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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거목, 늦봄 문익환 1
통일의 거목, 늦봄 문익환 1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갈릴리 민중의 고난과 해방을 말하고, 서울 평화시장 골목에서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기둥으로 쓰러진 전태일이 다시 수만 명 노동자의 외침 속에서 부활하는 것, 문익환 자신도 부활한 전태일이라고 말했다. 북측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비로소 목사 문익환이 그들을 찾아온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문익환은 다음 날 주석궁에서 김일성을 만난다. 문익환은 김일성을 보는 순간 두 팔을 한껏 벌리고 망설임 없이 다가가서 부둥켜안았다. 세계를 섬기는 자세, 세계를 껴안는 자세. 언젠가 이한열의 영결식에서 26명 열사들의 이름을 부르며 하늘을 향해 내보였던 그 동작으로 뜨겁게 포옹했다.
문익환이 자리에 앉자마자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북한 핵실험이 몰고 온 파장에 세계가 들끓고 있다.
미국과 일본이 당장에 핵폭탄이라도 맞은 듯이 분기충천 앞 다퉈 한반도로 달려와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안 이행을 위해 우리에게 노골적인 압박을 가하고,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 동참과 남북 경협사업의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민족의 안정과 평화와는 거리가 먼 위험한 선택을 그들은 서슴없이 강요한다. 1천 번의 핵실험을 한 나라와 호시탐탐 군사대국 핵무장의 기회를 노리는 세계 제일의 경제국이 합작해내는 위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라 안이 온통 싸움판 형국이어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정치적 이해와 냉전의 찌꺼기들이 되살아나 서로 부딪치고 있다.
금강산 관광사업과 개성공단사업을 퍼주기로 몰아 그간의 남북화해와 공동번영 그리고 민족통일의 전망을 하루아침에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주장은 한편으로 미국과 일본의 주장과 맞아떨어져 마치 세계평화와 한반도 안정에 기여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무모하고도 어리석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1989년 평양
1989년 3월 25일, 문익환은 일본과 중국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분단 40년을 넘어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간 땅. 북측은 문익환을 뜨겁게 맞았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강하고 힘차게 말한다.
“38선을 베고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38선을 넘겠다던 김구 선생과 친구이자 민족시인 윤동주 그리고 장준하와 전태일의 마음을 안고 이곳에 왔습니다. 이제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솔직해지십시오. 더 이상 남과 북의 주민들이 헤어져 살지 않게 해야 합니다. 후손에게 분단의 비극을 물려주지 말아야 합니다.” 문익환은 봉수교회에서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라는 설교를 했다.
“분단 50년을 넘기지 맙시다. 분단 50년을 넘기는 것은 민족의 수치입니다.”
김일성이 문익환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해봅시다. 잘하면 될지 모르지요.”
그것으로 45년 동안 갈라놓았던 분단의 장벽이 적어도 그 두 사람 사이에서는 일순에 무너져버렸다. 분단과 죽음의 갈등 시간을 넘어 삶의 온존성이 회복되는 통일의 길로 가기 위해 두 사람은 흉금을 텄다. 통일방안에 대하여 서로 거리낌 없이 묻고 답했다.
두 차례에 걸쳐 이뤄진 회담에서 문익환은 김일성의 통일의지가 얼마나 뜨겁고 확고한지도 확인했고, 통일에 임하는 자세가 경직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남과 북의 정부에 의해 사사건건 엇먹으며 접점을 찾지 못했던 통일방안들이 하나하나 같은 목적지로 몸을 틀었다. 정치·군사 뿐 아니라, 경제·문화교류의 추진 그리고 남북 정상회담의 가능성까지 예상할 수 있었다.
이산가족 문제와 남북공동 국어사전(겨레말 큰사전) 편찬 등에 관해서도 합의를 이뤘다. 한없이 기뻤다. 그 모든 성과는 문익환이 평양을 떠나기 전날 조인된 ‘4·2남북공동성명’으로 집약되었다.
그것은 북의 정부가 문익환이라는 일개 민간인에게 중요한 외교적 약속을 보장하는 파격적인 우대가 담겨 있기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가 놀라고 감동한 문익환의 북한 방문은 남한 사회를 한순간에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문익환이 방북 중, 주체사상탑과 북의 체제를 지키다가 숨져간 열사들의 묘소인 ‘신미리애국열사릉’을 참배한 사실 때문이었다. 남파간첩이 묻혀 있는 묘역임에도 개의치 않고 묵념을 하고 예를 다 갖췄다. 북측은 그렇게 예의를 다해주는 것이 눈물겹도록 고마웠을 것이다. 뒷날 안기부에서는 당연히 그 점을 문제 삼았다. 그때 문익환의 답변은 이랬다.
“통일을 한다는 것이 갈라진 역사를 통일 하는 것인데, 통일된 다음 어떻게 남쪽 영웅만 영웅이겠어? 북쪽의 영웅도 민족의 영웅이 되는 거야. 김유신만 영웅인가? 을지문덕, 계백장군도 민족의 영웅인 것이야.”
여론이 여론을 부추기고 정국은 일시에 공안정국으로 급선회했다. 반공단체는 물론 교회 내부의 공격도 심각했다. 연일 그의 방북을 비난하는 성명이 나오고 시위가 일어났다.
