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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67
1월7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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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꼭 빼닮은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초대교회는 빵의 기적 사화를 성찬례의 예시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빵과 물고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대대로 성체성사의 상징이 되어왔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제자단을 중심으로 둘러서있는 군중, 그리고 주님께서 군중에게 빵과 물고기를 나눠주는 모습은 오늘날 세상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표상이 되고 있습니다.
빵의 기적이 이루어진 곳은 놀랍게도 큰 도시나 고을이 아니라 빵가게나 구멍가게 하나 없는 ‘외딴곳’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은 복음선포를 위한 여행길을 계속하셨고, 말씀에 굶주린 수많은 군중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 숫자가 장정만 오천 명이라니, 그 상황이 눈에 그려집니다. 광활한 대평원이나 광야에 엄청난 군중이 운집해있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빵의 기적을 하시는 모습은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예수님과 제자단,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죽음, 영광에 도달하기 전까지 광야를 횡단하는 은총의 여행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광야 여행의 인도자로서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모세와도 흡사합니다. 에집트를 탈출한 이후 민족의 영도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며, 안전하게 가나안땅으로 인도였듯이, 예수님께서도 목자없이 방황하는 백성들을 가르치고, 갈증과 굶주림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역사상 유래없는 참목자요 착한 목자로서 세상 사람들 앞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자, 백성들의 기쁨과 환희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이스라엘에는 착한 목자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양떼를 향한 관심과 애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거짓 목자들은 양들을 보호하기는 커녕 잡아먹기 바빴습니다. 거짓 목자들은 양들에게 조금도 힘이 되어주지 못했으며 돌보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거짓 목자들은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당시 이스라엘에는 목자가 없는 상태보다 더 비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양떼는 흩어져 맹수들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상황 속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신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기 때문이다.”(마르코 복음 6장 34절)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한 기적의 배경에 군중을 향한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 연민의 마음, 측은지심이 깔려있음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목자없는 양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백성들을 지도하고 이끌어야 할 당시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망각했기에 발생한 일입니다. 양들을 향한 애정이나 열정이 티끌만큼도 없는 당시 목자들은 직무에 따라오는 돈이나 영예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지도자로서의 능력이라 리더십을 완전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사회의 모습이 어찌 그리 당시 모습과 유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거짓 목자들의 거짓 가르침과 위선, 무사안일주의와 백성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에 대한 외면 앞에 양떼들을 길을 잃고 방황하며, 교회를 떠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꼭 빼닮은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시대의 징표를 정확히 파악할 줄 아는 목자, 이 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분석하는 지도자, 용기있게 백성들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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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좋은 기분이 기적을 일으킨다>
1968년 6월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 교수팀은 매우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길거리에 지갑을 떨어뜨린 후 그 속의 신분증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를 확인했습니다. 그 결과 약 45%의 신분증이 주인에게 되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발견됐습니다. 6월4일은 단 하나의 신분증도 주인에게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날은 바로 미국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가장 유력했던 로버트 F. 케네디가 괴한에게 암살당한 날이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한 가지 기분 나쁜 소식이 사람들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로지 예수님만이 빵 5개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고 믿는 분이셨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 그 믿음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적을 하시기 전에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을 놀리시는 말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니까 해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라고 되물으며 자신들에겐 그러한 기적을 할 믿음이 없음을 스스로 고백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고 믿음이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시도라도 해 봤냐?”라고 물으시는 듯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자신들이 가진 음식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보지도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대한 불만이 녹아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음식은 10명도 먹을 수 없는 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다고 믿고 열 명이라도 먹이려고 노력해보아라.”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복권을 사야 복권에 당첨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레짐작으로 불가능하다고 믿어 아무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5천 명을 먹이는 것도 한 사람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부터 먹이려는 마음은 기분이 좋아야 생깁니다. 사람들은 기분이 좋고 싶으면서도 자기 기분을 소홀이 대합니다.
옛날에 동양의 어떤 임금이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그 꿈은 자기의 이빨이 하나하나 다 빠져버리는 꿈이었습니다. 왕은 나라에서 유명한 해몽자를 불러다 꿈을 해석하게 하였습니다. 해몽자는 꿈을 풀어 해석하기를 임금님의 친척들이 한 사람씩 죽어서 맨 나중에는 임금님만 남게 된다고 해몽을 했습니다. 기분이 언짢은 임금은 그 해몽자를 죽였습니다.
임금은 계속해서 다른 해몽자를 구해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해몽자가 임금에게 불려왔는데 그는 임금님의 꿈 얘기를 들은 후에 다음과 같이 해석을 내렸습니다. “임금께서는 집안의 모든 친척들보다도 가장 장수를 해서 오래 오래 사신다는 꿈입니다.” 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그 해몽자에게 많은 상금을 내렸습니다.
기분은 전염됩니다. 내가 기분이 좋으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겐 좋은 일만 생기게 됩니다. 같은 상황이라도 긍정적이고 기분이 좋은 사람은 기적을 볼 수 있지만 부정적이고 기분이 나쁜 사람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불가능하다고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셨다면 그들을 통해 기적을 행하시려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의 기회를 주시지만 우리가 기분이 나빠서 평상시 부정적인 생각에 너무 물들어서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마더 데레사처럼 모든 가난한 사람들로 천국을 채우고 싶은 만큼 기분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기분이 좋으려면 끊임없이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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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34-44 :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오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을 들었다. 한때 굶주리셨던 하느님이요 인간이신 분이 지금 많은 사람을 먹이신다. 그분은 말씀으로 그들을 우선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빵은 “외딴곳”에서 하느님께 봉헌되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진다. 그곳은 외딴 곳이었지만 세상을 먹여 살리시는 분이 함께 계시고 시간이 이미 늦었지만 시간에 종속되지 않는 분이 함께 계셨다.
