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 주공소전기유년(1849, 헌종15)〔淸溪朱公小傳己酉〕
주잠(朱潛)의 자는 경도(景陶), 호는 청계(淸溪)이니, 주 문공(朱文公주희(朱熹))의 증손이다. 문공(文公) 선생의 중자(仲子)인 야(埜)가 네 아들을 낳았으니, 거(鉅)와 전(銓)과 탁(鐸)과 질(銍)이다. 거(鉅)가 또 네 아들을 두었으니, 연(淵)과 흡(洽)과 잠(潛)과 제(濟)인데, 잠(潛)이 전해온 가업(家業)을 능히 이어서 두문불출하고서 의리를 행하여 훌륭한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다. 권신(權臣)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화친을 주장해 나라를 그르치고는 다시 내수외양(內修外攘)할 뜻이 없는 것을 보고 평소에 늘 근심하면서 애통함을 참고 있었는데, 어느 날《논어》의 “욕거구이(欲居九夷)”장을 읽고는 개연히 감회를 일으켜서 문하의 제자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해외의 청구(靑邱)는 기성(箕聖)이 봉해진 곳으로 평소 예의가 있는 땅이라 칭송되었으니,우리들이 거처할 만하다.”라고 하고, 섭공제(葉公濟)ㆍ조창(趙昶)ㆍ진조순(陳祖舜)ㆍ주세현(周世顯)ㆍ유응규(劉應奎)ㆍ도성하(陶成河) 등 7명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하였다. 전송하는 이들이 슬퍼하고 탄식하여 노래하기를 “서산(西山)의 고사리를 캐고동해(東海)의 물을 떠서, 감은 있되 돌아옴은 없을 행차에 전별하노라.” 하였다. 배를 금성(錦城나주(羅州))에 정박시키고서 인하여 거처로 삼았다.
원(元)나라 사람들이 송조(宋朝)의 유민들 가운데 동국으로 출국한 이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고려로 하여금 원나라의 경도로 압송하게 하였다. 이에 여러 도(道)를 크게 수색하니, 공은 이름을 적덕(積德)이라 바꾸고, 나주(羅州)로부터 도피하여 능성(綾城)의 고정리(考亭里)에 은둔하였다. 또삼별초(三別抄) 의 난을 만나자, 마침내 능성과 나주 사이에 있는 용담(龍潭)의 인부리(仁夫里)에 이거하니, 고로(故老)들이 그 남겨진 터를 가리켜서 “화인(華人) 주 학사(朱學士)가 거처한 곳이다.”라고 한다.
원나라 사람들이 일본을 정벌하려 할 적에, 고려를 독촉하여 전선(戰船)을 만들게 하고 또 금을 채굴하게 하여 백성들이 명을 감당하지 못하니, 왕이 공의 손자 열(悅)을 보내 원나라에 가게 하여서 글을 써서 이해를 진달하게 하였다. 이때에 공의 아우 제(濟)가 송 공제(宋恭帝)를 따라 원나라에 있었는데, 열(悅)이 조복을 입고 예(禮)를 행하는 것을 보고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파천(播遷)한 이래로좌임(左袵)하는 무리에 섞여 있었는데, 오늘날 다시 옛 위의를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물어보고서 청계(淸溪)의 손자임을 알고는, 더욱 크게 경탄하고 기이하게 여기면서 마주하여 눈물을 흘리며 형을 따라 동국으로 나가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또 주지남(朱指南)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정종(正宗정조(正祖)) 신해년(1791, 정조15)에 사행(使行)을 따라서 연경에 갔다. 당시 보모각(寶謨閣)에서 시예(試藝)하던 학사들 중에 주학년(朱學年)이란 이가 있었으니, 문공(文公)의 25세손이었는데, 자리를 옮겨서 손을 잡고 말하기를, “그대의 재기가 이미 이와 같고, 성 또한 나와 같으니, 우리 집안 세보(世譜)에 이른바 ‘동국으로 나간 청계공(淸溪公)’이란 분이 그대의 선조가 아닌가.” 하자, 주지남이 “그렇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주학년이 또 말하기를, “세보에, 선조 휘 제(濟)께서 송 공제(宋恭帝)를 따라 원(元)에 있을 때에 주열(朱悅)을 보고서 청계공(淸溪公)의 손자임을 알았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매산거사는 말한다.
