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09(월)
욥기 12장~20장
(욥 13,5)
아, 자네들이 제발 입을 다문다면!
그것이 자네들에게 지혜로운 처사가
되련마는.
(욥 13,12)
자네들의 금언은 재와 같은 격언이요
자네들의 답변은 진흙 같은 답변일세.
묵상-
오늘 통독 범위에서는 위 구절이
와 닿았다. 그 다음으로 눈길이
간 건, ‘나는 하느님의 과녁이
되어 죽을 몸’이라는 대목이다.
세 친구는 욥의 극단적 고통이
어디로부터 기인된건지 알려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여전히 분석하고
판단하고 평가한다.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와
경험들을 증명하려고 애쓴다.
욥이 말을 받아친다.
제발 그 입 다물라. 그래야
지혜로운 처사가 될 거라고.
약이 될 거라 생각해서 건네는
금언은 재와 같은 격언이며,
자네들의 답변은 진흙 같을 뿐,
다 쓸데없단 거다.
욥기가 이래서 분량이 길어진건가.
욥과 세 친구가 쏟아내는 말의
분량이 엄청나다. 처음엔 침묵하던
욥도, 질세라 반격한다.
‘지들은 잘난 체하며 할 말 다하고
온갖 영적 지식과 생각들을 끌어다
끊임없이 말질을 하면서 나더러는
입 닥치고 가만있으라고?'
일리 있는 항변이다.
욥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만
하지 않을까.
근엄한 잣대를 들이 밀며,
너의 고통은 네가 살아온 삶의
결과일 수 있으니 죽은 듯이
잠자코 있으라던 친구의 단죄가
얼마나 야속하겠나.
욥이 이미 내뱉은 말,
내가 아무리 벗어나려 안간힘을
써도 결국엔 ‘마찬가지, 어차피
죽을 몸이라던 탄식, 의인 소리를
듣던 자신이 이제는 하느님의 과녁이
되었기에 뭘 해도 작정하고
밀어붙이시는 하느님의 뜻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 거다.
그런데 세 친구는 멈출 줄을
모른다. 입에 모터를 달았나.
지친 욥이 더 지치는 것 같아
안쓰럽다 정말.
힘든 사람을 좀 쉬게 해줘야지.
인정머리 없어보이잖아.
살다보면 의도와는 달리
사면초과에 이른 듯한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
사방이 막혔으니 앞도 안보이고,
옆도 뒤도 안 보이는 그런 때 말이다.
어찌해야할 바를 몰라 누군가에게
도움이라도 청할 양이면, 어떤 이는
내 문제를 자기가 꼭 해결해줘야
할 것처럼 생각해서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됐는지를 되짚어보는가
하면, 어떤 이는 마치 하느님이라도
된 양, ‘하느님은 그걸 원하실 거야,
하느님 뜻은 그게 아닐 수도 있어.’
라고 하며, 아직도 뭔가 내려놓지
못한 게 있는지 보라고 재촉한다.
이런 고통을 겪고 나면 어차피
내려놓게 될 텐데...
사방이 막혀 소경처럼 캄캄해진
사람에게 불안과 중압감을
얹어주는 말들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럴 땐,
‘네가 한번 당해봐.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너도 겪어봐
그런 말이 나오나’라고 반격하고
싶을 터,
고통은 이렇게 직접 겪어보지 않은
상황에선 역지사지의 마음이 되기가
어렵다. 어려운 이 시대에 욥처럼
고통 받는 이들이 너무 많다.
욥은 하느님이 숨어계신 것처럼
느껴진다고도 했는데, 그런 고통의
때에, 보이지도 않고 믿어지지도
않는 하느님을 찾으라고 재촉하며
기도를 권하는 무례함을 저지른다면?
나와 우리의 모습이 아니기를...
어쩌면 우리는 당면한 고통에서,
서둘러 그 이유를 찾으려 하고,
너무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니,
더 고통스러워지는 건 아닐는지.
내 경험으로는 그 고통의
순간을 껴안아 내가
받아들여야 할 십자가로
인정하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게 훨씬 힘들고
괴로웠던 것 같다.
지금은 내가 아파야 하는거구나.
지금은 내가 허물어져야 하는구나.
지금은 내가 다 놓아야 하는구나.
지금은 내가 외로워야 하는 거구나.
이렇게 받아들이기까지 우리는
욥만큼은 아니어도,
거쳐야 할 몇가지의 단계를
순차적으로 겪으며, 수용과
회복과 순명의 열매를 맺어
나가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고통받는 세상의 수많은
욥들을 가슴으로 만나
공감하고 위로하며, 다시
일어서도록 일으켜주는
진정한 친구가 될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생긴 말인가?
고통이 은총이라고!!!!
좋은 말이긴 하나,
누구에게나 피하고 싶은
어려운 말이다.
첫댓글 박지현 요셉피나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