그분은 전에 빵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하느님으로서 승리하셨다(참조: 마태 4,1-11; 마르 1,12-13; 루카 4,1-13). 배고픔도 겪으셨지만 수천 명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참조: 마태 14,20-21; 15,37-38; 마르 6,42-44; 8,6-9).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참조: 요한 6,51). 목마름도 느끼셨지만(참조: 요한 19,28),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37)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보이는 인간이신 동시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시다. 인간으로서는 우리처럼 잡수셨고,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겪으셨지만(참조: 히브 4,15), 하느님으로서는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참조: 마태 14,17-21; 마르 6,38-44; 루카 9,14-17; 요한 6,10-13).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의 배고픔을 헤아리셨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37절) 하신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38절)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주님 앞에 내어 놓았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풀밭에 앉도록 명하신다. 사람들은 백 명의 식탁에, 쉰 명의 식탁에 둘러앉는다. 말씀의 식탁, 성찬의 식탁에서 그들은 양육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시고 감사를 드리신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서 받는 선물에 대해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는 순간 창조의 행위가 이루어진다.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가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기적을 이루셨다. 그러고도 남은 빵조각과 물고기가 열 두 광주리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 빵의 기적의 신비는 이것이다. 보잘것없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 바로 빵의 기적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열매를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의 활동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전해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나누는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보이더라도 그것을 주님 앞에 내어 놓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기적을 언제나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천이라는 숫자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완전함을 가리킨다. 오천의 영적인 의미는 대담하게 행동하고 올바른 정신으로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갈 용기를 지닌 사람은 천상 지혜로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오천 명이 상징하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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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가엾은 마음”과 연관된 그리스어 동사는 ‘스플랑크니조마이’입니다. 이것은 내장이 끊기는 아픔을 가리키는데, 우리말로 ‘애가 녹는다.’ 정도로 번역이 되겠지요. 예수님의 마음은 불쌍한 이를 측은히 바라보시는 안타까움이 아니라, 그 불쌍한 이와 같은 처지, 한마음이 되어 함께 아파하는 마음입니다.그럼, 누가 불쌍한 사람일까요? 한마음으로 함께 살아가는 데 익숙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굳이 빗대어 보자면,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아닐까 합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가장 낫겠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함께’ 먹을 것을 찾아 나서는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백 데나리온”이라는 돈의 가치에 얽매여 ‘함께’의 길을 잃어버린 제자들, 그들이 바로 목자 없이 헤매는 양들이 아닐까 묵상해 봅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은 실은 아주 적습니다. 필요한 것의 양이 절대화되는 이유는 삶의 자리가 불안하기 때문이지요. 불안함을 덜어 내는 것은, 앞다투어 쫓아가는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서로 다른 삶의 처지에 함께하려는 마음이고, 그 마음이 모여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제도와 법이 생기는 것입니다.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무한한 사랑이나 자비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나눔이 예수님의 기적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의 초대가 빵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제 것이라도, 함께 나눌 것인가, 혼자 누릴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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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라는 말과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가엾은 마음’은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사랑하니까 가엾은 마음이 듭니다. 만일에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이웃이 가엾은 처지에 놓여 있음을 보면서 가엾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시 그곳에 모여든 군중만을 가엾게 여기신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가엾은 처지에 놓여 있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영적으로’ 굶주리고 있음을 보시고, 그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영적인 양식’을, 즉 ‘말씀의 은총’을 주셨다는 뜻이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가엾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실 뿐만 아니라, 그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주시는 분입니다. 생각으로만 사랑하는 것과 사랑한다고 말만 하는 것은 불완전한 사랑이고, 미완성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결실을 맺고 완성되려면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어떤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고, ‘완성된 사랑’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라는 말도 사람들이 ‘영적으로’ 굶주리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마르 6,35-37)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영적인 굶주림’만 신경 쓰시고 ‘육신의 배고픔’은 무시하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요한 6,6)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육신의 배고픔’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걱정하기 전에 이미 ‘빵의 기적’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괜한 걱정’을 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은 당연히 걱정해야 할 것을 걱정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분명히 제자들도 배가 고팠을 텐데, 그들은 자신들의 배고픔이 아니라 사람들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나의 배고픔을 생각하기 전에 남의 배고픔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예수님 말씀도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당시 상황에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돈도 없었고, 빵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뭔가 깊은 뜻이 들어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흔히 ‘제자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라고 해석하는데, 단순한 시험이 아니라, 시험 이상의 가르침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이야기의 맨 끝에 배치한다면, 즉 ‘빵의 기적’을 행하신 뒤에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조금 바꾼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신앙인의 공동체는 사람들의 ‘영육 간의 건강’을 서로 챙겨주는 공동체입니다. ‘영육 간의 건강’은, 영적인 배부름과 육신의 배부름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만일에 사람들의 육신의 배고픔은 외면하고 영적인 일만 강조한다면,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도 않으면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만 강조한다면, 그 공동체는 사랑 없는 공동체입니다. 사랑 없는 공동체는 예수님의 교회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아파서 누워 있는 사람을 보살피는 일,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일 등은 아주 기본적인 사랑 실천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본당은 운영비도 모자라서 항상 쩔쩔맨다. 불우이웃 돕기를 할 여력이 없다.” 라고 변명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사랑 실천은 돈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런 변명은 정말로 구차한 변명입니다. 개인의 사랑 실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이 많이 있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싶어도,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마음만 간절하고 몸이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정은 헤아려 보지도 않고서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는 것을 함부로 폄훼하면 안 됩니다. (자기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해서, 배고픈 사람의 사정을 자기 기준으로 마음대로 판단하고 말을 함부로 해서 이웃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히는 것을 목격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사랑을 거스르는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인간의 원초적인 생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산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마태 4,4), 이 말씀은, 빵보다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지 빵은 없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말씀’으로 살지만 빵도 있어야 합니다.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생명의 빵’으로 계시하신 일이기도 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일으키신 ‘사랑의 기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이고, 숙제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면 지금도 ‘빵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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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훈철 바오로 신부님]
새해 새날들을 잘 보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며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맞이하고 어려운 이들과 나눌 수 있는 넉넉한 마음으로 지내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는 말로 청취자 여러분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사실 저는 이 복음 말씀으로 강론을 준비 할 때면 항상 이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이미 많은 분들도 알고 있는 이야기 이지만 다시 한 번 나누면 함께 하고 싶은 ‘아스피린 한 병의 기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탈리아의 어느 작은 마을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우연히 책에서 아프리카 오지에서 원주민들을 돌보며 생활하고 있는 슈바이처 박사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박사님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에 있었고 자신은 이탈리아에 있는데 어떻게 그를 도울 수 있을까? 고민 했습니다.