청계공(淸溪公)이 피난하여 동국(東國)으로 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천지가 뒤바뀌어서 송(宋)나라의 국운이 다하여나라가 패망하였다.강남(江南)의 백성 및 물자가 대부분 피비린내 나는 전쟁 중에 잔멸되었고, 요행으로 면한 이들도변발(辮髮)하고좌임(左袵)하여서 오욕을 입고 구차히 목숨을 보전하였다. 그런데 공의 자손은 능히 의관을 갖추고서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어, 중화(中華)의 예의의 풍모를 잃지 않았으니, 문공(文公) 집안의 예법이 여기에 있는바, 공이 이치와 기미를 밝게 알았음을 징험할 수 있다. 그 일이 몹시 기이하여,확실한 것을 의심스럽다고 전하고 의심스러운 것을 확실하다고 전한 것이오래되었으니, 이미 《동사보유(東史補遺)》와 《송비서각일기(宋秘書閣日記)》에 실려 있다.
죽천(竹泉) 김 문청공(金文淸公)의 문집에 또 이런 말이 있는데, “공이 중국본〔唐本〕의 기록에 의거하여 문공(文公주희(朱熹))의 행장을 기술하였는데, 청계공(淸溪公) 잠(潛)이 송(宋)나라 말기를 당하여 일곱 명의 학사(學士)와 동국으로 나갔으니, 바로 송(宋)나라 영종(寧宗) 가정(嘉定) 연간이었다. 후학 여리(呂履)가 추록(追錄)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중국본의 기록이란 바로 황명(皇明)의 익번(益藩)에서 간행한 《군신도감(君臣圖鑑)》이니, 여기에서 상고할 수 있다. 정묘(正廟정조(正祖))께서 하교하신 말에 이르기를, “귀하도다! 주씨(朱氏)라는 성(姓)이여.운곡(雲谷)과 무이(武夷)는 지명이 주자(朱子)와 가깝다고 하여 존숭하는데,하물며 주씨(朱氏)처럼 천지와 만고에 무궁한 경우이겠는가. 모든 혈기가 있는 자라면 누군들 아끼고 존경하지 않겠는가.” 하시고는, 인하여 그 후손들에게 역을 견감해주도록 명하였다. 옛말에 이르기를, “여러 사람들의 말이 분분하면 성인에게서 절충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정묘(正廟)께서는 성인이시니, 마땅히백 세를 기다리더라도 의혹되지 않을 바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동쪽으로 온 공씨(孔氏)와 다르게 여길 수 있겠는가.
淸溪朱公小傳己酉
朱潛字景陶號淸溪。朱文公曾孫也。文公先生仲子埜生四子。鉅,銓,鐸,銍。鉅又有四子。淵,洽,潛,濟。潛克紹家傳。杜門行義。爲髦士師法。見權臣執命。主和誤國。無復修攘之義。居恒鬱悒忍痛。一日讀論語欲居九夷章。愾然興感。呼門弟子誡之曰海外靑邱。箕聖攸封。而素稱其禮壤。吾屬可居。携葉公濟,趙昶,陳祖舜,周世顯,劉應奎,陶成河七人。浮海而東。送者悽歎。歌曰採西山之薇。酌東海之水。以餞有往無來之行云。舟泊錦城仍居焉。元人聞宋朝遺民多出東國。使高麗押送上都。於是大索諸道。公變名積德。自羅州逃隱綾城之考亭里。又値三別抄之亂。遂移龍潭之仁夫里綾羅間。故老指點其遺墟曰華人朱學士所居云。元人將征日本。督高麗造戰船。又使採金。民不堪命。王遣公之孫悅如元。書陳利害。時公弟濟隨宋恭帝在元。見悅朝服行禮。歎曰自我播遷。混於左袵。不圖今日。復見舊儀。問知其爲淸溪之孫。大加敬異。相對涕泣。恨不隨兄東出。又有朱指南者。正宗辛亥。隨使行入燕。時寶謨閣試藝諸學士有朱學年。文公二十五世孫也。移席執手曰君才氣旣如此。姓又同我。我世譜所謂東出淸溪公。無乃爾祖。指南曰然。學年又言世譜有曰先祖諱濟。隨宋恭帝在元。見朱悅而知爲淸溪公之孫云。
梅山居士曰淸溪公避地東來。未幾天地翻覆。宋祚屋社。江南民物。擧皆殘滅於干戈腥羶之中。幸而免者且椎髻左袵。蒙汙辱苟全。公之子孫。能以衣冠祀其先人。不失中華禮義之風。文公家禮。於是焉在。可驗公明理知幾。其事甚奇。信以傳疑。疑以傳信者久矣。旣載東史補遺及宋秘書閣日記。竹泉金文淸公文集又有云公依唐本記述文公行狀。而淸溪公潛當宋季。與七學士東出。卽宋寧宗嘉定年間也。後學呂履追錄唐本記。卽皇明益藩所刊君臣圖鑑也。是可以考信。而正廟下敎若曰貴哉。朱之爲姓。雲谷武夷。以地名之近而尊尙。况朱姓竆天地亘萬古。凡有血氣者。孰不愛尊。仍命其後孫蠲役。古語云衆言殽亂折諸聖。正廟聖人也。惟當竢百不惑。然則詎可與孔氏之東來者。差殊觀哉。
[주-D001] 청계(淸溪) 주공(朱公):
