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살롬 ! (2023년 3월 15일 신우회 수요일 예배 말씀)
우리는 예수님의 영성을 이야기할 때, 영혼과 육체를 말하게 됩니다. 나의 육체는 정말 죄 가운데 있기에 회개하여야 하고, 또 버려야 하는 하찮은 것인가요. 그리고 영은 선한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진정된 나의 존재는 영과 혼과 육이 함께 하는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말씀 : 마가복음9장42-50절 < 새번역성경 >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곧 그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손을 잃은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발을 잃었으나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들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너희는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쳐두어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
말씀 선포 : 영혼인 존재로 삽시다. (Living as a Spiritual Being)
우리는 이런 말을 사용합니다. ‘있을 때 잘하지’ 사람에게 좋은 기회가 항상 있지 않은데 그것을 놓쳐서 안타까울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또한 과거에 좋은 기회를 잃었던 것을 기점으로 다음 좋은 시기가 찾아왔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의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합니다.
느헤미야기의 핵심이 이와 연관합니다. 느헤미야를 통해 포로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 약속하신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고대 유대인이 성벽을 세우고 완전한 정착을 이룬 뒤, 그들은 학자 에스라를 통해 모세의 책을 통한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에스라는 신바벨로니아 제국의 포로생활을 통해 조상 이스라엘 민족의 언어였던 고대 히브리어를 잊었던 고대 유대인에게 통역자를 통해 아람어로 해석하고 설명하며 주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고대 유대인은 해석되고 설명되는 주님 말씀을 통해 야웨 하나님이 왜 그들 조상 이스라엘 민족을 징계하셔서 자기들이 포로생활의 후예가 되었는지를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야웨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분처럼 거룩하게 살아야 했지만, 그들은 야웨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주변 민족에 동화되어 결국 야웨 하나님과 고대 근동 지역의 다른 신들을 동급으로 놓고 살았던 것이 야웨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결정적 계기임을 알았습니다. 고대 유대인은 더 나아가 자기 삶을 돌아봤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솔로몬 왕처럼 이방 무리와 결혼하고 거리낌없이 그들 문화를 받아들여 야웨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주님앞에 회개했습니다. 그들의 회개는 이방무리와 떨어져 고유한 주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는 부흥(갱신) 운동으로 연결됐습니다. 고대 유대인은 야웨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좋은 기회를 주실 때 거룩하신 야웨 하나님 백성으로 잘 살아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있을 때 잘하자’는 사람에게 좋은 동기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간혹 이것이 사람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공생애 사역 중이시던 예수님이 마주했던 주후1세기 유대인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에스라가 일으켰던 부흥(갱신)운동을 이끄는 대표적 유대인 집단은 바리새파였습니다. 그들은 마카비 혁명을 통해 100여 년의 독립왕조를 이끌었던 하스모니안 왕조에서 영향을 받아 로마제국 내의 지배 속에서도 유대인 사회의 지배계층을 일부 담당하는 동시에 일반 유대인 사회에 폭넓게 자리잡은 집단이 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인 지배계층부터 일반계층까지 자기 백성으로 귀환하실 야웨 하나님을 전하며 그분께서 돌아오셨을 때 거룩한 주님의 백성으로 인정받기 위해 하나님 백성답게 언약에 신실한, 즉 주님 말씀에 신실하게 순종하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압박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에겐 특별히 거룩한 하나님 백성은 이방인들과 거리를 두고 사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그들의 삶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상호 간에 신실히 사랑하는 삶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야웨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게 하는 잘못을 이끌어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에 대해 자기 제자들에게 하나님 백성이 거룩하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단순히 이방인과 함께 사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쁜 생각이 흘러나오는 근원인 사람의 마음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주장하듯 단순히 이방인과의 단절된 삶을 사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신실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전적인 은혜로 구원하신 다음 그들을 부르셔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말씀(율법)을 주셨는지에 대한 거룩한 목적을 기억하는 것만이 하나님 백성을 거룩하게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배경 속에서 포로생활 가운데 있던 유대인에게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야웨 하나님은 제2성전 시대 자기 예언자들(대표적으로 스가랴)을 통해서 자신이 예루살렘에 돌아오실 것을 분명히 하시며 이를 통해 모든 이방인이 자신의 살아있음과 세상을 사랑하는 은혜를 깨닫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모든 사람중에 가장 뛰어난 인종으로 추켜세우시고자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이방인을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 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었습니다. 문제는 유대인이 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잘못된 오류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스가랴 예언자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육체로 부르며 주님 앞에서 잠잠하라고 선언했습니다. 속사도 마가도 예수님이 같은 선상에게 말씀하셨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사람이 가진 사람이 가진 육체의 한 부분이 죄짓게 하면 잃어버리고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하나님 백성이 주님과 세상이 한 가족 되도록 세상의 오염된 곳을 정화시키는 소금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이 뜻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하나님 백성에 참여하지 못하게 걸림돌이 되는 사람은 큰 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세상이 화목하도록 자기 백성을 소금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이 은혜와 소명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자기 마음을 온전히 지킨 영원을 가진 존재로서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