생각 끝에 소년은 공군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와 함께 보낸 아스피린 한 병을 혹시 아프리카를 지나가는 비행기가 있으면 그 편에 보내어 낙하산으로 슈바이처 박사에게 전달해 달라는 편지였습니다.
사령관은 소년의 착한 마음에 감동하여 소년의 편지를 방송에 내보냈습니다. 그 결과 방송국과 군부대에는 아프리카에 보내 달라며 보낸 국민들의 각종 의료용품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그리하여 슈바이처 박사에게 보내기 위하여 의료용품을 한 자리에 모아 보니 수억 원어치나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한 소년의 측은지심의 마음이 이처럼 큰 기적을 이루게 되었던 것 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기 전에 많은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시고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연민과 사랑으로 드러내시며 기적을 준비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군중들에게 아무런 책임과 의무가 없으셨지만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사랑을 무한히 부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측은한 마음으로 보아주시며 돌보아주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그 보잘 것 없는 음식을 종자돈 삼아 큰 기적을 이루어내셨습니다.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빵과 물고기를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으며 먹은 사람은 남자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고 마르코 복음사가는 힘차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오병이어 사랑의 기적은 2,000년 전 갈릴래아에서 뿐만이 아니라 지금의 시대에도 계속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시대 또 다른 기적은 무엇일까요? 이는 바로 예수님의 측은지심의 마음을 우리가 닮는 것입니다. 어떤 손은 누군가를 안아주고 악수하여 화해가 되고 평화가 되고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손은 부딪혀 이기적인 마음과 폭력이 되어 다툼이 되고, 미움이 됩니다.
또한 어떤 입은 기도가 나와 기쁨의 말을 쏟아내고, 화해와 용서, 평화와 진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입은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며, 욕심을 쏟아내고, 다툼과 오해, 거짓을 말합니다. 이처럼 진정 새로운 기적은 바로 우리 자신의 관대한 마음, 이웃의 고통에 기꺼이 동참하는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의 사랑을 느끼며 삶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랑의 기적을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작은 사랑의 기적들이 모여 주님께서 더 큰 사랑의 기적으로 만들어 주실 것을 믿고 고백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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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주영길 토마스 신부님]
많은 사람들이 늦은 시간 또 외딴 곳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따라왔다.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제자들의 생각은 현실적이다. 각자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해결하고 오는 방법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어리둥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은 나눔의 실천을 가르쳐 주려고 하신 것이다. 풍족한 가운데 나눔이 아니라 부족한 가운데 나눔의 실천이다.
비만·당뇨·고혈압 등 현대의 많은 질병은 먹지 못해 생긴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이 먹어 탈이 난 것이다. 영양은 포화상태인데 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풍족한 먹을거리에도 더 좋은 것을 먹기 위한 웰빙 열풍까지 불고 있다. 그리고 날씬한 몸매를 가꾸기 위한 다이어트 열풍도 한몫 거들고 있다.
언젠가 필리핀에 선교 체험을 다녀온 후배 신부의 말이 생각난다. “오늘날 가난의 문제는 부자가 나누지 않는데 있는 것만이 아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엄격히 차단되어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데 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한 필리핀에서 절실히 느낀 것이라 한다. 부자 동네는 가난한 동네와 엄격히 구별되어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부자 동네는 경비가 철저할 뿐 아니라 울타리까지 쳐 있고 그 안에서 쇼핑과 교육, 여가 생활 모두가 가능했다. 가난이 무엇이고 배고픈 처지가 어느 정도인지 모른 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종교는 ‘단식’을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교회도 일 년에 두 번,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에 한 끼 단식을 의무화하고 있다. 가장 엄격한 종교는 이슬람교인데, ‘라마단’ 기간에는 낮 동안 물조차 먹지 않는다.