주잠(朱潛, 1194~1260)으로, 본관은 신안(新安), 호는 청계이다. 신안 주씨(新安朱氏)의 시조이다. 본래 남송(南宋) 안휘성(安徽省) 휘주부(徽州府) 신안(新安) 출신으로, 주희(朱熹)의 증손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비서각 직학사(祕書閣直學士)에 이르렀으나, 남송이 원의 침략으로 멸망하자 1212년(강종1) 가족 및 그의 문인 7명을 데리고 뱃길을 통하여 고려로 건너와 전라도 나주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 뒤 원 세조(元世祖)가 고려로 피신해온 송나라 신하들을 압송해가려고 하자 이름을 적덕(積德)으로 바꾸고 전라도 화순에서 은둔하였다.
[주-D002] 논어의 욕거구이(欲居九夷)장:
구이는 동쪽의 오랑캐 지역으로 아홉 종류의 이족이 있어 명명한 것인데 조선도 이중에 하나라고 한다. 이 장은 《논어》 〈자한(子罕)〉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자께서 구이에 살려고 하시니, 혹자가 말하기를 ‘그곳은 누추하니,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였다. 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군자가 거처한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 하셨다.[子欲居九夷, 或曰: 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주-D003] 해외의 …… 칭송되었으니:
기성(箕聖)은 기자(箕子)로,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의 현인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여 예의와 문물을 가르치고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베풀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通志 卷194 四夷傳 東夷》 《後漢書 卷85 東夷列傳》
[주-D004] 서산(西山)의 고사리:
지조와 절개를 굳게 지키는 것을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은(殷)나라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멸망당하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형제가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겠다면서 서산 즉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채미가(采薇歌)〉를 부르며 고사리만 뜯어 먹다가 굶어 죽은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주-D005] 동해(東海)의 물:
지조와 절개를 굳게 지키는 것을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인 노중련(魯仲連)이 조(趙)나라에 가 있을 때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을 포위하였는데, 이때 위나라가 장군 신원연을 보내 진나라 임금을 황제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저 진나라가 방자하게 황제를 자칭하고 죄악으로 천하에 정사를 한다면, 나는 동해에 뛰어들어 죽을 뿐이요, 내 차마 그 백성은 될 수가 없다.[彼卽肆然而爲帝, 過而爲政於天下, 則連有蹈東海而死耳, 吾不忍爲之民也.]”라고 하자,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50리 뒤로 물렸다고 한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주-D006] 삼별초(三別抄) 의 난:
삼별초는 좌별초(左別抄)ㆍ우별초(右別抄)ㆍ신의군(神義軍)으로, 최씨(崔氏) 집권 때에 생긴 군대조직이었는데, 몽고와의 항쟁 중 강화도에서 개성으로 환도하라는 명을 받고 1270년(원종11) 반란을 일으켰으나, 3년을 항쟁한 끝에 관군과 몽고의 연합군에 의해 패하였다.
