 모택동도 코로 숨 쉬는 인간이거니 생각하면 놀랄 것 없습니다. 8억이라도 인간이요 단 여덟이라도 인간이요, 인간인 점에서 다를 것이 없다 생각했다면 겁을 집어먹을 리가 없습니다. 밤길을 혼자 가도 품에 돈이 없으면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무서운 것은 돈 때문이지 목숨 때문이 아닙니다. 거지는 맨 땅에서 단 잠을 잡니다.
짐승보다 더러운 것은 거지입니다. 먹다 남은 것을 빌기 위해 허리를 굽히기 때문입니다. 거지보다도 더러운 것은 갈보입니다. 목숨이 아니라 쓸데없는 사치를 위해 몸만 아니라 마음을 팔기 때문입니다. 갈보보다도 더 더러운 것은 정치인입니다. 제 생각을 위해서 아니라 남의 생각을 위해 사람을 죽이면서 나라 일을 하노라고 스스로 속고 남을 속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사람이다, 내가 받은 몸과 마음은 우주의 것이요 인류의 것이다 하는 생각이 있었더라면, 자기 속에 그 엄청나신 뜻의 음성을 들었더라면, 그렇게 비겁하게, 그렇게 생각 좁게, 그렇게 악독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나라의 일, 이 사회의 풍조를 보면 참 마음 아픕니다. 자주성 없이 떠드는 꼴, 먼 역사의 내다봄 없이 권력숭배에만 미치는 꼴, 그 권력을 위해 전체를 죽여가며 당파주의를 내세우는 꼴, 나와 다르면 가진 수단을 다해 보복을 하는 꼴 차마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골목마다 가득 차 있는 우리 어린 것들을 병신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돈을 벌겠다고 동물을 때려가며 길들이는 것보다도 악독 잔인한 일입니다. 세계 빙상 경기에 모처럼 출전하며 기껏 하는 소리기 “북괴를 이기고 오겠습니다” 열세살 소녀가 그랬을 때 나는 어쩌면 요렇게도 병신을 만들었느냐 하는 생각에 분과 울음을 못참았습니다. 새끼를 낳아 놓고 그 사지를 하나씩 하나씩 짤라먹어 병신을 만드는 귀신이 있다면 여러분 어찌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한국 아닙니까? 이런 공기 이런 불신 불안 불행 속에서 자라고 저 애들이 사람이 될 것입니까? 짐승이 될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람 잡아먹는 귀신이 되란 말입니까? 총 사주고 칼 사주고 죽여라 쏴라 밤으로 낮으로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가르쳐 주고 무엇 되기를 바랍니까? 문둥이도 밤중에 새끼를 낳고 불을 켜들고 저같이 생겼나 본다는데!
생각이 깊어야 합니다.
가슴이 넓어야 합니다.
씨알 속엔 우주가 들어야 합니다.
어름이 녹습니다. 저놈의 어름은 녹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 가슴이 먼저 녹아 풀려야 합니다.
씨알의소리 1972. 2,3 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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