이러한 단식행위는 극기와 보속의 의미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배고픈 이들과의 연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배고픔을 알지 못하는 풍요 속에서 살지만 배고픈 이들의 고통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여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단식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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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구를 보았을까요>
마르코 6,34-44 (오천명을 먹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누구를 보았을까요>
남자 어른만도
오천 명이었다지요
여자 어른과 어린이까지 하면
분명 훨씬 더 많았을 테고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숨었던 바로 그 사람들은
누구를 보았을까요
그분은 제자들에게 명하시어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지요
백 명 또는 쉰 명
무리에 섞여 있던 사람들은
누구를 보았을까요
오천이 백이 되고 쉰이 되듯이
백과 쉰이 열과 다섯이 되었겠지요
얼굴빛 숨소리조차 느끼게 된
너 나 우리 사이의 사람들은
누구를 보았을까요
늦은 시간 외딴곳
그분과 함께 하고픈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지요
먹을 것은 턱없이 부족하고
쉴 곳조차 변변치 않았다지요
갈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압도당한
그분의 불안한 제자들은
누구를 보았을까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말씀하시는
가엾은 마음 지니신 그분은
누구를 보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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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어쩌면….>
“어쩌면 오늘일지도...”라는 글입니다.
“평생에 세 번 온다는 행운이 오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내게도 첫사랑은 시작되겠지, 어쩌면 오늘일지도...
훗날 후회하지 않으려면 무언가 시작해야 하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열매를 거두기 위해 나무를 심어야 하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보고 싶은 반가운 친구가 찾아오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맺힌 것을 풀어야 하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우리 주님 오시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내 인생의 마지막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장정만도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즉, 측은지심. 사람들의 고통을 보시고, 그래서 그 고통으로 사랑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이 빵을 먹고 배부를 때는 열광하지만, 배고픔을 채워줄 빵 대신에 생명의 말씀인 “나는 생명의 빵” 을 주시자 군중들이 당신을 떠납니다. 이때, 예수님은 군중들의 잘못을 보지 않으시고, 군중들의 고통을 보십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보게 되고, 왜,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지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군중들을 측은지심으로 사랑하고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용서로 당신의 몸으로 생명의 빵을 주시고, 당신의 속죄 피로 죄인들인 우리의 죄를 씻겨주십니다. 그 예수님이 측은지심의 날이 어쩌면 오늘일지도...
사랑하는 고운님들!
오늘 1 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요한의 첫째 편지에서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해야 한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가 뭘까요?
남편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우는 몸이 불편한 엄마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엄마는 구겨진 돈 만 원을 들고 동네 모퉁이 구멍가게에 아이 분유를 사러 갔습니다. 분유 한 통을 들고 계산대로 가져가니, 분유가 만육천 원이었습니다. 그 엄마는 분유를 사지 못하고 힘없이 돌아서서 나가고, 주인은 분유를 제 자리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꽝”하고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아이 엄마를 불렀습니다. “꽝”이 무슨 소리였겠습니까? 주인은 분유통을 제자리에 올려놓고 슬퍼서 땅에 떨어뜨린 것입니다. 그 소리가 “꽝” 소리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아이 엄마를 불러 세우고서는 찌그러진 분유는 “반값”이라고 하면서, 만 원을 받고 이천 원을 거슬러 주었습니다.
아이 엄마는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몇 번이곤 가다가 돌아보고서 “감사하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가게 주인은 그 아이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팔천 원에 천국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또한, 아이 엄마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돌보는 가게 주인의 마음에서 천국을 봅니다.
이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지금, 여기서 항상 변함없이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겠지만, 상대방의 잘못이 아니라 상대방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주님의 측은지심이 어쩌면 오늘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과 간호하는 분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으로 베풀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베풀어지는 날이, 어려운 문제들이 풀리는 날이, 자신이 바라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이 어쩌면 오늘일지도….
측은지심을 잃지 않는 간절함으로 살아가는 복된 고운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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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69)
♧♧ 시편 69편 20절….
"당신께서는 제가 당하는 모욕을, 제가 당하는 창피와 수치를 아십니다. 저의 적들이 모두 당신 앞에 있습니다."
* 당신께서는...아십니다.
의인이 고난당함을 하느님은 그냥 방관만 하고 계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이는 당신께서 의인의 신앙을 단련시키기 위해 허락하신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믿는 이와 들 함께 하시어 저들이 능히 고난을 감당할 수 있게끔 도와주시는 것입니다.(코린토 1서 10장 13절. 참조) 이 구절은...다우시도 자신이 그러한 고난 중에 처해 있음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자신을 돌보아 주실 줄로 확고히 믿고 있음을 나타내 줍니다.
* 제가 당하는 모욕을, 제가 당하는 창피와 수치를...
다윗이 원수들로부터 당한 모욕과 창피, 수치 그리고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뜻합니다.(8-13절. 참조)
* 저의 적들이 모두 당신 앞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다음 2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 다윗의 적들은 다윗만을 대적하는 자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대적하는 이들이라는 것. 둘째, 하느님께서는 대적들의 악행을 일일이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 시편 69편 21절….
"모욕이 제 마음을 바수어 저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동정을 바랐건만 허사였고 위로해 줄 이들을 바랐건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 모욕이 제 마음을 바수어...
여기서 말하는 ‘모욕’은 ‘조소’ ‘훼방’을 뜻합니다. 다윗의 원수들은 다윗의 과거의 여러 수치스러운 행위들, 즉 밧 세바 사건(사무엘 하권 11장. 참조)이나 미친 사람 노릇을 하며 필리스티아에서 목숨을 연명하던 일(사무엘 상권 21장 11-15절. 참조) 따위를 들어 다윗을 비웃으며 그에게 모욕적인 말들을 퍼부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다윗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지난날의 자신의 죄고달이 다시금 생각났기 때문에 그 마음이 새삼 찢어지는 듯 아팠을 것입니다.