- 문익환 씨는 지은 죄를 회개하고 온 국민 앞에서 사죄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 자의적으로 평양에 가서 획일적인 지도자와 만난다는 것은 남북관계개선이나 통일에 과연 보탬이 되는 것인지를 냉철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 문익환 씨의 월북사건은 국민을 더 놀라게 하고 있다. 대관절 정부는 그렇게도 무력한가? 아니면 방관하고 있는가? 무엇을 더 기다려야 하고 언제까지 참고 기다릴 작정인가?
이러한 입장을 피력하는 악의적인 여론의 주체가 기독교 단체들이라는 사실은 슬픈 일이었다.
신랑이 신부의 방을 찾듯이……
9일 동안의 평양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문익환은 또 다시 구속되었다. 이제 백두에서 한라에 이르는 내 조국의 진정한 시민이 되었다고 외친 그는 안타깝게도 판문점을 통과하지 못하고 갔던 길을 되돌아 왔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된 이래 벌써 다섯 번째 감옥행이었다.
“저같이 때 묻은 늙은이가 아니라 어린 임수경 양이 휴전선을 밟고 건너온 걸 생각하면, 돌아오기를 백 번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뒤이어 방북한 임수경이 판문점을 통과한 사실을 두고 문익환은 그것조차 축복이었다고 좋아했다.
“목사님은 신랑이 신부의 방을 찾듯이 감옥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반민주 독재, 죽임의 세력과 싸워야 하는 고통도 삶의 기운을 되찾는 환희와 축복의 행사로 바꿔버렸지요. 하지만 그땐 참으로 많이 실망하셨나 봅니다. 남북대화의 틀을 만들어주었는데도 노태우 정부는 그것을 통일의 기회로 활용할 생각은 하지 않고, 시종 몰상식과 옹졸함으로 일관 했어요.”
문익환의 부인 박용길(89세, 장로, 전 민가협 회장)은 그때를 그렇게 기억한다.
안기부와 검찰은 문익환의 방북을 북의 지령에 의해 대남혁명전략에 이용당한 행위로 몰아갔다. 문익환은 법정에서 ‘역사의 판결은 다르다’며 논쟁을 벌였다. 45년이나 남이 그어놓은 선을 아직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평소에 주장해 오던 분단의 병폐를 낱낱이 지적했다. 민족문제를 고민하다 절망한 젊은 대학생들의 죽음과 국제사회에서 당하는 분단독재의 수모와 1천만 이산가족의 눈물과 노동자·농민의 가난과 남북 권위주의체제의 강화, 그 모든 원인은 쌍방이 한 해에 쏟아 붓는 10조 원에 이르는 분단 비용에 있음을 성토했다. 남들이 우리 땅에 그어놓은 분단선을 걷기 위해 서로 적대할 것이 아니라 ‘고무·찬양’할 것을 역설했다.
그러나 재판은 불공정하게 이뤄졌다. 그해 10월, 피고가 퇴정해버린 가운데 검사는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판사는 ‘징역10년’을 선고했다. 이전에 그래왔듯이 문익환은 이번에도 형량을 문제 삼지 않아 상고는 자동으로 포기되었다.
당신이 오늘 우리 곁에 있다면……
72세의 문익환은 절망했다. 그에게는 참으로 생경한 어휘였지만, 그는 진실로 절망했다. 결코 좌절을 모를 것 같은 그에게 가한 노태우 정부의 환멸의 강도는 그만큼이나 컸다. 그 때문에 안양교도소에서 문익환은 병을 앓았다. 이전의 감옥살이를 하면서 겪었던 고통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고 ‘죽음을 앞에 두고’라는 시까지 썼다.
병은 생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평양까지 갔다 왔는데도 남북 사이의 교류가 뚫리지 않은 정신적 좌절감에서 생긴 감옥병이었다.
“목사님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정치·제도적 편의에 의해서 민중의 공동체적 삶의 터전이 깨지거나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셨어요. 혁명과 전쟁, 죽음과 갈등의 폭력의 20세기를 온몸으로 통과하면서 항상 그 점을 생각하셨습니다. 민중의 공동체적 터전이 국가주의적 국경중심의 질서로 분단되고 재편되는 것을 비성서적으로 보았어요. 그래서 남북의 분단현실을 단순한 영토적 분할로 보지 않고 죽음의 세계로 인식했지요. 그곳에 삶의 온존성 회복이라는 부활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민주의 회복이 민중의 부활이고 통일이야말로 민족의 부활인 것이지요. 돌아보면, 목사님의 삶 자체가 우리가 살아온 역사처럼 아주 큰 아픔과 슬픔입니다.”
문익환의 평전을 쓴 민족문학작가회의 김형수 사무총장의 말이다.
아무튼 20세기의 냉전질서가 깨지고 21세기 새로운 시대가 왔지만, 부끄럽게도 우리의 오늘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반도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았고 여전히 정세가 불안한 강대국들의 이기적인 각축장이 되어 있다.
김형수가 덧붙였다.
“목사님이 지금 우리 곁에 계신다면, 심하게 저항하셨을 겁니다. 북한을 향해서도 거침없이 호통을 쳤을 것이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이나 동북공정으로 일컬어지는 중국의 역사왜곡을 향해서도 강하게 일갈하셨겠지요.”
김형수의 목소리와 눈빛이 지금은 곁에 없는 어떤 위대한 거장의 자취를 그리워하는 듯이 낮게 여운을 남기고 잦아들었다.
글 홍인기
1960년 출생. 1999년 『작가들』에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받음. 현재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작가회의 회원
사진제공 박용길 장로, 박용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