[주-D007] 좌임(左袵):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것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가리킨다. 《논어》 〈헌문(憲問)〉에, “관중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微管仲, 吾其被髮左袵矣.]”라고 한 공자의 말이 보인다.
[주-D008] 나라가 패망하였다:
원문의 ‘옥사(屋社)’는 망한 나라의 사직(社稷)에 지붕을 설치함을 말하는데,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천자의 대사에 지붕을 덮지 않아 서리ㆍ이슬ㆍ바람ㆍ비를 직접 맞게 하는 것은 천지의 기운이 서로 통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때문에 망한 나라의 사직에는 지붕을 만들어 하늘의 양기를 받지 못하게 한다.[天子大社, 必受霜露風雨, 以達天地之氣也. 是故喪國之社屋之, 不受天陽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9] 변발(辮髮):
원문의 ‘추계(椎髻)’는 상투가 길어 망치 모양인 것으로 오랑캐 풍속의 하나인바, 여기서는 변발을 가리킨다. 변발은 머리 앞부분을 깎아내고 나머지 부분을 땋아 뒤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 모양으로 만주족의 풍속이다.
[주-D010] 좌임(左袵):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것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가리킨다. 《논어》 〈헌문(憲問)〉에, “관중(管仲)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微管仲, 吾其被髮左袵矣.]”라고 한 공자의 말이 보인다.
[주-D011] 확실한 …… 것이:
《춘추》 환공(桓公) 5년에 “봄 정월 갑술ㆍ기축에 진후 포가 죽었다.[春正月, 甲戌, 己丑, 陳侯鮑卒.]”라고 하였는데,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어찌하여 죽은 날짜를 두 개나 기록하여 죽었다고 하였는가? 《춘추》의 의리는 사건이 확실한 것은 확실한 것 그대로 전하고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것 그대로 전하기 때문이다.[卒何爲以二日卒之? 春秋之義, 信以傳信, 疑以傳疑.]”라고 한 표현에서 온 말이다.
[주-D012] 죽천(竹泉) 김 문청공(金文淸公):
김진규(金鎭圭, 1658~1716)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달보(達甫), 호는 죽천, 시호는 문청이다. 1682년(숙종8)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대제학ㆍ예조 판서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죽천집(竹泉集)》, 《여문집성(儷文集成)》이 있다.
[주-D013] 운곡(雲谷)과 …… 존숭하는데:
운곡(雲谷)과 무이(武夷)가 주자(朱子)와 관련된 지명이기에 이를 높인다는 뜻이다. 운곡은 복건성(福建省) 건양현(建陽縣)에 위치한 노봉(蘆峯)으로, 주자가 그곳에 회암초당(晦庵草堂)을 짓고 글을 읽으면서 산의 이름을 운곡이라 고치고 〈운곡이십육영(雲谷二十六詠)〉을 지었으며, 무이는 복건성 무이산시(武夷山市)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주자가 이곳에서 자양서실(紫陽書室)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지은 바 있다.
[주-D014] 백 …… 바:
《중용장구》에 “군자의 도는 자기 몸에 근본하여 여러 백성들에게 징험하며, 삼왕에게 상고해도 틀리지 않으며, 천지에 세워도 어그러지지 않으며, 귀신에게 질정하여도 의심이 없으며, 백 세에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는 것이다.[君子之道, 本諸身, 徵諸庶民, 考諸三王而不謬, 建諸天地而不悖, 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라고 한 말에서 온 표현이다.
[주-D015] 동쪽으로 온 공씨(孔氏):
우리나라에 온 공자(孔子)의 후손을 말한다. 원나라 때 공자의 54세손 공소(孔紹)가 고려에 와서 우리나라 공씨의 시조가 되었는데, 정조(正祖) 때에 그 후손인 고(故) 대사헌 공서린(孔瑞麟)의 후손과 공덕일(孔德一)의 후손을 정사(政事)에서 수용하고, 두 파의 자손들을 대대로 녹사(祿仕)시키도록 한 일이 있다. 《正祖實錄 16年 9月 3日》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사)해동경사연구소 | 김성은 (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