*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는 다윗이 극심한 심적 고통으로 인하여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쇠해졌음을 의미합니다.
* 동정을 바랐건만 허사였고 위로해 줄 이들을 바랐건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곤경 중에 위로를 주는 진정한 친구가 없는 다윗의 외로운 상태라고 보는 것은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의미만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러한 고백을 통해 곤경 중에 진정으로 의지할 이는 오직 하느님 한 분뿐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처럼 외로움을 말하는 다윗의 모습은 훗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형제와 친척들과 갈릴래아 사람들, 그리고 당시 유다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 최후의 수난 당하실 즈음에는 모든 제자들로부터도 버림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상기시켜 줍니다.(마태오 복음 26장 56절. 루카 복음 4장 16-30절. 요한복음 7장 2-9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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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요즘에 존경할 만한 신부님이 없어요.” 어떤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왜요? 존경할 만한 신부님이 얼마나 많은데요?”라고 말해봤지만, 이분의 표정은 ‘너도 신부라 신부 편드는 거지?’라는 것 같습니다.
아마 만나는 신부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나 봅니다. 강론에서 느끼는 것이 없다, 정치 이야기만 한다, 신부 주변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신자들만 있다, 성당 관리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 신자들을 차별한다 등등…. 한도 끝도 없습니다.
사실 성당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이런 말을 자주 이야기합니다. “요즘에는 존경할 만한 스승이 없다.” 존경할 만한 스승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존경할만한 스승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전에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는 신자에게 이제까지의 본당신부 중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존경하는 분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의외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이 신부님은 **이 좋고요, 저 신부님은 **가 좋고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신부의 이름이 나옵니다. 다 존경한다면서 그 좋은 이유를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스승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찾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안 계신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찾아야 합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찾을 때 주님을 분명히 만나게 됩니다. 빵의 기적이 이루어진 곳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도시 한 가운데가 아니었습니다. 외딴곳으로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에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모여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모든 교통수단을 동원해서 이들을 이곳에 오게 했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전지전능하신 힘을 이용해서 이들을 이곳으로 어느 날 갑자기 순간 이동을 시킨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직접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든 노력을 동원해서 이 낯선 곳까지 먹을 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 직접 찾아온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빵의 기적이라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주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마음, 욕심 가득한 마음으로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열린 긍정적인 마음만이 주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기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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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를 구입하고서...>
언젠가 인터넷을 통해 노트 20권을 샀습니다. 분명히 과소비입니다. 1년 내내 쓸 수 있는 양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노트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좋은 노트를 보면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이제 다시는 사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도, 우연히 좋은 노트를 보게 되면 계속 그 안에 머무르다가 결국 구매합니다.
문구류에 대한 과소비를 자주 하는 저입니다. 그래도 문구류(노트나 펜)는 고가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를 일으키기에 문구류에 대한 소비는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그러면서 ‘행복이 별 것 있어? 이런 것이 행복이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한두 가지는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 특히 자신의 잠재력을 키울 수 있는 것이라면, 지금의 나에서 더 성장하는 나를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정말로 좋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많은 것을 가져서 행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값비싼 것을 가져서 행복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작은 것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노트를 바라보면서……. “아~~ 행복하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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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에서 LA까지 신문 홍보를 위해 다녀왔습니다. 가장 크다는 성당 신부님과 약속했습니다. 9시 미사에 함께 하기로 했는데 그만 조금 늦게 도착했습니다. 미사 후에 신부님과 만났습니다. 내년에 시간을 주시면 홍보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내년에는 다른 신문사에서 홍보한다고 합니다. 내 후년에라도 시간을 주시면 홍보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한 본당에서 2개의 신문을 홍보하고 싶지는 않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계시는 동안 혹여 시간을 주시면 언제든지 오겠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성전을 보았습니다.
다음 본당에 갔습니다. 신부님께서 커피를 주시고,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시간을 주시면 홍보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긍정적으로 말해 주셨고, 다른 신부님들께 메일을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성령 기도회에 와서 강의해도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사목적인 결정을 하실 때 3가지 원칙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학적인 문제는 없는지, 문화적인 문제는 없는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부지런하시고, 밝으신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세 번째 성당으로 갔습니다. 깊은 우물처럼 영적인 힘이 느껴졌습니다. 미사 한 시간 전에 성체 현시를 하고, 묵상하였습니다. 신자분들이 미사 전에 오시고, 성체 앞에서 조배하였습니다. 성당이 마치 수도원 같았습니다. 신문 홍보로 지친 저에게 하느님께서 힘을 주시는 걸 느꼈습니다. 앞으로 본당 사목을 하게 되면 꼭 해보고 싶었습니다. 성체를 현시하고, 묵상하시는 신부님이 마치 커다란 바위 같았습니다. 미사 중에 소개를 해 주셨고, 내년에 홍보하도록 시간을 마련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에게서 ‘산해숭심(山海崇深)’을 보았습니다.
신문 홍보를 다니면서 좋은 분을 만났습니다. 수녀원에서 숙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새벽에 수녀님들과 함께 기도하고, 미사 하는 건 기쁨이었습니다. 꽃이 피기 위해서는 땅속 깊이 뿌리가 양분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이 아름다운 건, 새벽에 기도하는 수도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녀님의 기도 소리를 들으니, 신문 홍보를 온 것이 아니라, 피정 온 것 같았습니다. 수녀원 서가에는 영적인 깊이를 더할 수 있는 책이 많았습니다. 여기저기 보물이 있었습니다.
바쁜 시간에도 차량 봉사를 해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봉사할 수 있는 시간과 건강을 주셔서 감사드린다는 자매님의 말을 들었습니다. 홍보가 잘 안 되면 저보다 더 안타까워 해 주셨습니다. 홍보할 기회를 주면 저보다 더 기뻐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두 가지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선교하고 싶다고 합니다. 지금도 충분히 봉사하고 있는데, 주님의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가고 싶다고 하십니다. 더 깊이, 더 멀리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 같았습니다. 순례를 다니면서 느낀 마음을 책으로 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분이 많습니다.
마리아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평화신문을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2주 정도 신문이 오지 않으면 전화를 하신다고 합니다. 지난 신문이라도 꼭 보내 달라고 하십니다. 평화신문은 종합 비타민이라고 하십니다. 교황님의 소식도 듣고, 교리와 전례를 배우고, 따뜻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니 종합 비타민이라고 하십니다. 어르신은 새 영세자에게는 평화신문을 선물로 주신다고 합니다. 주소와 구독료를 신문사로 보내신다고 하십니다. 이번에는 새 영세자가 없어서 신문을 선물하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어르신의 말씀을 들으니 힘이 나고, 용기가 생깁니다. LA에서 뉴욕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오늘부터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를 다녀옵니다. 잘 다녀올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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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합시다-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합시다”, 오늘 강론 제목이 참 마음에 듭니다. 강론 제목은 제 간절한 소망이 함축되어 있는 기도와 같습니다. “예수님처럼! 경계에서 경계인으로 삽시다”, 어제의 강론 제목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바로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하느님처럼! 으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하느님을 그대로 드러내는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많아 깨어 잘 챙기고 섬기는 디테일이 강한 장상을 보면, 아버지(어머니)같기도 하고, 형(언니)같기도 하고, 스승같기도 하고, 친구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참 이런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신 사람이라면 참 행복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렇게 서로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아버지같기도 하고 형같기도 하고 스승같기도 하고 친구같기도 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 사랑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며칠 전의 두 가지 깨달음이 깊이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어느 중소 도시의 기차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역사의 건물이 오래되어 빛이 바래 참 낡고 초라하고 어둡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서울역과는 극과 극이었습니다. 사람들도 건물을 닮았는지 한결같이 무감정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낡고 어둡고 초라해 보였습니다. 얼굴에 빛이, 기쁨의 빛, 평화의 빛, 생명의 빛, 희망의 빛이 없이 그냥 어두워 보였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생명입니다. 하느님은 빛입니다. 하느님은 영입니다. 하느님 대신 예수님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일치될수록 빛나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빛, 생명의 빛, 기쁨의 빛, 평화의 빛, 희망의 빛입니다. 좌우간 모든 빛의 원천이 하느님이자 예수님입니다. 어제 읽은 구절도 생각납니다.
-“이모는 당신 어린 시절의 이야기까지 모두 기억할 만큼 정신이 명료하여 실버타운의 생활을 훨씬 힘들어하신다. 94세가 되어 ‘희망도, 기쁨도, 기다림도, 할 일도 없이 우두커니 살아있다는 게 고문’이라고 괴로워하신다. 사람이 오가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행복을 주고받던 활동을 일체 접고 '삶을 그냥 흘려보내야 한다'는 건, 죽음을 기다리는 일은 맑은 정신으로..., 죽음보다 못한 고문이라고 하신다.”-
남의 일이 아닌 우리의 미래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런 미래를 대비하여 지금부터 하느님이,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이, 기쁨이, 평화의, 기다림이 대상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빛이 없는 이웃의 어둔 얼굴을 흉볼 것이 아니라 내 자신 예수님이 되어 빛으로, 즉 사랑의 빛, 생명의 빛, 기쁨이 빛, 평화의 빛, 희망의 빛으로 다가간다면 진정한 사랑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만나는 이웃에게 생명이, 희망이, 평화가, 기쁨이 되는 존재라면 얼마나 큰 하느님 사랑의 선물이겠는지요!
하느님이, 예수님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이런 예수님이기에 예수님을 만나는 이들마다 죽음은 생명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어둠은 빛으로 바뀌면서 위로받고 치유받고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사랑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엾이, 측은히, 불쌍히 여기는 가이없는 자비와 연민의 사랑이 하느님을 감동시켰고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를 대하는 예수님의 진인사대천명,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감동입니다. 이들을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십니다. 그대로 사랑의 기적입니다. 마침내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빵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광주리에 가득 찼으며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5천명이었다 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사랑의 성체성사의 기적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분명 사랑의 기적입니다. 하느님은 물론 사람들을 감동시킨 사랑의 기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해도 좋고, 사람들이 갖고 있던 것을 나눈 것으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여하튼 무엇이든 사랑의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사랑의 말씀을 주십니다. 참으로 주님께 사랑을 깊이 보고 깨달아 배운 사랑의 사도 요한임이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니곤 하느님을 알길이 없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더불어 앎도 깊어지면서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되어 지혜와 자비, 겸손과 온유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가 예수님이십니다. 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일방적으로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으로 살길은 예수님과의 일치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와 똑같은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생 광야에서 매일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 미사를 통해 당신과 사랑의 일치의 기적을 행하시고, 우리 모두 ‘세상의 빛’으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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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어라>
오늘 청주교구에는 부제, 사제서품식이 있습니다. 두 분의 사제와 부제, 한 분의 수도회 부제님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분들이 주님의 사랑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성직자가 될 수 있도록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루카6,38)
누구에게 무엇을 받으려 하기 전에 “주어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많은 군중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습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마르6,35-36)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야 된다고 하였지만 주님의 눈에는 그 순간을 최선을 다해 베풀어야할 시간으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가진 것을 내 놓기를 바라셨습니다.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적은 것이라도 고마운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고 나누니까 많아졌습니다. 이는 기적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감사하게 나누면 우리 삶의 자리가 기적의 자리가 됩니다.
세계적으로 하루 4만 명씩 굶어서 죽어가는 기아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통계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라고 합니다.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쓰지 않아서 문제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늦은 시간이든, 외딴 곳이든, 다시 말하면 언제, 어떤 장소에 있든 항상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도록 헤쳐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나눔으로써 서로 일치시키는 몫을 하라고 일깨워줍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25-27)
물질에 굶주린 사람뿐 아니라 영적인 갈망이 있는 사람, 사랑에 굶주린 사람, 인정받고 싶은 사람,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싶은 사람, 마음을 들어줄 상대를 찾는 사람, ...... 우리가 먹을 것을 주어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베푸는 삶, 행동하는 믿음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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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서는 사랑을 하는 이와 아직 사랑에 서투른 이들의 경계가 잘 드러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 6,34)
오늘 이 대목은, 예수님께서 파견되었다 돌아온 사도들을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게"(마르 6,31 참조) 하시려고 보내셨다가 벌어진 일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도 쉼이 필요할 정도로 피곤하고 지친 상태였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일행을 쫓아온 군중을 보시자 예수님께서 마음을 바꾸십니다. 아니, 마음이 저절로 군중을 향한 연민으로 움직인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사랑 자체이신 그분이 그밖에 달리 취할 행동은 없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십니다.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마르 6,36)
그러나 제자들 생각은 좀 다릅니다. 예수님께는 군중은 연민을 자아내는 사랑스럽고 연약한 자녀이지만, 제자들에게 군중은 아직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쉼을 방해하고 자칫 먹을 것까지 챙겨줘야 할지도 모르는 부담스런 무리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얼른 스승께 그들을 해산하여 자기 필요를 각자 해결하게 하자는 해법을 제시합니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마르 6,37)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뜬금없고 대책없는 명령에 볼멘 소리가 터져나옵니다. 한 데나리온이 농사 일꾼의 하루 품삯이니 이백 데나리온은 꽤 큰 금액이지만 최소 오천 명의 식대라 보면 터무니없이 과장한 액수는 아닐 겁니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마르 6,38)
"가서 보아라."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애초에 자기들이 해결할 마음이 없었던 제자들은 가진 것을 점검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쩌면 당연하지요. 고작 열두 명이 갑자기 길을 떠나면서 챙긴 음식이니 오죽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군중의 필요를 자기 일로 느끼기를 바라시기에 일단 먼저 알아보라고 하십니다. 해결책을 찾는 것은 그 다음 일이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 주시려는 겁니다.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마르 6,38)
너무 적어서 과연 무슨 소용이 될까 싶은 양입니다만 오히려 이 적은 양의 음식이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을 더욱 빛나게 할 겁니다.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마르 6,41)
예수님은 제자들의 부족한 사랑을 지적하거나 꾸짖지 않으십니다. 가진 모든 것이 대해 하늘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모습을 보여 주시고, 이 놀라운 기적에 제자들을 참여시키십니다. 제자들은 잘 준비된 사랑으로 나눔의 기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나눔에 참여하면서 마음에 사랑이 싹트고 자라날 것입니다. 어느 것이 먼저가 되었든 지금 여기는 사랑이 생동하는 현장입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7)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하느님을 아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도 하느님의 자녀되는 자격, 하느님을 아는 은총이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이는 그 자체로 하느님 자녀이고 모상이며 하느님스러움을 지닌, 하느님을 담고 또 닮은 존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군중을 향해 보여주신 연민과 가르침과 나눔은 사랑의 구체적 행위들입니다. 아직 사랑에 서툴고 미숙한 제자들이 차근차근 배워나가야 할 모습이지요.
예수님은 군중뿐 아니라 그렇고 그런 제자들에게도 사랑 가득한 눈길을 보내십니다. 논리적이고 인간적인 잣대를 서슬 퍼렇게 들이대며 삶의 과제들을 해결하려는 우리에게 지그시 웃으시며 "가서 보아라"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그저 가엾은 마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곧 하느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르 6,42)
얼마나 멋지고 흡족한 말씀인지요.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으니 따라붙은 가족까지 치면 몇 배는 될 엄청난 무리 중에 굶주린 이도 양껏 먹지 못한 이도 없었다니 말입니다. 오늘날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충만하고 만족스럽다면 바로 지금 여기가 하느님 나라일 텐데 말입니다!
공현 대축일 후 둘째 날인 오늘, 예수님은 사랑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이 곧 사랑이시지요. 그러니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 예수님께서 사랑의 하느님을 이스라엘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그저 출렁이는 감정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는 데서 나오는 연민입니다. 신부인 인간을 향해 퍼부으시는 열렬한 사랑과 더불어 이 애틋하고 짠한 연민의 사랑도 하느님의 주종목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연민 가득한 시선과,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 안에 머무릅시다. 질책이나 추궁, 탓이나 실망은 주님 것이 아닙니다. 연민은 하느님의 거대한 섭리도, 원대한 계획도 바꾸는 힘입니다. 결국 우리를 향한 주님의 연민은 우리를 당신의 연민이 되게 하실 겁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사랑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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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마르 6,41)
<창조의 순간>
주님의 창조 행위가 어떻게 만물과 뒤섞이는지 눈여겨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작은 빵을 드시어 눈 깜짝할 사이에 많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열 달의 노동으로 만들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그분의 열 손가락은 한순간에 이루어 내었습니다. 그분은 빵이 흙인 듯 손 위에 놓으시고 천둥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입술의 속삭임은 빗방울처럼 흩뿌렸고, 당신 입의 숨결은 태양을 대신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을 그분은 단 한순간에 이루어 내셨습니다. 빵이 적다는 사실도 잊은 채, 적은 것 가운데서 풍요로움이 탄생하였으니, 이는 "자라고 많아지고 땅을 가득 채워라."(창세 1,28)라는 태초의 축복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자식 없는 돌계집 같던 빵덩어리는 주님의 축복으로 열매를 맺게 되었고, 거기서 나온 빵조각도 많았습니다
-시리아인 에프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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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시간]
예수님, 당신을 흠숭하며 어머니 마리아를 통하여 주신 당신 말씀을 지키지 않았음에 용서 청합니다. 성모님은 밭갈이 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에 거룩한 평화의 씨앗을 뿌리셨으나 세상에는 전쟁이 일어났나이다. 그래서 여러 나라가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제 당신 앞에서 전쟁과 모든 파괴와 살육에 대해 참회합니다. 당신의 메시지를 소홀히 여겨 평화를 이루지 못했음을 뉘우칩니다. 저희는 이 시대에 당신께서 저희를 초대하고 계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목숨을 잃었고 사람들 마음속에는 폭력과 증오의 영이 복되신 평화의 성령보다 더욱 강하게 움직였나이다.
많은 사람이 힘을 합쳐 성모님의 메시지를 거스르며 그 내용을 없애려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고 냉정한 것에 대해 용서 청합니다.
예수님, 악이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으나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실 것을 믿습니다. 또한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 평화의 모후이신 마리아와 함께 당신을 흠숭하나이다. 저희가 전쟁을 일으켜 생명을 파괴한 것을 용서해 주소서! (침묵 가운데 반복한다.)(51)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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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가치’ 있다고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에 기대를 거신다. 하느님은 늘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 고뇌, 두려움, 모든 것을 마비시키는 의혹, 마음의 갈등과 분열이 있는 곳에 개입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바깥에서 변화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의 잠재력을 일깨워 일으켜 주시며,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가치 있다고 말씀하신다.
♣‘한편 기드온(판관 6-8장 참조)은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 낮은 자존감, 약함, 가족 내력을 경험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음을 경험한다. 매우 아름답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곳으로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 활동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불완전한 나에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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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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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오늘도 주님 공현의 연장선상에서, 참 빛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빛을 가장 가까이서 가슴에 기대어 체험했던 사도 요한이 오늘 <제1독서>에서 그 빛의 본질을 꿰찔러 선포해 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그렇습니다.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참 빛은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빛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영성체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당신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으로 보내셨네.”(에페 2,4;로마 8,3 참조)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늦은 시간이 되자,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마르 6,36)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신 까닭입니다. 그들의 배고픔을 당신의 배고픔으로 여기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먼저 굶주리는 이들의 먹을 것을 챙겨주십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허기진 모세와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듯이 말입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당신 몸을 양식으로 내놓으셨듯이 말입니다. 그토록 당신 자리를 떠나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마르 6,41)
이리하여,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안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참 빛이신 당신의 사랑을 공현으로 보여주시고 드러내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나아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 사랑을 실행하도록 맡겨졌습니다.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그 지고한 사랑에 참여시키셨습니다.
오늘도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떼어주십니다. 이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안으로 몸소 들어오십니다. 그토록 차고 넘쳐나는 사랑을 우리도 하라 하십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건너 온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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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주님!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소서.
제 몸이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늘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시고,
당신께서 그러하시듯,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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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어둔밤>
"외딴 곳이고 이미 늦은 시간"
인간의 뇌는 시간이 되면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고
먹어야 충족된 기분으로 안정을
느낍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만나야
겠다는 일념하나로 주린배를 뒤로
하고 있는 군중들이 안쓰러운 예수님.
행동하십니다
사랑을 먹여야겠다는 마음
그 마음이 빵이 되는 기적
모두가 먹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외딴 곳이고 늦은 시간은
영적으로 어둔밤이지만
주님 은총 넘치게 받을
절호의 기회이니 놓치지 마세요.
"부르면 옆에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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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먼저 사람이 보여야
나눌 수 있습니다.
배고픈 이웃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나누어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나누어야 할 시간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자라게 하는 것은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배고픈 이웃의
입장이 되어 나누는
풍요로운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 모두를 배부르게 하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나눔이 절실한
우리들의 시간입니다.
나누어야 모을 수 있고
모아야 나눌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욕심에 묶여있는 너와 나를
나눔으로 풀어주는
'풀림의 성사'입니다.
길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나눔이 있습니다.
서로를 살리는
성체성사는
가장 풍성한
생명의 축제가 됩니다.
우리의 생명은
사랑으로 나눌 때
모두를 배부르게 하는
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내가 먼저 나누는
생명의 성사입니다.
모든 생명은
하느님 안에서
같은 몸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나눌 때
하느님 현존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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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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